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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한' 맺힌채 가시다.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4/06/08 [23:06]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한' 맺힌채 가시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14/06/08 [23:06]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며 일본대사관 앞을 지켜오던 또 한 명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 91세 배춘희 할머니(사진)가 끝내 한을 풀지 못한 채 저 세상으로 가셨다. 8일 오전 5시 경기 광주 '나눔의집'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192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배 할머니는 19세 때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일제의 꼬드김에 속아 중국 만주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전쟁을 겪었다.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왔지만 자리를 잡지 못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혼자 살았다.

1980년대 초 친척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사기를 당해 재산을 모두 잃었다. 평생 상처투성이로 살아온 할머니는 그래서 한동안 사람을 잘 믿지 못했다.

피해 생존자 54명으로 줄어

1997년 5월 배 할머니가 처음 나눔의집에 왔을 때도 할머니는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드리려 한다"는 상담자들의 설명에 무관심했다. 방문객으로 나눔의집을 찾는 이들에게도 "당신들이 뭘 해줄 수 있냐"며 떨떠름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그 같은 성격은 나눔의 집에서 180도 변했다. 할머니는 3년 전 병석에 눕기 전까지 수요시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할 정도로 사람들과의 벽을 허물었다. 일본어는 물론 중국어와 러시아어에도 능통해 나눔의집을 찾은 외국인 방문객들의 통역 일을 도맡았다. 일본 학생들이 방문하면 앞장서 세심하게 신경을 썼고, 떠나는 날엔 본인이 더 아쉬워했다고 나눔의집 관계자는 전했다.
▲ 8일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가 가슴속에 묻어둔 아픔을 담아 표현한 '중국에서'라는 제목의 그림.  나눔의집 제공   © 경향신문

그림 그리기도 좋아했던 배 할머니는 가슴에 묻어둔 아픔을 그림으로 말했다. 나눔의집 마당 돌은 할머니의 화폭이 됐다. 할머니는 고향의 추억과 만주의 아픔을 돌멩이에 옮겨 담았다.

일본에서 엔카 가수로 활동했던 배 할머니는 늘 음악을 즐겼다. 배 할머니는 집 안에 음악이 흐르지 않으면 쓸쓸해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애환을 담은 '소녀 아리랑'을 곧잘 불렀다. 노래에 대한 역사나 사연에도 해박해 주변 할머니들이나 나눔의집 활동가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감기가 심해진 지난 3월 주변 사람들에게 "매우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동안 신세를 많이 졌다"며 이별을 예감하는 말을 남기고 결국 침대에 누워서만 지냈다.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은 "일본 극우 정치인의 망언이 있을 때마다 할머니가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됐다"며 "변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에 늘 안타까워하셨다"고 말했다.

배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7명 중 생존자는 54명으로 줄었다. 고인의 빈소는 경기 성남시 야탑동 분당차병원에 마련됐다. 영결식은 10일 오전 나눔의집장(葬)으로 치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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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봉자 2014/06/10 [09:30] 수정 | 삭제
  • 만주 시절에는 군인보다 높은 급여를 받고 광복 후에는 유엔군을 상대했다 돈도 모인 것이다 폐 종이 줍기도 하지 않고 지붕 아래 살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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