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로고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용기

[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4/05/29 [23:09]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용기

[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서울의소리 | 입력 : 2014/05/29 [23:09]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나야 했는지, 누구에게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지 명확히 밝혀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혐오스런 말과 행동이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의 자리를 메워 놓았습니다.


사건의 원인도 정황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남아 버린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것은 떠난 생명들이 살아 갈 수 있었던 날만큼 길고 긴 나날, 바위처럼 무겁게 우리의 가슴을 짓눌러 올 슬픔과 수치입니다. 삼백 명 넘는 생명이 서서히 수장 당하는 것을 온 국민이 지켜 보면서 단 한 사람조차 구할 수 없었던 이 믿기 힘든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공공의 안전과 인권이 국가와 공동체로부터 유기된 채 사적 이윤의 시장에 내던져 지고, 그것도 모자라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 언론에 의해 나날이 유린당하고 있는 이 참혹한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우리의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 세월호와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슬픔은 무엇일까? 때로 무심할 수도 있지만, 자식 키우는 엄마의 심정은 무심하고자 해도 그게 되지 않는다. 그는 또 다른 나의 아이들이기에. ⓒ한상봉 기자


그러나 두려운 것은 그 슬픔과 수치를 어찌 가슴에 안고 살아갈까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슬픔과 수치가 곧 잊혀질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망각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아마도 지쳤을 것입니다. 무능력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 봐야 별수 없다는 식의 패배주의에 어느새 젖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낯간지러운 변명들을 정당화하는 명분들은 ‘법’과 ‘질서’와 ‘안정’입니다.


정의 추구할 의무는 법 준수 의무보다 선행한다

이미 많이들 알고 계신 일화이지만,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오만한 제국> (Declarations of Independence: Cross-Examining American Ideology)에는 이런 이야기가 등장하죠. 민권운동과 반전시위로 미국 전역이 들썩이던 60년대, 하버드대학의 한 법대생이 졸업식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거리들은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대학들은 폭동과 소요를 일삼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파괴하려는 중입니다. 소련은 힘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안으로부터의 위험, 또 외부로부터의 위험. 우리는 법과 질서가 필요합니다. 법과 질서 없이 우리나라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청중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소요의 중심인 캠퍼스에서 하기 어려운 용기 있는 발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학생은 청중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연설한 내용은 1932년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 당원들 앞에서 한 것입니다.”(하워드 진, <오만한 제국> 197)


법과 질서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법과 질서의 근간에 정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흔히 묵과합니다. 법과 질서가 나 자신과 우리 모두를 지켜주는 안전망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법의 통치는 이미 만연해 있는 부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를 해소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 불평등을 강화합니다. 그러니 어떤 법이든 무조건 복종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안정을 찾아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빠르든 늦든 거대한 무질서로 이어지게 됩니다. 정의를 추구해야 할 의무는 법을 준수해야 할 의무보다 선행합니다.


또, 무질서를 너무도 두려워하는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일수록 개개인의 목소리를 낮추고 나보다 힘 있는 이들, 많이 아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지식인들, 행정가들, 정치인들에게 우리의 권리를 위임하는 것이죠.


그러나 하워드 진은 전문가들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가정을 지적합니다. 첫 번째 가정은 전문가는 일반 시민보다 문제를 명확하게 보고 현명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세월호 사건을 통해 우리 모두 깨달았듯,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문가이기 때문에 오히려 모두가 보는 것을 못 보고,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을 못 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두 번째 가정은 전문가들이 나와 똑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똑 같은 것을 원하고,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기에, 그들이 나를 대변할 수 있도록 해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전문적 소양으로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중립’을 지킨다면 내게 불이익을 주지 않으리라는 순진한 기대를 하는 것이죠. 과연 그럴까요?


이미 부와 권력이 특정한 방법으로 분배되고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회 속에서 객관성과 중립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현대 사회에서 지적, 기술적 전문가란 일종의 특권입니다. 특권을 갖는다는 이미 중립을 지키기에 매우 곤란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결국 그들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인도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며, 그들이 전문적인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지 않은 채 누군가에게 나의 권리를 맡긴다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하고 나약한 행위입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던 이들이

이메일을 주고 받고, 오프라인 모임도 가지며, 자발적으로 포스터를 만들고,

리본을 묶고, 전단을 복사하고...가엾은 생명들 때문에 


지난 5월 18일, 미국에서는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50개 주 동시다발 집회가 있었습니다. 주로 엄마들을 회원으로 가진 온라인 공동체 미시유에스에이(MissyUSA)를 중심으로 기획, 실행이 되었던 행사였습니다. 십시일반 엄마들의 쌈짓돈을 모금해 지난 5월 11일과 16일에는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에 세월호 관련 광고를 싣기도 했던 그 공동체이지요.


50개 주 집회 또한, 뉴욕, 버지니아, 아리조나,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뉴저지, 미주리, 미시간, 텍사스,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위스컨신 등 각 주마다 단 한 명이라도 나선다면 해보겠다는 의지로 시작된 행사였습니다. 배후 세력이 있다는 둥 지원자가 있다는 둥 항간에 억측들이 많은 모양입니다만,


이 행사에 참여한 엄마들 거의가 집회 경험이 없고, 집 밖의 테두리를 벗어나 본 일이 별로 없는 분들입니다.


미네소타 집회 사진, 미네아폴리스 칼훈호수, 5월 18일 ⓒ조민아

엄마들의 동기는 어쩌면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엄마들이었기 때문에 가엾은 생명들을 그저 가만히 앉아 떠나보낼 수가 없었고,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의 마음을 멀리서나마 위로하고 싶었고, 내가 움직이지 않고 남 탓만 할 수는 없기에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일어선 것이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미네소타에서도 집회가 있었습니다. 이전에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던 이들이 이메일을 주고 받고 오프라인 모임

도 가지며, 자발적으로 포스터를 만들고, 리본을 묶고, 전단을 복사하고, 이웃집에 전화를 돌리며 사람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당일, 한인 공동체가 크지 않은 곳이라 20명 혹은 30명 정도만 모여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50명이 웃도는 사람들이 모여 우리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엄마들이 남편을 데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유모차를 끌고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지요.


아직 쌀쌀한 날씨에 호수를 등지고 서서 자유발언으로 생각을 나누고, 노래로 마음을 모으고, 피켓을 들고 뜻을 전달하고, 특별법 제정과 범국민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위한 서명을 통해 유가족들과 뜻을 함께했습니다. 시위, 집회라고는 남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는, 정치에 전혀 관심도 없었다는, 남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것이 난생처음이라는 소박한 얼굴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가만히 있으라” 했다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요. 엄마들은 깨닫기 시작한 겁니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내가 나서야 한다는 것을요. 그리고 전문가들의 화려하고 번듯한 말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우리들의, 투박한 분노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요.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입니다. 불의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입니다. 분노하고, 용기를 내어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이들만이 희망을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이들만이, 정의가 바로 세워질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교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