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노래가 10년 터울로 이 세상에 태어나(아침이슬 ; 1970년, 임을 위한 행진곡 ; 1980년) 민주주의가 압살당하는 현장에서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붙잡고 되살리려 발버둥을 치는 민중들의 입을 항상 떠나지 않았던 노래이다. 두 노래는 노래라기보다 차라리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현장에서 민중들이 토해내는 피울음의 신음이자 인간을 향한 호소가 아닌 하늘을 향한 절규였다.
두 노래의 가사나 곡조가 담고 있는 뜻과 분위기가 그 노래가 태어난 시점에 있어 한국 민주주의의 찢기고 할퀴어진 풍경화이자 빛바랜 사진이다. 하지만 두 노래 간에는 서로 형제 같으면서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차이와 간극이 있다.
1. 아침이슬(위키 백과 해설 옮겨옴)
아침 이슬은 1970년, 김민기가 작사·작곡하고 양희은이 부른 포크 록 장르의 노래이다.
[발자취]
1970년 8월 28일 발표해 이듬해인 1971년 김민기의 독집 음반으로 출시되었다. 그 뒤로 곡을 만든 김민기 등이 여러 번 녹음했다.
[민중가요-화]
발표 당시 대한민국의 억압된 정치 상황을 은유하는 듯한 가사로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으며, 1975년 다른 곡들과 함께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10월 유신이 끝나고 제5공화국 시절까지 금지곡으로 남아 있었지만, 민주화를 염원하는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노래로 널리 불려 왔다.
훗날 양희은은 노래를 지은 김민기나 자신은 이 노래가 학생들의 시위에 사용되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을 독려하기 위해 만든 노래도 아니라고 밝혔다.
역설적이게도 이 노래는 1971년 정부가 건전 가요로 선정하기도 했다.<이상 백과사전 해설내용>
[노래 가사]
1.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망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2.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떠오르고/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필자가 덧붙이는 해설]
1970년은 수많은 학생들의 피와 목숨 값으로 4.19혁명에 의해 일군 짧은 민주주의가 매국노 박정희가 휘두르는 총칼에 의해 무참한 죽임을 당하고, 박정희가 정권을 강탈하여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군사독재가 10년 째 펼쳐지던 암울한 시절이다. 박정희의 독재는 3번에 걸쳐 독재의 강도를 더해가며 진화를 거듭했고, 그 1기가 군복위에 양복 걸치고 군사독재를 자행한 (박정희 쿠데타 과도정부와 1~2선으로 1961. 5. 16~1971. 8. 15)기간이었고, 2기는 억지로 3선 개헌을 하고 3번째로 연임을 한 짧은 기간(1971. 8. 15~1972. 10. 17)이었고, 3기가 박정희독재의 결정판 유신총통제 기간(1972. 10.17~1979. 10. 26)까지이다. 그러니 1970년은 박정희독재 1기로 독재의 강도도 그렇게 높지를 안 했었고 어쩌면 박정희가 연임을 하고 물러나는 1971. 8. 15이면 이 땅에 두 번째로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 할 것으로 예상되기도 했던 시점이다.
어쩌면 저 노래의 가사가 그것을 함축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독재의 긴긴 밤을 지나는 늘어지고 침울한 곡조를 지나 앞으로 다가올 희망을 보며 가슴이 터져라 희열을 발산하는 그런 곡조로 끝을 맺는다. 작사 겸 작곡가 김민기의 삶의 궤적 또한 그것을 뒷받침한다. 김민기는 깨어있는 소위 말하는 영혼이 제대로 깃들어 있는 의식과 개념이 있는 음악가였다.
노래를 부른 양희은은 작곡가 김민기나 자신은 저 노래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그런 노래로 불릴 것을 전혀 예상 못했다고 하지만 그건 양희은의 생각일 뿐이다. 다만 양희은은 보기 드문 가창력을 타고 났고 저 노래를 소화하기에 알맞은 음역의 소유자인데 우연케 김민기와 초등학교동기동창이라는 인연으로 양희은의 가창력을 어려서부터 알고 있는 김민기에 의해 저 노래를 부르는 행운을 잡았을 뿐이다. 그러니 양희은의 노래에는 생명은 있으되, 얼과 혼이 깃든 영혼은 없는 노래이다.
여름에 신록이 우거지고 온갖 범나비가 날고 매미들이 즐거이 노래를 하도록 마련한 것은 하늘의 섭리이고, 매미는 그저 짧은 일생을 즐거이 노래할 뿐이다. 가사를 짓고 곡을 붙인 것은 하늘의 섭리요. 그 곡을 받아 하늘의 섭리가 이끄는 대로 낭랑한 목소리로 소화를 해 낸 것은 매미의 본능일 뿐이다. 매미가 어찌 하늘의 오묘한 섭리를 헤아리리요?
양희은의 입에서 불리어질 때는 그냥 듣기에 애찬한 유행가일 뿐이고, 아스팔트 위에서 민주주의를 목말라 하는 민중들이 부를 때는 억압받는 민중들의 절규와 희망을 담아내는 노래다. 생명은 있으되 영혼은 없는 노래다.
2. 임을 위한 행진곡
박정희의 혹독했던 동토공화국 18년이 총알 두 방에 졸지에 막을 내리고 대한민국에도 또다시 제2의 봄날이 찾아오는 듯 했다. 그런 국민들의 희열과 여망을 “웃기지 말라!”며 보란 듯이 깔아뭉갠 게 전두환과 노태우다. 그 꿈과 희망을 짓밟힌 민중들의 한을 광주가 대변해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꿈을 되찾자고 입이 아닌 온 몸으로 피를 토하며 몸부림치며 절규하는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역사와 유래는 너무나도 유명하고 널리 알려졌으니 백과사전 풀이를 옮겨오는 별도의 설명은 생략한다. 가사는 이 시대가 배출한 걸출한 선각자이자 단군할아버님의 얼과 혼을 100% 고대로 물려받으신 백기완 선생의 책 한권을 다 채우는 긴긴 시 <묏비나리>의 한 구절을 노래가사에 알맞도록 수정-가감을 하여 가사를 삼고, 1980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광주금남로에서 그 역사의 현장에 함께 했던 음악가 김종률에 의해 산목숨이 일순간에 주검으로 뒤바뀌며 토해내는 영혼의 울음소리를 그대로 가슴속에 녹음을 해두었다가 뒷날 가슴속에서 재생되는 영혼의 흐느끼는 소리를 오선지에 그려 넣어 곡조를 삼고, 노래는 특정가수가 부른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어느 누가 불러도 그 곡을 부르는 사람이 바로 가수가 된다.
민주주의를 목 말라하는 모든 이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래를 잘 부르고 못 부르고에 관계없이 그 노래를 부를만한 영혼을 타고난 사람이 부르면 그게 세상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가장 잘 소화하고 가장 잘 부르는 노래가 된다.
노래에 무궁한 생명과 함께, 얼과 혼이 깃든 산 사람의 노래가 아닌 영혼의 노래다. 어찌 감히 “아침이슬”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를 손가? 어림없는 비교다. 맹자나 한석봉의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위대하고 지극한 사랑과, 돈으로 치 발라 자식을 자연에 핀 꽃이 아닌 화분속의 꽃으로 피우려는 타산적인 어미의 계산된 사랑과 같은 차이가 있다. 어미와 돈이 떠나는 순간 화분속의 화초는 말라 들어간다.
3.“임을 위한 행진곡”의 끝나지 않은 수난
그런 광주와 금남로와 뗄레야 뗄 수가 없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이명박은 “방아타령”으로 대신하려다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명박에 대한 인간성을 다시 한 번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괜한 시간낭비이고 이명박의 모든 짓거리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백미는 5.18광주민중항쟁을 추모하는 5.18묘역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몰아내고 “방아타령”으로 대신하려 한, 웃음도 나오지 않는 슬픈 코미디다. 쥐가 아니고서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상상을 할 수도 없는 그런 발상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그렇게 듣기에 거슬리면 다른 진혼곡으로 하든가 그 묘역의 성격과 어울리는 장엄한 노래로 대신하자고 할 것이지, 어떻게 가을 추수를 하고 신명나게 방아를 찧으면서 아낙네들이 부르는 흥겨운 가락인 “방아타령”을 생각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아마 이명박이 자기의 아비와 어미가 뒈졌을 때 “방아타령”을 신나게 부르면서 춤을 추며 장사를 지냈는지 모르겠다.
오냐! 이명박 네가 뒈지면 전 국민이 광장으로 뛰쳐나와 삶은 쌀을 절구통에 집어넣고 신명나게 “방아타령”을 부르면서 떡방아를 찧고 떡을 빚어 떡 접시를 돌릴 예정이다. 기다리고 있거라!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어이 박근혜정권이 또 딴죽을 걸고 나왔다. 총리 정홍원을 내세워 별의 별 시답지 않은 이유를 들이대며 기어이 5.18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몰아내려 하고 있다.
5.18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몰아내려는 것은 산 사람의 머리를 도끼로 쪼개고 뇌를 들어내고 영혼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말과 다를 게 없다. 5.18광주민중항쟁과 임을 위한 행진곡은 뗄 레야 떨어지지도 않고, 강제로 떼는 순간 둘은 각자가 주검이 되어 하늘에서 영혼이 다시 만나 하나가 된다.
이명박은 “임을 위한 행진곡”대신 “방아타령”으로 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이 정권은 어떤 노래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신하려고 하나? 혹시 “새마을 노래”!? 역겨워서 그 노래의 가사를 여기에 옮기지는 않는다. 박정희는 닛본도를 잘 휘두르고 왜 장총만 잘 쏘는 줄 알았더니 시(詩)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음악에도 소질이 있었나보다! 그러니 “새마을 노래”같은 불후의 명곡을 작사 작곡을 했을 것 아닌가?
4. 임을 위한 행진곡!
이제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한민국을 넘어 온 지구상에서 민주주의가 핍박받고 인권이 탄압을 받는 세계의 모든 곳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는 노래가 되었다. 그 현장에서 탄압받다 죽은 영혼들에 의해 하늘에서도 불려지는 우주의 노래가 되었다. 그런 우주의 노래를 길어야 5년이면 물러날 일개 정권이 감히 이를 능멸하고 없애려 하다니! 종이로 접은 무인비행기에 밤톨만한 화약 한 덩어리를 실어 날려 보내 해와 달을 산산조각 내려는 무모함이다. 그 무모함의 끝은 어디인지?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람의 입으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사람의 가슴으로 불러 잠자는 영혼을 일깨우는 노래다. 수난이 쌓이면 쌓일수록 “임을 위한 행진곡”은 더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할 것이다. 아- 자랑스러운 우리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