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있어 스르르 눈을 떠보니 살짝 열어둔 창문 사이로 능수버들 나뭇잎이 바람에 떨어지고 있었다. 여름내 푸르던 나뭇잎들이 어느새 갈색으로 말라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이 아, 가을인가 했더니 문득 달력을 보자 10월 29일 새벽이었다. 그렇다면 내 꿈결을 밟고 들려오던 그 소리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였을까. 아니다, 얼굴을 알 수 없는 어떤 청년이, 어여쁜 아가씨가 이 밤 무명작가의 방을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각자의 일기장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각자의 일기장
그 푸르던 나뭇잎도 어느새 지네요. 그래도 저 나무는 푸름을 마음껏 누리다가 지지만 다시 봄이 오면 푸른 잎으로 태어나겠지요. 꽃들은 참 좋겠어요. 져도 다시 필 수 있으니. 하지만 전 다시는 엄마 손을 잡을 수가 없어요. 다시는 가족과 밥상에 둘러앉아 된장찌개 먹다가 숟가락이 부딪쳐도 웃을 수 없어요. 엄마의 좁은 어깨에 기대 울 수도 없어요. 아빠의 인자한 미소도 볼 수 없어요. 귀여운 동생의 재롱도 더 이상 볼 수 없어요. 나를 보면 꼬리를 살랑이며 녹찻잎 같은 혀를 내밀어 키스해 주던 반려견도 더 이상 만질 수 없어요. 익숙한 거리의 포장마차, 장사가 잘 안돼 걱정이다던 식당 주인도 볼 수 없고, 지나온 생보다 가벼운 폐지를 주워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던 할머니도 볼 수 없어요. 하지만 여전히 가로수는 그대로 서 있고, 내가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엔 낯익은 번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하늘을 향해 물구나무 선 건물들은 여전하네요. 죽음이란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어요.
축제의 밤 친구를 만나 커피 마시고 밥을 먹고 세상이 모두 우리 것 같았지요. 비록 가진 것 없어도, 비록 누린 것 없어도 그렇게 마음은 부자였는데, 어인 광풍에 피지도 못하고 산산이 부서지고 으깨져 거리에 떨어져 있구나. 그 꽃잎 피어보지도 못하고 밟히고 짓눌려 마지막으로 엄마 부르며 하늘로 갔구나. 마스크 속 다문 입술들이 하얀 국화꽃 한 송이 들고 길게 줄을 서 있구나.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가는 좁은 골목 가파른 언덕길에 하얀 국화꽃만 쌓여 있네. 못 다 한 말, 하고 싶은 말 작은 손 편지로 써서 보내니 잠시 내려와 읽어보려무나. 계절이 네 번 바뀌었지만 떠나지 않은 네 얼굴, 간혹 들려오는 웃음소리, 대문을 나서면 저만큼 네가 서 있을 것 같은데, 하늘에 별들만 내리는구나.
날마다 같은 번호 버스를 탄 저 눈매 선한 사람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넘어지지 않으려 손잡이 잡고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픈데 손잡이가 살짝 다가와 말하네. 나도 아프다, 나도 아프다. 긴긴 노동의 시간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오, 우리들의 부모님이 다가와 말하네. 나도 아프다, 나도 아프다.
내 창가엔 더 이상 햇살이 비추지 않고 하루종일 비만 내려요. 눈물 방울방울 맺혀 흐르다 얼룩이 되어 세상이 다 흐려져요. 향기 잃은 마른 꽃잎들, 무심하게 지나간 불빛들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대 없는 하루하루가 이토록 적막할지 진정 곁에 있을 땐 몰랐어요. 못 다한 말 아직 많은데 그대는 어느 하늘 아래서 별이 되어 반짝이나요. 꿈이라도 좋으니 잠시 다녀가면 안 되나요
강물에 어린 가을 햇살이 저리도 곱게 빛나는데 나에겐 온통 흑백의 시간, 마치 캄캄한 동굴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아요. 곁에 있을 땐 몰랐던 그대 숨결 그리운데, 아, 사랑은 떠난 뒤에 후회하는 바보인가 봐요. 화려한 도시의 불빛도 나에겐 온통 흑백의 시간일 뿐이에요.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엔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다 문득 그대 떠올려 봐요. 가슴에 쌓인 먼지들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듯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따뜻한 커피 한 잔에 기억의 저쪽을 담아 천천히 마셔 보아요. 사랑했던 그대, 어느 하늘 아래서 나처럼 그 시절 생각하나요. 빗물에 더 푸르러진 저 감나무 잎들처럼 우리 사랑 맑았는데 무슨 이유로 떠나가 날마다 가슴 속에서 비를 내리게 하나요.
세상에 예쁜 꽃 많고 많지만 우리 아이가 그린 꽃처럼 예쁜 꽃은 아마 없을 거야. 엄마가 일터로 나간 시간에 하얀 종이로 만든 꽃처럼 슬픈 꽃은 아마 없을 거야. 아이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파랑 노랑 빨강 꽃잎들이 방안에 널브러져 있네. 엄마를 기다리다 잠이 든 아이의 손에 코스모스가 꿈처럼 꼭 쥐어져 있었네. 아이가 그려놓은 그리움을 한잎 두잎 정리하다가 비로소 알게 되었네.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잠든 아이들이 바로 바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시월의 할머니는 오늘도 마룻바닥에 앉아 어두운 눈으로 아들이 입을 옷을 뜨개질 하다가 마루로 나가 거기 올망졸망 새겨진 등고선 무늬를 잠시 헤아린다. 그러다가 섬돌에 놓인 고무신을 신고 마당으로 나서는 것이니 노인당 한글교실에서 배운 기역자처럼 꺾인 길을 돌아 이제는 마을회관이 되어버린 옛날의 밭을 지나 한참 가니 저만큼 부두가 보였으나 오늘도 손자는 오지 않았다. 날마다 설날인 시월의 할머니는 서쪽 하늘에 물든 저녁노을을 바라보다가 다시 집으로 간다. 가불하여 쓴 그리움의 잔고가 바닥이 나는 날, 앞산에 작은 봉분 하나가 생기고 비석도 없는 한 생애가 고요히 엎드려 있었다. 날마다 설날이었던 시월의 할머니는 손자를 안아보기 위해 하늘로 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은 태풍이 지나간 후 떠오른 저녁노을처럼 곱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은 서로 계산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아도 좋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은 모두 주고도 더 깊어진 저 가을 숲 같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은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모든 것 다 가진 듯 세상에서 제일 부자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은 먹구름 지나간 후 떠오른 아침 햇살처럼 빛나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은 서로 미워하지 않고 마음과 마음으로 알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은 모두 떠나도 더 깊어진 저 가을 강 같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은 이룬 것 하나 없어도 모든 것 다 이룬 듯 세상에서 제일 부자지.
강이 굽어서 흐르니 길도 굽어서 흐른다. 그 길 따라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남은 길이 더 짧다. 저 휘어진 시간 끝엔 어떤 생이 기다릴까. 길이 굽어서 흐르니 강도 굽어서 흐른다. 그 길 따라 걷다가 문득 앞을 바라보니 걸어온 길이 더 길다. 저 휘어진 시간 끝엔 어떤 생이 기다릴까. 중천에 뜬 해도 어느덧 서쪽으로 기울어 가고 누군간 쓸쓸한 뒷모습 남기고 저 휘어진 시간 속으로 아득히 걸어간다. 충만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말없이 혼자서 걸어간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어느 날이었어,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어 교문 앞에서 서성거리는데, 아빠가 저만큼에서 우산을 들고 걸어오셨어, 엄마는 아파 병원에 있어 아빠가 대신 오신 거야. 아빠와 난 나란히 집을 향해 걸어갔지. 그땐 몰랐는데 집에 와서 보니 아빠 등이 비에 흠뻑 젖어있었어. 우산을 나에게만 기울이고 당신은 그 비를 혼자 다 맞고도 웃는 거야. 나만 우산 속에서 비를 맞지 않고 그저 좋아 했는데 나중에 아빠가 네 가방 속의 꿈이 젖지 않게 그랬을 뿐이라고, 웃는 거야. 가방 속 국어책 사회책 그리고 갈짓자로 쓴 내 공책 속에는 병원에 있는 엄마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그려져 있었어. 아빠가 내 공책을 본 후에 두 눈을 창밖으로 돌렸는데 그땐 난 그 의미를 몰랐어. 흠뻑 젖은 아빠 등만 보였어. 나 이제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고 비가 오는 날이면 그날을 생각하며 웃는데, 아빠가 보이지 않아.
새벽 꿈길을 밟고서 어머니가 오셨네. 쌀 한 말 등에 지고 그 먼 길을 오셨네. 인자한 눈매 여전한데 그 먼 길을 마다않고 못 미더운 자식 걱정에 전화도 없이 오셨네. 쌀 한 말보다 가벼운 맑은 가난 등에 지고 못난 자식 굶을세라 기별도 없이 오셨네. 이제라도 다시 본다면 어머니 귓전에 대고 고마워요, 말하고 싶어. 사랑해요, 말하고 싶어.
막다른 골목길 반지하방 유리창에 휘어진 시간들이 드리워져 있다. 까르르 웃는 아기의 배냇저고리와 아빠의 늘어진 바지가 재미있다. 아내의 스타킹과 남편의 양말이 세탁기 속에서 한바탕 뒹굴다 빨랫줄에 머문 햇살에 화해한다. 부부에겐 내년에 탈 적금이 있다. 택시를 세워두고 손님을 기다리는 늙은 기사의 주름이 사차선이다. 그 옆 부동산 가게 유리창에 붙은 월세 전세 딱지가 단풍 같다. 골목길 가로등이 술 한 잔 하고 비스듬히 누워 깜박거린다. 그 밑 무성한 잡초에 뒹구는 퍼런 소주병들이 왠지 무섭다. 순경이 취객에게 통사정을 하고 애인이 배신했다고 114에 신고한 여자는 남편이 소방서에 다닌다. 그리하여 도시는 오늘도 무사하다.
너희들은 끝내 패배하리라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지은 노랫말이 어느새 4500편이 넘었네요. 공감과 연대가 세상을 살립니다. 모두 나서 무너져 가는 대한민국을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이룬 대한민국인데 사나운 멧돼지 한 마리가 우리가 일구어낸 감자밭을 다 갈아엎고 있습니다. 그런 멧돼지는 죽창으로 쫓아내보내야지요. 이땅의 모든 양심 세력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는 심정으로 나서야 할 때입니다. 조국 강토가 후쿠시마 핵폐수로 물들기 전에, 독도에 일본기가 꽂히기 전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외쳐봅시다. “이 모든 일기장에 핏물을 부은 너희들은 끝내 패배하리라.”하고 말입니다.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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