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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나라를 멸한 주나라도 단군조선의 제후국 (2부)

주나라를 세운 문왕은 서이족으로 단군조선의 신하

성훈 컬럼리스트 | 기사입력 2010/04/17 [11:57]

은나라를 멸한 주나라도 단군조선의 제후국 (2부)

주나라를 세운 문왕은 서이족으로 단군조선의 신하

성훈 컬럼리스트 | 입력 : 2010/04/17 [11:57]
본 글은 아래와 같은 시리즈의 제 (2부)입니다.
(1부) 섬서성 서안 서쪽까지 점령한 단군조선
(2부) 은나라를 멸한 주나라도 단군조선의 제후국 


단군조선에 의해 초토화되는 은나라 

은나라 27대 무을왕 때 단군조선은 은나라를 초토화시킨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23세 아흘단군 2년(B.C 1236년) 람국(藍國), 청구(靑邱), 구려(句麗)의 왕들이 회합하여 몽고리의 병력과 합쳐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고 엄(淹),서(徐),회(淮) 땅에 제후로 봉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회.대(淮岱)의 땅은 황하와 회수 상류 사이의 하남성을 의미하며, 중국에서는 엄(淹)을 강소성 상주시로 말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엄은 노나라와 관련 있으므로 하남성 어딘가로 보아야 할 것이며, 서(徐)는 안휘성과 하남성의 경계인 서주이며, 회(淮)는 회수 상류의 하남성/안휘성 일대로 보인다. 즉 회수 이북의 하남성과 안휘성 일대를 정벌한 것으로 보인다. 은나라는 단군조선에 의해 거의 멸망 직전이었다.

이러한 <단군세기>의 기록은 중국의 <후한서>에도 거의 같은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서강전> “은 왕실이 쇠미해지자 여러 동이가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殷室中衰諸夷皆叛)”
<동이전> “은나라 무을이 약해지고 낡아지자 동이가 점차 강성해져 마침내 회대 땅으로 나누어 옮겨와 점차 중토에 머무르게 되었다.(武乙衰弊 東夷寢盛 遂分遷淮岱 漸居中土)”
(후한서> “무을이 포악하니 견융이 변방을 침략하였다. (武乙暴虐 犬戎寇邊)”

또한 사마천은 <사기>에서 “은나라 27대 무을은 황음무도한 짓을 좋아해 천신(天神)을 모독하고 농락하는 것을 즐기며 무도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황하와 위수로 사냥을 나갔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시 사마천은 춘추필법의 대가답게 매우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천신은 단군조선이며 벼락에 맞아 죽은 것은 조선과 전쟁 중 전사한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회.대의 땅과 엄,서.회 땅은 황하 남부 하남성을 의미한다.  하남성 상구시 밑 안휘성의 북부가 사(徐) 땅이고, 회 땅은 회수 상류 주변이다.



은나라 30대 마지막 주왕 

은나라의 마지막 주왕은 하나라 걸왕과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는 ‘資辯捷疾 聞見甚敏(자변첩질 문견심민)’이라 표현했는데, 주왕은 자질과 말솜씨가 뛰어났으며 두뇌가 명석하여 모든 일을 보거나 듣고 그 진상을 꿰뚫어 보는 눈이 날카로웠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재능을 덕을 쌓는데 쓰지 않고 나쁜 쪽으로 쓴 것이 문제였다.

그는 주색에 대해서도 몹시 호탕하여 달기(妲己)라는 여인에게 흠뻑 빠져 결국은 나라를 망치게 된다. 어느 날 달기가 주왕에게 말한다. “대왕마마 환락의 극치가 어떤 것인지 한번 끝까지 보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시어 제왕으로서 후회 없는 삶을 누리소서.” 그러자 주왕은 달기를 위해 환락의 극치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마침내 주지육림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주지육림이란 글자 그대로 연못의 물을 퍼내고는 술을 가득 채우고, 안주로는 주위의 나뭇가지에 고기를 걸어놓았다. 그리고는 벌거벗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뒤엉켜 술과 안주를 마음껏 먹어가며 비명과 환성을 지르며 온갖 망측한 놀이를 즐기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주왕과 달기는 희열을 느꼈던 것이다. 
 
▲  중국에서 2004년 주지육림의 현장으로 발표한 연못. 황하 북부 하남성 은허 주변에 있다.


그리고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이 실시되었다. 포락의 형이란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그 아래 숯불을 피워놓고 구리 기둥 위로 죄인들을 걸어가게 하는 형벌이었다. 무사히 기둥을 건너는 자에게는 죄를 면해준다는 조건을 내걸었으나 모두 불구덩이 속으로 빠지고 만다. 죄수들이 불속에서 타 죽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달기는 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은 왕조의 충신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을 올렸으나 주왕은 묵살한다. 주왕의 작은아버지인 비간이 목숨을 걸고 사흘에 걸쳐 간언을 올리니 주왕은 “성인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비간의 심장에 일곱 개의 구멍이 있는지 보자”하며 비간의 심장을 갈갈이 찢어버렸다.

이밖에도 임신한 여자의 자궁을 갈라 그 속에 무엇이 있나 보려한 일도 있고, 기수(淇水)라는 강에서 어떤 노인이 강을 못 건너자 주왕이 이유를 물었다. “뼈 속에 골이 비어 다리가 시려 목 건너고 있습니다.”하자 노인의 종아리를 잘라 그 골이 어떤지를 봤다고 한다. 여기서의 기수는 황하 북부 하남성 동쪽 학벽시를 흐르는 강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왕의 포악함은 지나치게 과장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 이유는 주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려고 출전했을 때 백이.숙제가 주 무왕의 말고삐를 잡으며 간하는 말과 그 후의 행동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다가, 기자(箕子)까지 인륜을 저버린 주나라를 떠나 조선으로 정치 망명을 한 것을 보면 역사에 기록된 것은 과장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어찌하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것을....
근세조선 연산군도 중종반정에 의해 폐위되었을 때 역사 기록은 연산군의 악행만 과장한 면이 있지 않았던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은나라는 이미 이전에 단군조선에 의해 초토화되었고 유린되었기에 어차피 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은나라 멸망의 원인을 주왕의 방탕과 폭정 때문이라고 조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  포락지형을 당하고 있는 통돼지. 포락지형이란 사람을 이렇게 태워 죽인 형벌이다.


 
은나라의 왕족이었던 기자(箕子)

기자는 주왕의 작은 아버지였다. 기자는 주왕의 방탕과 포악함에 대해 여러 번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은 차라리 나라를 떠나라고 권하나 기자는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나라를 떠나버리면 신하로써 군주의 부끄러움을 천하에 알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는 일도 된다. 나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결국 기자가 선택한 길은 미친 사람의 옷차림을 하고 노예의 신분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은둔 생활을 하며 거문고를 뜯으며 슬픔을 달랬다. 후세 사람들은 이 가락을 기자조(箕子操)라고 불렀다. 은 주왕은 작은아버지인 기자를 옥에 가두어 버린다. 


주나라 문왕(서백 희창)은 동이족이다.

당시 은나라의 제후 중에 주(周)나라의 서백 희창(西伯 姬昌)이라고 있었는데 나중에 문왕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서백 창은 주왕의 포악함을 탄식하다가 숭후호(崇侯虎)에게 밀고당하여 옥에 갇히고 포락지형을 당할 처지가 되었다. 서백은 주왕에게 낙서(洛西)의 땅을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풀려나 주나라로 돌아온다. 

참고로 서백은 서쪽의 제후(佰)란 뜻이고, 서백의 성은 희(姬)이고 이름이 창(昌)이다. 그리고 낙서는 낙양을 흐르는 낙수(落水) 서쪽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명군으로 세상에 덕망이 높던 서백 창의 주나라는 당시 섬서성 서안 서쪽에 있는 기산(岐山)에 도읍을 두고 있었다. <사기>에 따르면, 그는 주나라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서쪽에 있는 견융(犬戎)과 밀수국(密須國)과 기국(耆國)을 정벌하고, 동쪽의 한(邗)과 숭국(崇國)을 정벌하고는 도읍을 풍읍(서안 부근)으로 옮겼다.

▲  섬서성 서안 서쪽 기산에 있는 주공(周公) 사당 


 
참고로 서백에게 정벌당한 숭국의 왕은 서백을 밀고한 숭후호였다. 여기서의 기국(耆國)은 바로 약 100여 년 전에 단군조선이 세운 여국(黎國)이다. 기국 = 여국이라는 것은 <사기 주본기 정의>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1부)에서 인용한 <단군세기>의 기록을 다시 한 번 인용하기로 한다.

(인용) “23대 색불루단군 B.C 1266년 람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니 은나라 땅과 가까웠다.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나라를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황제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끝)

그런데 필자는 이러한 사마천의 기록이 뭔가를 숨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서백창이 주나라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서쪽에 있는 견융(犬戎)과 밀수국(密須國)과 기국(耆國)을 정벌했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서백창은 바로 서이(西夷=西戎=犬夷=畎夷) 그 자체로 당시 서안 서쪽의 기산에 있던 단군조선의 신하 즉 동이족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기록의 근거로는 맹자가 “주나라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 필영에서 죽었는데, 그는 서이(西夷) 사람이었다.(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也)”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1부)에서 언급한 <사기>의 기록인 “(당시 빈 땅에) 고공단부(古公亶父)가 살고 있었는데, 훈육(熏育)과 융적(戎狄)이 공격해 와 그에게 재물과 땅을 요구한 뒤 땅과 백성들을 차지하려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융적에 맞서 싸우고자 하였으나 고공단부는 백성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 하고는 기산(岐山) 기슭으로 옮겨가자 백성들 역시 그를 따라 기산으로 모여들었다.”는 것은 사마천의 곡필이 아니가 한다. 
 
▲   기산은 섬서성 서쪽에 있다. 이곳까지 단군조선이 점령했었다.


즉 고공단부가 빈.기(섬서성 서안 서쪽)를 침범한 융적을 피해 기산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고공단부 자체가 융적 즉 서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격파하고 나라를 세운 것 역시 자체적인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대국이었던 단군조선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경>과 <사기>에서 주 무왕을 지원한 우방들이 참전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후한서>는 만이(蠻夷).융적(戎狄)이라 하여 역시 단군조선이 협조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중국고대신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사해(四海)의 네 해신(海神)과 하백(河伯), 그리고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이다. 수신 하백의 이름은 풍이(馮夷)이고, 우사의 이름은 영(詠)이며, 풍백의 이름은 이(姨)라 한다.”

여기서의 풍백과 우사는 배달국과 조선에 있던 관직이며, 나머지도 모두 동이족을 가르치는 말이다. 주 무왕 자신도 동이족이고, 그들을 도운 나라도 동이족이고, 게다가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은 바로 동이족인 강태공인 것이다. 따라서 주나라는 동이족의 나라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나 다름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실제 <단군세기>의 기록에도 주나라는 조선에게 공물을 바치고 조선과 전쟁한 기록이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  중국 역사지도책에 나와있는 주나라는 중국 대륙 전체이다. 그러나 맹자가 말했다. "하나라 뒤의 은나라 주나라가 강성할 때도 영토도 일천리를 넘지 않았다."  이게 일천 리를 넘지 않은 것인가? 분명한 역사왜곡이다.  


원본 기사 보기:hinews.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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