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계엄령이 선포된 지역이 바로 여수와 순천지역이다. 제주에서 4.3항쟁이 터지자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조선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장병들이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출병 명령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수, 순천 지역을 점거하며 같은 조선인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이유로 출병 거부를 선언했으나 이를 빌미로 진압 과정 속에서 약 1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한때는 ‘여순 반란’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여수와 순천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며, 실제로는 여순 주민들은 진압군에 의해 무고한 학살을 당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 사건의 진압을 위해 10월 22일 대한민국 최초의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이 계엄령으로 인해 군대가 민간 사회를 통제하며 ‘부역자’로 의심되는 민간인을 즉결 처분하거나 군법회의에 회부했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것이다.
제주 4.3항쟁 때와 마찬가지로 여순에서도 미군이 개입을 했다. 우선 미군이 남한 봉기에 개입하게 된 배경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주한미군사령관이 갖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과 하지 간에 체결된 협정에 따라 군대의 작전권은 여전히 미군의 수중에 있었고, 9월 11일에 체결된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은 주한 미군정청이 보존하고 있는 재산, 물건, 현금, 예금, 설비 및 군수물자 등에 관한 모든 권리, 권한 및 이익을 양도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며, 이는 국군 창설에 필요한 모든 장비와 시설 및 군수물자와 지휘권이 미군 장악 하에 있었음을 의미했다.
한편 이 사건으로 박정희는 여순사건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사건 당시 남로당 군사 총책으로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박정희는 그가 가담한 대구 10월 항쟁과 더불어 남로당의 활동으로 인해 정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는 동료 남로당 군인을 밀고하며 풀려났다. 당시 연루된 남로당계군인들이 모두 처형당한 이유가 바로 박정희의 밀고 때문이었다. 한편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후 처음으로 실시된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순 지역을 비롯한 전남에서는 압도적으로 박정희가 몰표를 받아 당선되었다. 전남 지역에서는 박정희가 자신들의 무고함을 풀어주고 고인과 유족들을 달래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당선과 함께 온갖 민주 인사를 간첩으로 몰아 핍박하였으며 수많은 지식인들을 향해 빨갱이 사냥하듯 잡아들이며 탄압했다.
한편, 여순항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이틀 후인 1948년 10월 21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어서 계엄령 선포 자체가 법적 근거 없는 불법 계엄령이었던 셈이다. 계엄법은 1년 뒤인 1949년 11월 24일에야 제정되었다.
한편,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9일 여순항쟁 77주기를 맞아 “다시는 국가 폭력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대통령으로서 책임 의식을 갖고 이를 막기 위한 모든 조치를 다 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면서 “갈등과 상처를 극복하며,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굳건히 세워나가길 소망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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