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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옥의 발품일기(21)- ‘어머니의 희망버스’ 승리의 그날까지 달려갑니다.

( 김진숙 지도와 이소선 어머니 묘역에서  만나다)

이명옥 | 기사입력 2012/02/21 [02:10]

이명옥의 발품일기(21)- ‘어머니의 희망버스’ 승리의 그날까지 달려갑니다.

( 김진숙 지도와 이소선 어머니 묘역에서  만나다)

이명옥 | 입력 : 2012/02/21 [02:10]

▲ 승리의 그날까지 달려, 달려!     ©이명옥
 
“진숙아 내려와서 싸워라. 더 이상 노동자가 죽어서는 안 된다. 꼭 살아서 내려와야 한다. 살아서 싸워야 한다”


 1973년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노동자도 사람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며 분신 항거한 청계천 피복노동자 전태일. 그 아들을  묘지가 아닌 가슴에 묻고 40년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아온 이소선 어머니.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김진숙이 크레인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이소선 어머니가 쓰러졌고 “진숙이를 꼭 살려야 한다”는 유언을 남긴 채 소천 하셨다. 

이소선 어머니가 그토록 타고 싶어 했던 희망버스를 망자가 되어 영정사진으로  타고 갔지만 크레인위의 김진숙과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 대신  김진숙. 송경동, 정진우. 쌍차. 한진. 재능. 콜트 콜텍 해고노동자들과 희망뚜벅이가 '어머니의 희망버스'를  타고  이소선 어머니가 잠드신 마석  모란공원 묘역을 찾았다 .

 
▲ 깈진숙 지도위원이 이소선 어머니 묘역에 절을 하고 있다.     ©이명옥

크레인에서 내려 온 뒤 처음으로 이소선 어머니 묘역을 찾은 김진숙 지도위원은 차마  묘역에 한걸음에 다가서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뒤돌아서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영정사진으로 크레인 위의 김진숙 지도를 만나러 가야만 했던 이소선 어머니, 그 어머니가 살아 생전 마지막으로 마음에 품고 가셨을 이가 김진숙 자신임을 알기에 어머니 묘역에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자기는 다른 노동자들과는 다르다며 니체와 시집을 끼고 다니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노동자의 정체성과 계급성을 깨닫아  개안을 했다던 사람, 전태일 평전을 읽고 비로소 노동자도 사람이며 벌레가 아니라는 것. 결코 벌레처럼 인격을 짓밟혀선 안 되고,  쥐똥과 쇳가루가 섞인 밥을 먹으며 혹사당하거나 화장실을 덜 가기 위해 목이 말라도 물조차 마실 수 없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을 알고, 세상을 바꿀 희망과 용기를 얻어 전태일의 삶을 심장으로 느끼며  그 길을 이탈하디 않고 올곧게 살아 온 사람. 김진숙은 <소금꽃 나무>에서 그 천지개벽, 환희의 순간을 이렇게 고백한다.

 

▲ 900만 비정규직 노동자를 깨울 <소금꽃 나무>     ©이명옥
 
극장 화장실은 늘 줄이 길게 서 있었다. 요령껏 새치기를 해서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도“니는 싸러 오나. 일하러 오나”하는 주인아저씨의 구박이 다락까지 따라오니 물 한 잔 안 마셔도 방광은 늘 터질 것 같았고 배설조차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어딜 가 봐도 비슷한 조건이란 사실을 나는 일찌감치 체념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였고 그때마다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 갈 뿐이었다. 한 번도 그런 조건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안 했다. 아니 나는 내 존재 자체가 벌레처럼 징그럽고 싫었다. 벌레가 뭘 할 수 있으며 벌레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전태일은 너는 벌레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고, 인간이 당연히 품어야 하는 희망에 대해서 절규하고 있었다. 희망. 세상을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을 품은 인간이라는 존재.

지금보다 나은 삶이 있다는 사실이 기뻤고, 그 진실은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24년 뿌리 깊은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고 그 일로 대공분실 세 번, 부서 이동 두 번, 해고, 출근 투쟁, 무자비하고 끝이 없던 폭행, 수배 5년, 두 번의 감옥......

지금까지 나를 버텨 왔던 건 그때의 자책과 용기가 아니었나 싶다.
다시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말자는 그 약속을 얼마나 지키면서 사는지는 솔직히 되물을 시간도 없고 자신도 없다. 그러나 삐삐 차고 핸드폰 들고 아반떼를 살까 고민하면서 당구장 들락거리고 호텔에서 수련회를 하면서 박찬호나 차범근을 떠들어대며 운동의 위기를 말하는 간부들에게 전태일은 그저 11월쯤이면 한 번쯤 회자 되는 옛날 위인쯤인 게 여전히 안타깝다.

전태일의 삶을 심장으로 느끼지 못하고는 노동자 정신을 말할 수 없고, 전태일의 죽음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는 노동자의 계급성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가용이 점점 커지고 컴퓨터 용량이 커질수록 더 분명해져야 하는 사실임에도......  -소금꽃 나무 그 시절의 이력서 중-

 


▲ 어머니의 희망버스는 멈추지 않습니다.     © 이명옥

이 땅의 노동자는 1,500만 명 이다. 그 중  비정규직이 900만 명이고 청년실업자 수만 해도 120만 명에 육박한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 똑같은 일을 하면서 정규직의 60%  정도의 임금을 받으면서도 해고의 불안에 시달려야 하는 비정규직의 고용불안정과 불평등을  자본주의  사회 현상이라며 당연히 여기는 이들이 꽤  있다. 대학을 졸업하려면 5천만 원짜리 빚쟁이가 돼야하고  졸업 후 절반은 실업자가 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 주소다. 

희망을 저당 잡힌 출구 없는 사회, 절망의 덫에 걸려 희망이 씨앗이 숨막혀 버린 사회에  26년 간 해고노동자로 살아 온 김진숙이 85호 크레인에 올라 투쟁하기 시작하면서  희망의 작은 불씨를 일궈 낼 씨앗이 움트게 되었다. '반드시 살아서 내려와야 한다'는 이소선 어머니의 마지막 당부대로 김진숙을 살리려고 자발적으로  희망버스에 올라 부산 영도로 달려간  탑승객들이  마침내 김진숙을 죽음의 크레인으로부터  산자의 자리, 삶의 자리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 김진숙이 글이 아닌 온 몸, 그이가 살아 온  존재가 담긴  진실로 외친다. 희망을 품고 포기하지 않는 인간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인간은 당연히 희망을 품어야 하며  품은 희망으로 함께 연대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꿔야만 한다. . 희망을 품고 연대하는 동지가 있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어머니의 희망버스를 타고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에게  달려갔던 이들은 돌아오는 길에   동지 앞에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노동자가 주인 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날, 승리의 그날이 오기까지  어머니의 희망버스는  멈추지 않고 달려가겠다,   결코 그 길에서 이탈하지 않겠다고. 

 절망아,  길을 비켜라 어머니의 희망 버스가 달려간다. 세상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  희망의 등불을  환하게 켜든 사람들을 싣고서.

기자 사진
여성과 장애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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