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로고

'이름 없던 여인 해방되던 날'..독립투사의 딸 이정순열사기념비 제막식 열려

'불꽃이 되어 다시 태어난 카타리나 이정순열사 기념비로 남다'

백선혜 기자 | 기사입력 2022/06/27 [11:08]

'이름 없던 여인 해방되던 날'..독립투사의 딸 이정순열사기념비 제막식 열려

'불꽃이 되어 다시 태어난 카타리나 이정순열사 기념비로 남다'

백선혜 기자 | 입력 : 2022/06/27 [11:08]

[서울의소리=백선혜 기자] 1991년 5월 18일 오전 11시 30분 강경대 열사의 노제가 경찰에 의해 저지당하던 중 연세대 정문 앞 철교 위에서는 4남매의 어머니이자 이름 없는 노동자였던 한 여인이 불꽃처럼 떨어 졌다. 그녀의 나이 39살이었다.

 

▲ 지난 25일 열린 이정순 열사 기념비 제막식   © 백선혜 기자

 

31년 후인 2022년 6월 25일 오후 4시 마침내 이정순씨는 불꽃이 되어 투신한 그 자리에는 그녀의 시가 적힌 추모비가 세워지는 제막식이 있었다. 그녀의 죽음과 뜻을 기리는 이 제작식은 대한민국 군부독재에 항거한 1991년의 민주투사들의 죽음을 재조명시키며 역사의 자리에 남겨지게 되었다.

 

이정순열사가 살아있었으면 만 70세가 되는 해이다. 그녀가 남기고 떠난 4남매 중 장녀인 공문정(41세)씨는 어머니가 투신한 것보다 많은 나이가 되어서야 마침내 그녀의 소원대로 어머니의 이름이 세상에 부활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날의 제막식을 위해서는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와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91년열사투쟁30주년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함께 뜻을 모아 거행되었다. 추모비의 위치는 연세대학교 앞 철길(정문을 마주 보고 오른쪽 인도 방향)에 위치한다. 

 

생전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그녀를 위해 카타리나 이정순열사라는 이름으로 세례명이 함께 새겨졌으며 추모비에는 그녀가 남긴 3권의 노트 중에서 유족이 발췌한 시도 함께 새겨졌다. 그녀의 양심있는 지성인의 면모가 드러나게 190cm 높이로 건립되었다.

 

추모비에는 전라남도 순천에서 독립운동가 아버지와 여순항쟁 피해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1952년) 독실한 가톨릭 신앙생활과 독학으로 틈틈이 시와 글로 한반도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염원했던 고인의 삶이 적혀있다.

 

고인의 시 ‘내 한 몸 바쳐지리라’ 는 민중가수 이광석씨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졌고 기념식에서 최초로 공개되며 이광석씨의 맑고 고운 목소리로 세상에 불려지게 되었다. (유투브로 감상 https://youtu.be/ruJSFJs1J2o )

 

이 추모비의 제작을 맡은 오종선조각가는 "바람 불어도 다시는 꺼지지 않을 불꽃을 형상한 빨간 무늬를 넣었다. 지나가는 연세대생들이 이정순 열사를 기억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앞서 김종태열사 42주기 기념식에서도 ‘오월걸상’ 제작을 맡아 같은 불꽃 형상을 넣어 오월걸상을 제작한 바 있다.

 

지난 9일 이화여대 앞 대현문화공원에 김종태 열사 42주기를 맞아 '오월걸상' 제막을 도운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은 6월 말까지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 이정순 열사 추모비 건립까지 마무리하게 되어 뜻깊게 생각한다며, "열사들의 죽음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한 것과 너무나 비슷하다.“ 기념식에 내빈으로 참석하여 직접 소회를 밝혔다.

 

제막식이 거행되는 동안 운집한 50여명의 사람들은 거룩한 침묵 속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미사를 참여하며 고인의 뜻을 기렸고 이날 미사를 위해 함세웅신부님과 이기우신부님이 참석하였다.

 

이기우 신부와 함세웅 신부가 집전한 가톨릭 추모미사에서 교인들은 "이정순 카타리나 열사는 '통일할 나라 대한민국, 축복의 나라 통일의 나라 대한민국'을 꿈꾸며 기도했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며 그 꿈을 온몸으로 우리에게 전했다. 사실 그 꿈은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했지만 열사로 인해 더욱 절절하게 와닿는 꿈이 되었다" 고 고인을 추모했다.

 

이정순열사의 동생 이옥자씨는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언니에게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내 몸을 초개와 같이 던져야 한다', '나라가 없으면 가족도 없다', '미국과 일본은 한편이다. 믿어선 안 된다, '양식이 없어도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한다' 며 독립군으로 키웠다"고 회상했다.

 

어려서부터 예쁘고 똑똑했던 언니는 무술까지 잘해 죽음을 건 투쟁을 결행하기 전 명지대생 강경대와 전남대생 박승희의 죽음을 접하고는 가톨릭 교리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수많은 열사들은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이니 자살로 보아서는 안된다." 고 말하며 언니가 신앙인으로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임을 회고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무 놀라지 말라"고 했던 언니의 말을 떠올리는 이옥자씨의 얼굴에는 이정순 열사의 죽음 이후 '이혼녀', '정신병자'라며 모욕한 언론과 지식인들에 대해 울분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타났다.

 

1991년 당시는 ‘백골단'으로 불리던 사복경찰들에 의해 명지대생 강경대가 폭행으로 사망 당한 사건이 발생하여 1991년 4월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투쟁이 이어지던 때였다. 

 

'공안 통치 종식, 노태우 퇴진, 백골단 해체'를 외친 그녀의 항거에 대해 언론은  '4남매의 자녀를 둔 30대 여인의 죽음'으로 제목을 달아 보도했고, 당시 노태우 정부는 이혼과 정신병력 운운하며 의로운 주검에 난도질을 가하며 고인을 많은 투사들을 욕보였다.

 

강경대 열사의 부친 강민조씨는 "경대의 장례 행렬이 지나가던 그날 철길 위에서 불이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름도 모르는 30대 주부가 자식들을 놔두고 갔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이후 지금까지 경대의 추모제 때마다 이정순 열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고 말했다.

 

강민조씨는 아들 강경대씨의 죽음 이후 잘되던 사업을 접고 아들의 명예를 위해 투사가 되어 정부와 싸워왔다. 특히 1991년 자신의 목숨을 바쳐 대한민국의 군부독재 타도를 외친 많은 열사들의 유족들과 유대를 이어올 뿐 아니라 이정순열사의 남겨진 자녀들을 위해서는 집을 사 주어 남은 네 자녀가 올곧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왔다고도 했다.

 

1991년 5월 18일 당시 강경대 열사 노제에 참석했던 연세대 앞에서 가톨릭 신자로서 부름을 받아 이정순 열사의 빈소를 지키며 장례 일정을 함께 했던 윤순녀 새세상을여는천주교여성공동체 회장은 이날 추모비 제막식에 대해  "이름 없는 여인 이정순 카타리나가 오늘 해방되는 날이다"라고 감회를 밝혔다.

 

사랑을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39살의 카타리나 이정순열사의 추모비는 모두의 가슴에 같은 시대의 소명을 남기며 이렇게 탄생 되었다.  2022년 6월 25일 6.25전쟁 72주년에 1991년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에 의해 그녀의 추모비가 남겨지게 되었다.

  • 도배방지 이미지

이정순, 독립투사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