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 조선인 의사들은 어떻게 살아갔는가?"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의 자손에 대해 연좌제식으로 린치를 가하지는 않는다 해도, 역사적인 사실관계만큼은 분명히 해줄 수 있어야"
만주에서 찍은 김필순 의사의 가족사진(1878~1919) 일제 시대때 의사들은 어떻게 살아갔는가?
초기 서양 의학을 배운 조선인 의사들의 삶, 가장 대표적인 경우를 얘기하자면 이렇다. 제중원의 1회 졸업생. 대한민국 면허번호 1번 김필순 의사의 경우가 가장 유명하다. 김필순은 신민회 간부로 활동했다. 1910년 경술국치(한일강제합병), 망국이 되자 만주로 망명한다. 그리고 병원을 운영하며 번 돈으로 만주, 내몽골 일대에 한인 이상촌과 독립군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데 전재산을 바쳤다. 김필순 의사는 1919년 일제 공작원이 준 우유를 마시고 나서 갑작스레 낙마, 순국하셨다. (독살된 것으로 추정) 1997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백정 출신으로 의사가 된 박서양 의사의 경우도 유명하다. 신분적 차별을 극복하고 의사가 된 후, 박서양은 1917년 북간도로 건너가 구세병원과 숭신학교를 세웠다. 독립군 자녀들을 교육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로 임명되어 무장 독립군을 치료했다.
참고로 박서양 의사는 1936년 조국으로 돌아와 1940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08년 뒤늦게 건국포장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SBS드라마 '제중원'에서 박용우씨가 열연한 실제 모델이다.
SBS 드라마 '제중원'에서 박용우씨가 열연한 실제 모델 박서양 의사
이태준 의사도 빼놓을 수 없다. 몽골 울란바토르에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열어 몽골 국왕의 어의가 되었고, 몽골의 신의로 불렸다. 이 병원은 독립운동가의 비밀 휴식처이자 연락처였으며, 김원봉의 의열단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폭탄 제조 기술자를 연결해 주는 등 핵심 거점 역할을 한다.
이태준 의사 1911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2회 졸업사진 그 외에 1919년 3.1운동 당시 세브란스 의사, 의학생, 간호사들 은 독립선언서 배포 및 시위 조직의 핵심역할을 하기도 했다. 석호필 박사 등 선교사 의사들은 일제의 제암리 학살 사건 등 만행을 사진으로 찍어 해외에 고발했다. 이와 같이 민족을 위해 온 몸을 바쳐 항쟁한 애국 지사들인 의사들이 대단히 많이 계셨으나, 한편으로는 일제에 협력하고 친일 행위에 가담한 의사 놈들도 있었다. 경성 의전 등 관립 의학교 출신 혹은 기득권 의사들 중에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임전보국단같은 관제 친일 단체에 의기양양하게 이름을 올린 인물들도 많았다. 조선인 청년들에게, 성전에 참전하라는 징병 권유 글을 기고하는 등, 전쟁 협력행위에 가담한 의사들도 존재했다.
"묻혀있는 더 많은 매국노들의 행위..100년 후라 해도 이를 찾아내고 발표해야"
하영의 증조부인 안상호는 어땠을까? 친일 인명사전에 공식적으로 등재되지는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친일 단체 가담 및 적극적 일제 협력 행적이 확인된 의사였다. 여기서 '친일 행위'에 대해 잠깐만 얘기해 보려 한다. 한국이 일제에 강점된 기간이 35~40년간이었다. 사실 대단히 긴 기간이다. 처음 1920년대 정도까지는, 극심하게 반일, 독립 운동과 의기가 들끓었었던 게 사실이다. 그게 부자건 빈자건 양반이건 천민이건 도시건 농촌이건 상관 없이, 민족적 자긍심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30년대 정도가 되자, 이때부터는 식민지 이전의 상황을 아예 겪지 못한 세대가 등장하게 된다. 태어날 때부터 혹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라가 총독부 체제였던 세대. 이 세대는 이걸 "뉴노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젊은 세대가 예컨대 일본 관청에 취업을 했다거나 이런 것까지 친일 매국행위라고 볼 순 없다. 그러나 강점 초기부터 친일 행각을 벌여 온 자들이라면 굉장히 악질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건 핑계를 댈 바가 없다.
안상호는 1916년 친일 단체인 대정 실업친목회의 평의원 명단에 이름을 일찌감치 올린 인물이다. 그리고 3.1운동이 한 해 전, 총독부의 박해가 극심하던 1918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완전히 내지화된 의사 안상호씨의 가정"이라는 기사가 제개되었다. 여기서 안상호는 "나는 일본인과 똑같다. 집에선 한복도 입지 않고 매운 음식도 먹지 않는다. 조선말도 쓰지 않아 애들도 조선말을 모른다. 조선 사람과 교류도 않는다"라고 말해, 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 선전에 활용되었다.
이건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된다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런 사람들의 자손이 떵떵거리며 잘 산다면, 해외에서 힘들게 살다 돌아가신 김필순, 박서양같은 분 앞에 어떻게 고개를 들겠는가? 그 분들의 자손들은, 해외에서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며 전 가산을 독립운동에 털어놓은 후라 너무나 곤궁하게 살아가셨고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해외에서 병마에 고생하다 돌아가신 분들도 많다.
적어도 우리가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의 자손에 대해 연좌제식으로 린치를 가하지는 않는다 해도, 역사적인 사실관계만큼은 분명히 해줄 수 있어야 하겠다. 박서양 의사의 경우 자손들은 선친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입증할 문서조차 들고 있지 못했다. 오랫동안 잊혀진 독립운동가로 남아 있었으나, 학자들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만주에서의 군의관 및 교육활동 기록이 발굴돼, 2008년 비로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던 바 있다.
더 있을 것이다. 더 많은 헌신적인 애국자들의 삶이 땅 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더 많은 매국노들의 행위 역시 묻혀 있다. 이를 찾아내고 발표하는 일은, 100년 후라 해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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