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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신드롬과 대한민국의 현실...(2):서울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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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신드롬과 대한민국의 현실...(2)

레 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과 부동산, 민주공화국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3/02/06 [13:33]

레미제라블 신드롬과 대한민국의 현실...(2)

레 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과 부동산, 민주공화국

서울의소리 | 입력 : 2013/02/06 [13:33]
4. 레 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과 부동산, 민주공화국

저는 지난 글에서, 21세기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 전개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는 분들도 상당히 많은 듯 하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권력’을 상대로 한 민주시민들의 싸움은 180년 전과 지금, 그 근본 양상 자체가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썼습니다.
 
우선,1832년 파리에서 바리케이드 뒤에 섰던 사람들이 무엇을 얻고자 싸웠던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속 대사에서도 잠깐 나오지만,  그들은, 과거에는 자유를 얻고자 싸웠지만, 지금은 빵을 얻고자 싸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과거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를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절대왕정(구체제)을 상대로 자유를 얻고자 싸웠습니다. 그 뒤 나폴레옹을 거쳐 1815년에 다시 절대왕정이 복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대혁명이 아무런 성과없이 실패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대혁명 때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동생이 프랑스 왕으로 복귀했지만, 대혁명을 거친 후인지라 왕 역시 조심해야 했습니다. 왕은 국민들과 일정선에서 타협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왕은 부르주아들에게 절대적인 자유를 보장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프랑스의 부르주아들을 왕의 편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은 산업화(산업혁명)와도 맞물립니다. 19세기에 프랑스는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었는데, 이 시기에 절대왕정과 부르주아들이 같은 편에 서게 되니 노동자와 서민들은 더욱 비참한 처지로 떨어지고 맙니다(1789년의 대혁명 때는 부르주아와 노동자, 서민들이 모두 절대왕권을 상대로 같이 싸웠던 것인데…).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사창가로 떨어진 판틴이 어떤 남자와 싸우게 되어 자베르 경감에게 끌려갈 위기에 처한 순간, 장 발장(당시는 시장)이 구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자베르 경감과 시장인 장 발장은 판틴을 구속할 것인가를 두고 언쟁을 벌이게 됩니다.
 
원작을 보면 자베르 경감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 창녀가 잘못한 것이지 이 신사가 잘못했을 리가 없다, 나는 이 훌륭한 신사분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선거권을 갖고 있는 ‘시민’이다, 그는 7번가 대로변에 3층짜리 건물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다
 
절대왕정과 부르주아가 손을 잡은 시절에는,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만이 선거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체제가 상정한 사회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 사회의 일부를 물적(부동산)으로 소유한 사람만이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시민’이다.
이들만이 선거권을 가져서 자신들의 대표를 의회로 보낼 수 있다.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이 사회에 대한 소유권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이 사회에서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시민’이 아니다. 그들은 부동산을 소유한 ‘시민’들에게 빌붙어서 그들 덕에 먹고사는 기생적인 존재들일 뿐이다.
 
자베르 경감은 체제의 수호자이므로, 당시의 체제가 갖춘 논리를 장 발장에게 들이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체제가 이와 같은 논리에 바탕하여 움직이는 것이었으므로,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와 서민들은 선거권이 없었고, 절대왕정(과 이에 협력하는 부르주아들)은, 최소한의 권리를 요구하는 노동자와 서민들을 가혹하게 일방적으로 탄압할 뿐이었습니다.
 
1789년 대혁명의 결과 일단 부르주아들이 선거권을 보장받고, 절대왕정(구체제)으로부터 자유를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역사는 일부 진보한 것이 맞지만,  그 진보의 결과로 노동자와 서민들은 더욱 비참한 처지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역사의 사명은, 노동자와 서민들이 ‘우리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권력’에게 인정시키는 것이 되었습니다.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우리도 ‘사람’이며, 우리도 권력으로부터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시켜야 했습니다. 그 투쟁의 목표를 구체화하면 ‘선거권 획득’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 속 대사에서는 ‘과거에는 자유를 얻고자 싸웠지만, 이제는 빵을 얻고자 싸운다’고 했지만, 이들이 힘든 노동을 하고도 빵조차 제대로 얻을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떨어진 이유는, 정치적으로 표현하자면 선거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권력과 사회의 기득권층으로부터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한 서민과 노동자들이 선거권을 얻기까지 역사는 더욱 많은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영화에서 보듯이 1832년 6월의 봉기는 철저하게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사람이니 사람으로 대우해달라’라는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들 역시 ‘직접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직접행동’이란 ‘암살’을 의미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용어입니다.
 
권력의 정면에서 들고 일어나 항의하는 바리케이드가 실패했을 때, 그들은 직접행동을 선택한 것입니다. 제도화된 폭력의 거대한 힘에 정면으로 맞설 수 없게 되자, 제도를 우회하는 대항의 길을 찾은 것입니다. 그들은 제도의 정점에 선 국왕을 직접 암살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의 알렉상드르 2세, 프랑스의 카르노 대통령 등 열 명 이상의 군주와 국가 수반을 암살했습니다. 결국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 때문에라도 유럽의 국왕들은 양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진리’가 굉장한 힘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계급배반 투표가 일어난다고 하지만, 계급배반은 반대방향으로도 일어납니다.
 
영화 레 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부자집 도령인 마리우스와 같은 인물은 영화 속에만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해달라, 라는 ‘자명한 진리’의 요구가 무참히 짓밟히는 현실은, 많은 인텔리 청년들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계급과 상관없이 떨쳐 일어나도록 만들었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유럽에서는 실제로 마리우스와 같은 젊은이들이 넘쳐났습니다.
‘직접행동’에 나섰던 이들 중에도 인텔리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19세기에 직접행동에 나섰던 무정부주의자의 상징적인 모습은, 안경을 낀 나약해보이는 얼굴이지만, 망토를 두르고 검은 모자를 눌러쓴 채, 심지에 불을 붙인 폭탄을 겨드랑이에 끼고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입니다.
 
일제시대 우리나라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던 청년들은 넘쳐났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그러하고,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등이 그러합니다. 그 외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례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당시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의열단의 활동을 그린 영화 ‘아나키스트’가 장동건 주연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현대사로 넘어와서도 군부독재 시절에, 자신이 속한 계급(?)을 떠나 민중의 편에 섰던 인텔리 청년들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에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사회여론에 호소하고자 했던 대학생들, 박종철, 이한열 등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민주공화국’이라는 단어는 참 굉장한 무게를 지닌 단어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이 한 구절이 우리나라 헌법에 명시된 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수천 년 인류 역사 동안 숱한 이들이 흘린 눈물과 피의 대가가 저 한 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총을 맞고 숨져간 꼬마 소년 가브로슈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의 희생이 쌓이고 쌓여, 오늘날 우리는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다. 민주공화국,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민(民)이 주인입니다.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도,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도 똑같이 주인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바리케이드 뒤에 섰던 이들의 희생은 오늘날 한국인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통해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도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이처럼 ‘보통선거’ 제도가 도입된 뒤로도 ‘독재권력’의 망령은 끊임없이 되살아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군부독재 시절 대통령 선거가 ‘간접 선거’ 방식으로 치러졌습니다.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 선거인단은 무장경찰이 둘러싼 실내 체육관에 모여 삼엄한 감시 하에 대통령 선거를 해야 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대통령에 대한 ‘직접 선거’ 제도를 쟁취하기까지 많은 이들이 또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처럼 현재의 우리는 선대의 희생과 노력 덕분에 민주주의라는 굉장한 기본 인프라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100% 만족스럽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끔 민주주의 후퇴를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날 많은 이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물리적 혁명은 불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투표를 통한 선거’혁명’으로 충분하게 된 것입니다. 더 많은 이들의 투표가 필요하고, 선거관리에 부정이 발생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감시하면 됩니다. 작년 말에 치러진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에서는 매우 흥미있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통합진보당 후보 이정희씨는, 지금 새누리당 후보나 민주당 후보가 내세우는 정책 공약은 모두 과거에 우리 진보정당에서 내걸었던 공약이 아니냐, 당시에는 두 정당 모두 너무 급진적이라며 반대하던 정책이 아니냐,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 후보나 민주당 후보 모두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지난 대선은, 정책 측면에서는 그동안 진보정당이 추구해온 가치가 승리한 선거라고 봅니다.
 
새누리당 후보가 공약으로 내건 육아수당 지급, 기초노령연금 지급 등의 보편적 복지정책(선택적 복지가 아닌), 반값 등록금 정책 등은 모두 예전에 진보정당이 주장하던 정책이고,
여당과 제 1 야당 모두 너무 급진적이라면 반대해오던 정책입니다.
 
지난 대선의 정치적 승패의 결과만 놓고 보자면, 정권 교체를 원했던 이들에게는 실망스런 결과겠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결국 국민들이 승리한 결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집권 여당은 과거 진보정당이 주장하던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새누리당 후보가 내건 정책 공약과 민주당 후보가 내건 정책 공약은 본질적으로 보면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민주주의의 후퇴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이 새누리당 후보에게 투표한 이유는, 집권여당이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추구하는 정책의 내용 역시 바꾸었고, 대선 후보가 자신은 지난 대통령과 다른 정책을 추구할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만약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새 정부가 대선 과정에서 내건 공약과는 달리, 과거로 회귀하는 움직임을 보인다면(대선 공약이 단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내건 거짓말이었다면),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봅니다.
 
4월이면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도 있고, 내년이면 지자체장 선거도 있으니, 정말 국민들의 뜻이 있다면, 선거’혁명’을 이룰 수 있는 기회는 언제든지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아무도 감히,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만이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시민’이고,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시민’이 아니다, 그들은 부동산을 소유한 ‘시민’들에게 빌붙어서 그들 덕에 먹고사는 기생적인 존재들일 뿐이다,
 
이렇게 주장하지는 못합니다. (혹시 마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극소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감히 입밖에 내어 주장하지는 못합니다) 바로 이 점이 180년 전과 지금이 다른 점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선대의 희생과 노력으로 민주주의 인프라를 갖춘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현재 상태에 다소 불만족스런 점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현재도 아랍의 민주주의가 시련을 겪고 있음에 비추어본다면, 현재의 우리가 굉장히 축복받은 환경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대의 노력에 감사하면서, 지금 현재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에 3보 후퇴가 있었다면, 앞으로 4보 전진을 이루어 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사람이 존중받는 나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 로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 어떤 정부가 들어선다고 해도, 우리나라의 헌법 제 1 조를 삭제하지 못하고, 보통선거 제도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선거혁명’을 이루기만 하면 됩니다. 투표율을 높이고 선거부정이 저질러지지 않도록 공정선거 감시 운동을 더 활발하게 벌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는 불과 30년전인 1980년대만 돌아보아도 얼마나 축복받은 환경인지 모릅니다.
 
이런 일 정도를 지금의 우리가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이는, 그동안 숱한 피와 눈물을 흘려온 선조들에게 부끄럽고, 앞으로 이 땅에서 천년 만년을 살아갈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 레 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과 대중문화

레 미제라블은 권력의 입장에서 매우 위험한 영화입니다. 이토록 젊은이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영화가 또 있을까요? 레 미제라블은 너무 위험한 영화이기 때문에 권력의 입장에서는 상영되지 못하도록 통제했어야 할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런 영화를 사전에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도 많이 다원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체제가 이와 같은 영화를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권력과 국민의 대결에서 승부는 이미 결정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대중문화 = 민중의 아편, 이라고 간단하게 등치시키던 시절도 있었습니다마르크스는 하부구조(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문화)를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그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대중문화가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민중의 인식능력을 마비시키는 아편으로 사용된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보면 대중문화 = 민중의 아편, 이라고 간단하게 등치시킬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분석이 틀린 것인가, 에 대해 생각해보면,

하부구조(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문화)를 결정한다는 기본 분석은 여전히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단 이제는 자본주의가 대중자본주의로 발전하면서 일반 대중이 대중문화를 왕성하게 소비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고(경제적 토대),

그에 따라 대중문화가 대중의 이익에 봉사하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물론 최근까지도 신문, 방송 등의 대중매체는 자본과 기득권 계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온 것이 사실입니다이는 대기업 등이 집중된 자본의 힘으로 광고 수요를 통해 대중매체에 대한 영향력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구조는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지난 글에서 썼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과 서민 계층이 투쟁을 통해 보통선거권을 획득하고, 이후 독재권력에 대한 투쟁을 통해 직접선거 제도까지 획득한 이후로는, 권력 입장에서 ‘선거’라는 절차를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 대중매체를 동원한 여론조작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대중매체를 동원하여 ‘피지배 집단’인 일반 대중을 상대로 때론 설득하고 때론 협박함으로써 일반 대중의 ‘자발적인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내어, 자신들의 지배체제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작업(헤게모니 장악)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 것입니다.
(헤게모니 개념에 대해서는 제가 아주 예전에 썼던 글, 매트릭스와 헤게모니, 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이후 2008년말까지 전 세계의 자본주의 체제 국가들에서, 절대 다수인 일반 대중의 이익을 희생시켜가면서 자본의 이익이 더욱 강화되고 기득권 계층이 더욱 많은 부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신자유주의 사조를 지적 무기로 활용하여, 대중매체를 통해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 역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탄생함으로써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제가 예전에 썼던 글, 나는 가수다를 보는 다른 관점, 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쌍방향 네트워크 매체(인터넷, SNS 등 포함)의 등장은 대중매체의 시대를 끝장내고 있습니다. 최근 종이신문에 실리는 광고들을 보면 비참한 지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이저 신문의 경우도 자양강장제, 보청기, 재수학원 등의 광고가 주를 이루는 형편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시장점유율이 부쩍 높아진 외제차 광고 정도가 거의 유일하게 폼(?)이 나는 광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메이저 신문들의 경우도 광고를 유치하는 데 매우 곤란을 겪고 있다는 사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메이저 신문사들이 무리하게 종합유선방송 사업권을 따냈지만, 그 결과는 모두 수천억원의 적자를 내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도 이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공중파 방송의 경우는 아직까지도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저는 이 역시 앞으로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하리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터넷 혁명은 지금 막 현재 진행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인터넷이 우리 인간 사회에 최종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 지 아직 우리는 채 다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해 대기업 자체도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신라호텔의 한복 파동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호텔 식당에서 한복을 입은 사람은 입장을 금지시키고, 일본의 기모노를 입은 사람은 입장을 허용했다는 사실이 SNS를 통해 급속히 퍼져나가면서 신라호텔을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하게 되자, 신라호텔 측은 서둘러 백배 사죄하고 사태를 진화하기 위해 부심해야 했습니다.

예전처럼 대중매체만 존재했다면, 신라호텔에서 언론사 기자들에게 ‘촌지’ 봉투만 돌리면 언론보도 자체를 통제할 수 있으므로, 한복을 입고 신라호텔 식당에 입장하려다 모욕을 당한 사람은 어디다 제대로 하소연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인터넷을 통해 조직화된 소비자들이 대기업을 상대로 불매운동을 벌임으로써 대기업을 굴복시킨 사례도 많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당한 대기업의 입장은 ‘당황’ 그 자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불과 수 년전만 해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변화들이 모두 이제 자본주의가 대중 자본주의로 진화하고 있는 징후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제 대기업 조차도 소비자인 대중에게 아부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이제 대중문화는 민중의 아편이 아니라, 오히려 민중들로 하여금 ‘매일 매일의 혁명’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레 미제라블’을 본 560만명이나 되는 관객,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본 무려 1,200만명이나 되는 관객, '도가니'를 본 466만명이나 되는 관객, ‘부러진 화살’을 본 346만명이나 되는 관객…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한국의 권력은 결코 이들을 가볍게 여길 수 없을 것입니다결국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는 잠시 후퇴하는 모습을 보일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진보의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다만 하늘의 시간 감각과 인간의 시간 감각은 좀 다를 수 있으므로, 인간에게는 불만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더 빠른가, 덜 빠른가, 더 순탄하게 가는가, 아직은 눈물이 더 필요한가의 차이일 뿐, 가게 될 방향은 분명하게 정해진 것이고, 권력과 국민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에서 그 승패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라고 봅니다

‘명박산성’이라고도 불리우던, 권력이 쌓은 바리케이드는 아주 막강해보였지만, 사실상 매우 애처로운 것이었다고 봅니다. 권력이 바리케이드를 쌓고 그 뒤에 숨어야 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감추려해도 ‘애처로운 것’이었다는 점을 감출 수 없습니다.
(나중에 역사는 이 시기를 돌아보면서, 권력이 민의를 거스르고자 마지막으로 저항했던 시기, 그러나 그 시도는 애처로워보였다, 고 기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장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듯한 모습이 나타날 때면 화가 나곤 하지만, 이는 하늘의 시간 감각과 인간의 시간 감각이 좀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여유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선거혁명을 이루어내기 위해, 다수를 논리적으로 설득해내는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논객 : 세일러 (idca****)
레미제라블 신드롬과 대한민국의 현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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