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유신정권 말기 정권유지에 혈안이 되어있던 유신정권의 재야세력 탄압은 갈수록 수위를 높여갔다. 헌법보다 상위의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대학생과 지식인을 잡아들였고 간첩조작 사건을 통해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와 함께 유신정권은 북한과의 전쟁분위기를 연일 조장하기도 했다.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주한미군철수 발표와 함께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연일 떠들어대기도 했다. 한편,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미국으로 망명하여 연일 박정희의 패악질을 폭로하는 발언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그러한 시대적 상황하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1977년 11월 11일 21시 15분 전라북도 이리시 이리역에서 발생한 대형 열차폭발 사고였다. 59명이 사망하고 134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재민 1647세대 7800여 명이 발생한 초대형 사고였다. 당시 인천을 출발해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지금의 한화그룹)의 화물 열차가 정식 책임자도 없이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고성능 폭발물 40톤을 싣고 이리역에서 정차하던 중 폭발 사고를 냈다.
수사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호송원 신무일이 어둠을 밝히기 위해 밤에 열차 안에 켜 놓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 상자에 옮겨 붙은 것이 원인이었다. 이게 큰 사고로 발전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두말할 나위 없는 인재(人災)였다.
원래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 폭약과 뇌관은 함께 운송할 수 없으나 이 원칙이 무시되었다. 철도역 화차 배차 직원들이 기관사를 비롯한 같은 철도 직원들에게 '급행료'라는 명목으로 뇌물을 받고자 화물열차를 역 구내에 40시간 동안 강제로 대기시켰다. 당시 철도법상 화약류 등 위험물은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야 하며 지금도 위험물 운송차량은 대통령 전용열차 다음으로 우선순위가 높다.
이렇게 대기시간이 기약 없이 길어지자 화가 난 호송원은 술을 마시고 열차 화물칸에 들어갔다. 화약을 실은 화차 내부에는 호송원조차 탑승할 수 없고 호송원은 총포 화약류 취급 면허가 있어야 하며 흡연자, 과다 음주자를 쓸 수 없는데 이런 규칙 역시 모두 무시되었다. 호송원 신씨는 화차 내에 화기를 들일 수 없는 규칙을 무시하고 그 안에서 촛불을 켜고 잠이 들었다. 불이 옮겨 붙은 상황에 잠에서 깨어난 호송원이 침낭으로 불을 꺼 보려 했으나 불은 오히려 더 크게 번졌다. 위험물을 운반하는 열차에 소화기처럼 유사시 사용할 제대로 된 소화기구가 없었다. 화약 열차에 불이 붙었음을 알고 철도 요원들은 모두 도망쳐버렸고, 검수원 7명이 불을 끄기 위해 화차로 달려가 모래와 물을 끼얹었으나 폭발을 막지 못했다.
역 주변은 큼지막한 건물조차 형체만 남아있는 정도로 대파되었다. 역에서 근무하던 철도 공무원 16명을 포함하여 59명이 사망하였고 1343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이재민 1647세대 7800여 명이 발생하였다. 이는 그때까지 발생한 폭발사고 중 피해 규모로는 최대였다. 사건 이전에 이리역 주변은 창인동으로 불렸는데 판자촌과 홍등가가 난립했으며 이리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들에게 창인동을 물어보면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하지만 폭발이 사람도 건물도 모조리 휩쓸어 버려 역 주변이 이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대규모 폭발이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해당지역 사람들은 북한군의 공습인 줄 알고 서울에 사는 친지들의 안부를 걱정했다. 당시 이리에 주재하던 어느 기자는 서울 본사에 연락을 넣어 "이리는 쑥밭이다! 서울은 무사하냐?"고 외쳤고 이리 주민들 중에도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들에게 전화해서 "거기도 폭격 맞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속출했다.
당시 익산군과 이리시로 분할되어 있었던 두 도시는 짐승의 종류 ‘이리’라는 이름의 부정적 뉘앙스와 폭발사고 등으로 짙게 배어있는 이리시의 이미지를 버리고 익산시로 통합하였다. 당시 반공교육이나 교과서 등에 북한을 동물 ‘이리’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폭발사고의 여파로 익산시가 출범한 것이다.
11월 11일을 제과회사의 마케팅에 속아 막대과자를 사먹는 날 쯤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당시 빼빼로는 심형래의 광고로 출시하자마자 큰 인기를 누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매출 하락을 면치 못했다. 따라서 남은 물량을 모두 소진시키고 해당 제품을 단종시키려는 생각으로 급하게 만든 마케팅 방식이었는데, 이 방식이 대 히트를 치면서 아직도 11월 11일을 기념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가래떡데이 또는 농민의 날로 부르자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이제 11월 11일, 당시 이리역 폭발사고에서 숨진 희생자를 추모하는 작은 시간이라도 갖는 것은 어떤지 제안해 본다.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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