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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이란 무엇이며, 그 역사적 성립 배경은?

[이장희교수 기고] 북방한계선(NLL)의 역사적 의미와 해법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2/10/21 [04:44]

NLL이란 무엇이며, 그 역사적 성립 배경은?

[이장희교수 기고] 북방한계선(NLL)의 역사적 의미와 해법

서울의소리 | 입력 : 2012/10/21 [04:44]
1953년 7월 정전협정이래 57년간 이나 남북한의 무력충돌의 주요인은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ed Line:NLL)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볼때 NLL의 평화는 한반도 평화의 축소판이다. 북방한계선의 평화적 해결 없이는 현실적으로 한반도의 온전한 평화적 해결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NLL에 대한 진실이 냉전논리와 정치적 논리에 따라 감추어져 왔다. NLL에 대한 무지가 남한내의 소모적 이념적 갈등을 넘어 한반도의 평화를 항상 위협하고 깨뜨러왔다. 1999년 6월 15일 연평도에서 서해교전을 포함하여 최근 천안함 피폭 및 연평도 무력충돌은 모두가 NLL을 둘려싼 무지와 정치적 이념적 논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정문헌 'NLL 부정 못참아' 
노무현 전 대통령과-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비밀 대화록 의혹을 제기한 정문헌 의원이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민주당 정부의 영토주권 포기 등 진상규명 의원총회에서 NLL(북방한계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양지웅 기자


유엔군측과 공산측의 합의 무산이 NLL 논쟁의 발단

NLL의 해법제시를 위해서 핵심은 역시 NLL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그러면 이 NLL이란 무엇이며, 그 역사적 성립배경을 우선 간단히 일별한다.

▲ 이장희 교수
남북관계, 특히 남북 군사관계는 기본적으로 1953년 7월에 체결된 정전협정에 규정되어 있다. 여기에는 경계선 및 정전관리, 포로 교환, 정치회담 개최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정전체제를 규율하는 내용이 망라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정전협정에 서해 해상경계선획정이 합의되지 않으면서 서해 NLL을 둘러싼 논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따져 볼 때 이처럼 서해 해상경계선이 규정되지 않은 것은 휴전협상 당시 유엔군측과 공산측의 육상과 동해를 제외한 서해상의 군사분계선 협상에서 타협이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였다.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분계선 협상 당시 지상에서는 대체로 과거의 38선과 유사한 접촉선이 유지되었으나 해상과 공중에서는 유엔군측이 공산측을 크게 압도하여 원산과 정주 앞바다의 섬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해상경계선에 대한 협상 당시 공산측은 모든 군대가 상대방의 후방 및 연안도서, 해역으로부터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유엔군측이 이를 받아들여 북방 연안도서의 관할권을 포기하는 대신 과거 6.25 개전 이전부터 38선 이남에 있던 유인도인 서해 5도는 유엔군사령관이 관할하는 타협안에 합의하였다.

그런데, 1952년 1월말에 이루어진 이 합의 이후 서해 5도와 북한 해안지방의 해상관할 범위에 관한 후속 실무협상이 진행되었지만, 당시의 일반적 기준대로 3해리를 주장한 유엔군측과 12해리를 주장한 공산측과의 입장 차이로 말미암아 결렬되고 말았다. 이에 공산측은 합의가 어려워지자 해상관할 범위에 대한 규정을 정전협정에서 삭제하자고 요구했고 이에 쌍방 타협은 실패했다.

그리고 1953년 7월 정전협정체결 이후 당시 우세한 남한해군력을 동원한 리승만 박사의 북진공격을 두려워한 UNC는 남측해군력의 북진한계를 내부적으로 규제할 필요성에서 북방한계선(NLL:Northern Limited Line)을 그었다.

그래서 Clark UNC 총사령관은 1953년 8월 30일 일방적으로 NLL을 내부적 작전규칙의 일환으로 해군에만 전달하고 북측에 정식으로 통고하지 않았다. 즉 NLL은 무력충돌가능성의 방지를 위해, 한.미 해공군의 초계활동을 한정하는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보수적 인사들은 NLL월선을 아직도 정전협정위반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북측에 통고를 했다고 주장한다.

북한주장 해상군사분계선
ⓒ북한주장 해상군사분계선
 

NLL에 대한 국제법적 올바른 이해와 해결 방안

NLL 월선에서 분명한 것은 과거 냉전시대에 무조건 덮어두었던 NLL에 대한 국제법적 검토 없이는 이러한 서해 5도 사태의 근본적 해법을 생각해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NLL에 대한 국제법적 올바른 이해를 다음의 몇 가지 점을 지적해 두고자한다.

첫째, NLL에 대한 북측 주장에 대한 1차적 자료를 통한 객관적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 북측 입장 연구는 남측 정부, 군당국자 혹은 산하연구기관에서 제시된 연구물을 거의 재인용하고 있어서 객관성이 부족하다. 북측주장에 대해 제1차 자료(원본:로동신문,조선중앙년감, 김일성대학력사법학, 군사정정위회의록 등)를 통해 통시적으로 객관적 기술과 비교분석이 필요하다.

둘째, NLL에 대한 올바른 이해 부족(無知)이 서해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므로, NLL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홍보가 필요하다. 냉전 질서하에서는 NLL은 무조건 남측의 영해이고, 서해 해상경계선이라는 일방적 주장이 이성적 토론없이 우격다짐으로 한국사회의 정계, 학계, 언론계를 비롯하여 수용되어왔다.

따라서 NLL월선은 영해침해 -영해의 군사적 도발-군사적 대응으로 기계적으로 연결되었다. NLL의 영해선이라는 주장 외의 다른 평화적 해법이나 타협적 방법 모색은 금기시되는 사회적 냉전분위기로 일관되어왔다.

반면, NLL에 대한 다른 객관적 목소리는 이념적 색깔론으로 매도당하는 분위기가 압도하여 객관적 토론과 정책대안이 제시될 분위기가 조성될 수가 없었다. 1999년 6월 15일 서해 교전시 최초로 NLL에 대한 객관적 토론의 목소리가 학계와 언론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NLL 선포를 북측에 통보해주지 않았다는 사실, NLL월선은 정전협정위반과 무관하다는 주장이 1999년 6월 서해교전이후에야 우리사회에 보도되기 시작 했다.
 
이는 1998년 김대중 정부라는 민주적 정부의 등장과 미국체류 UN 군사정전위 수십년 근무한 이문항씨의 언론증언이 NLL의 실체적 진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 데 유익하였다. 동시에 해법으로 [남북공동어로수역]안이 민간학자들의 차원에서 제시되었다. 그러나 김대중하에서 조차도 정부차원은 매우 보수적이고 신중했다.

셋째, NLL문제는 남북쌍방간에 정치적 국민적 이쓔가 되었기에 남북 양측의 주장은 논리적, 이성적 해결(역사적 사실. 국제법적해결책)이 불가능하다. 쌍방 정부는 NLL문제를 체제문제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현실적 해법으로는 잠정적 해결방안이 최선이다.(남북공동어로수역)

1. NLL은 이미 남북양측의 정치적 이쓔가 되어 양측의 이성적, 논리적 법적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남북 쌍방은 이 문제에 대한 양보는 바로 정권진퇴와 연결되어 매우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2. 남북관계의 특수성, 잠정성, 2중성을 고려하여 평화통일시 까지 최종적 해결보다는 현실적인 잠정적 해결방안이 최선이라고 본다.

3. 평화통일시점까지 문제의 수역을 [남북공동어로수역]으로 선포하여 남북경협차원에서 공동개발하고 활용한다.

4. 2007년 10.4 정상선언 제3항에 합의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가 위의 [남북공동어로수역]을 점진적 구체적 실천화 방안으로 수렴되었다.

5. 2009년 1월 인천시-황해도간 지자체 교류협력사업 차원 및 서해안 개발차원에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실천을 고려 한 것은 좋은 대안으로 본다.

그러므로 한반도 평화통일시까지 잠정적 해결책으로 NLL을 남북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하고, 서해5도 해양평화공원, 평화의 섬, 평화수역화복합공원, 중국-강화도-서해5도를 잇는 해양경제벨트, 국제평화해역 조성으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축이 최선의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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