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26일은 안의사의 서거 113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한편, 작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영화 ‘영웅’이 개봉되어 2백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백범 김구선생은 이 나라가 해방되면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을 가장 먼저 처단할 인물 1호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이토오 히로부미는 지금도 일본 근대화의 은인으로 칭송받는 자입니다.
메이지 유신을 완성했고 제국주의 일본의 헌법을 만들었으며 일본의 초대 내각 총리를 포함해 총리 생활만 4회에 걸쳐 10년 가까이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토오를 저격하였으니 당시 일본인들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안의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 안문생[안분도]는 7살에 일본인이 준 과자를 먹고 어린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으며, 둘째 아들 안준생은 이토오를 저격한 아버지 때문에 어렵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일본의 감시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도 받을 수 없었고 취업의 길도 막혀있었지요. 그런 안준생에게 미나미 총독이 다가옵니다. 미나미 총독은 그를 찾아와 이토오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사찰 박문사에서 위령제가 열리는데, 그 자리에서 이토오 히로부미의 차남 이토 분키치에게 사과하면 삶과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제의를 합니다.
결국 1939년 10월 16일, 박문사에서 사죄와 함께 일제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하면서 '제 부친께서 어리석은 생각으로 당신의 아버님을 죽게 만들었는데 이에 아들로서 아버지의 오만방자한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퍼포먼스를 펼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 대서 특필됩니다. 이런 행위도 모자라 안준생은 일본 전역을 돌며 아버지 안중근의 이토오 저격을 사과한다는 연설을 하기도 합니다. 이후, 일제는 안준생 가족의 부귀영화를 지원합니다
안준생은 이로 인해 아버지는 물론 아버지의 훌륭한 업적을 반겼던 조선인들으로부터 천하의 불효 자식, 친일 매국노,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한 더러운 개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백범은 당시 중국에 살고 있는 안준생의 처벌을 중국 측에 요청했으나 중국 측이 이를 묵살하게 됩니다. 그는 한국 전쟁 중에 폐결핵으로 사망합니다.
“아버지는 민족에게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겐 재앙이었다. 나는 민족에게 배신자일 지언정 우리가족에겐 영웅이다” 온갖 비난에 시달리던 안준생이 변명처럼 남긴 말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목숨을 바쳐가며 싸웠던 선조들의 독립 정신을 기리는 뜻깊은 3월입니다. 정신나간 목사의 3.1절 일장기 게양 사건도 분노할 일인데, 3월에 윤석열은 한일정상회담을 통해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갖다 바치는 만행을 보이며, 민족의 얼을 망가트리고 있습니다. 안준생과 윤석열의 매국노적인 친일 행보를 보면서 안중근 의사가 지하에서 통곡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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