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국회 정무위에서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백선엽 장군의 ‘친일파’ 규정을 부인하면서 흥남시청 농업계장이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친을 거론했다. 박민식 장관은 “(일제 강점기 당시) 흥남시 농업계장은 친일파가 아니고, 백선엽 만주군관학교 소위는 친일파냐. 어떤 근거로 한쪽은 친일파가 되어야 하고, 한쪽은 친일파가 안 되어야 하냐”고 주장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쪽은 “흥남시청 농업계장을 한 것은 해방 후의 일”이라며 박 장관을 고발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예의보다는 친일행적이 뚜렷한 사람의 명에를 지키는 일이 더 소중한 가치인가 보다. 백선엽의 차고 넘치는 친일 증거를 애써 외면해가며 오직 백선엽이라는 구시대적 반공 인물 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이에 백선엽이 친일파라는 법적 사회적 증거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백선엽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현 남포시) 덕흥리[1]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양사범학교에 진학하여 1939년 3월 졸업한 뒤 교직에 종사했다. 군인이 되고 싶었던 백선엽은 1941년 12월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 9기 군관 후보생으로 입교하여 1942년 보병 제28단에서 견습 사관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자무쓰 부대에서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하다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배치되어 광복 이전까지 소속되었다.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1938년부터 당시 만주 지역에서 활약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김일성, 강건, 김광협, 최용건 등이 가담한 동북항일연군 및 팔로군 소속 게릴라 부대를 주로 상대하며 여러 차례의 잔혹한 토벌 작전을 벌여 악명이 자자했던 부대였다. 백선엽의 간도특설대 경력을 아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으나 본인이 이를 구체적으로 시인한 것은 1983년 일본에서 출간된 ‘대게릴라전 ― 미국은 왜 졌는가’에서 였다. 이 책 초반부의 한 장(章)인 「間島特設隊の秘密(간도특설대의 비밀)」 본문에서 백선엽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주의주장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특설대에서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지고 토벌에 임하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란 법률상으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국가ㆍ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협력하던 자들을 말한다. 친일반민족행위자는 단어가 길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짧게 '친일파'로 불린다. 하지만 원래 친일파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라는 뜻을 가진 용어로 쓰였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일본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매국노 정도의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인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해 '친일파'가 아니라 '친일 반역자', '부일(附日, 일본에 빌붙음) 협력자' 등이라고 칭해야 된다는 의견도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일본 제국에 동조했었기 때문에 '친 '일제' 파'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못 다한 과거청산만큼이나 한국 안팎에서 친일파라는 용어의 애매함 자체가 문제가 되는데, 친일파는 단순히 일본에 우호적인 사람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노무현 대통령시절인 2005년 대통령직속으로 발족하였으며,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11월까지 활동한 정부기관이었다. 이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정의) 는 친일반민족 행위자의 정의에 대해 구체적인 친일행위를 나열하고 있는데, 친일군인과 관련된 부분은 몇 개의 조항으로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또한 법에서는 그 시기에 대해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라고 명시하고 있다.
첫째는,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부대를 공격하거나 공격을 명령한 행위를 말하고 있다. 즉, 독립군이나 광복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던 인물들인 셈이다. 둘째,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단체 또는 개인을 강제해산시키거나 감금·폭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 단체 또는 개인의 활동을 방해한 행위를 포함시키고 있다. 민간인 신분으로 독립운동하던 개인이나 단체를 무차별 학살했던 자들일 것이다. 셋째,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하거나 이를 지시 또는 명령한 행위 를 말하고 있다. 일제 경찰이나 일제군인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네째는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를 말한다. 백선엽은 당시 소위로 임관하여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위 기준에 모두 포함되어 백선엽은 친일군인 27명중 한명으로 명시되어 있다.
친일파에 대한 사회적 증거와 그 자료로 친일인명사전을 들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대한민국의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 행각에 관한 인명사전으로 2009년 11월 8일 공개되었으며, 총 3권으로 이루어져있다. 민문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선정한 구한말 이래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친일 인물들의 구체적인 반민족행위와 해방 이후 주요행적 등이 기록되었다. 총 4,776여 명이 수록되었다.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2001년부터였다.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재야사학자 임종국의 뜻을 이어 1991년에 설립된 민족문제연구소는 이후 10년간 사전 발간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을 해왔고, 마침내 2001년 120여 명의 학자들로 구성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를 발족하면서 본격적인 사전 제작에 착수했다. 8년에 걸친 제작기간 동안 친일인명사전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2004년에는 여야의 정치 투쟁 도구로 이용되는 바람에 대한민국 국회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예산을 전액 삭감한 적도 있었다. 이를 알고 분노한 시민들이 국회 예산보다 더 많은 성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다.
백선엽은 또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기도 하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백선엽이 387명의 친일군인 중 한명으로 등재되어 있다. 친일인명사전의 친일군인의 기준은 위관급 이상 장교와 오장급 이상 헌병으로 재직한 자와 친일행위가 뚜렷한 일반 군인까지 포함되어 있다.
대한민국 군대의 뿌리는 간도특설대가 아닌 독립군이어야 하며, 대한민국의 전쟁영웅은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이어야 한다. 물론, 대한민국 육사의 뿌리도 만주군관학교에서 찾아서는 안 되며 신흥무관학교를 대한민국 육사의 근간이라고 봐야 한다. 그것이 독립국가의 정통성을 지키는 일이며, 헌법에 명시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일이기도 하다. 백선엽 같은 친일매국노가 국군의 아버지가 되고 전쟁영웅이 되며, 육사에 흉상이 세워지는 것은 우리 군의 명예를 더럽힘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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