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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 처단에 나선 조선청년을 아십니까?

김종성 애국지사와 그 가족들

조호진 기자 | 기사입력 2010/02/17 [17:29]

"히로히토" 처단에 나선 조선청년을 아십니까?

김종성 애국지사와 그 가족들

조호진 기자 | 입력 : 2010/02/17 [17:29]
 
  
히로히토 처단에 나섰던 김종성 애국지사에 관련된 1929년 6월 21일자 <조선일보> 기사
ⓒ 조호진
히로히토


지난 사일 天皇陛下(천황폐하)께옵서 大阪行幸(대판행행-오사카에 행차) 하옵섯던 중에 길가에서 거동이 수상한 남자를 발견하고 체포 취조 중인데 그는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신정리 김종성으로 품에 한자 이상이나 되는 단도를 품고 잇서 御鹵簿(어노부-천황의 나들이 행렬) 앞에서 할복자살(割腹自殺)할 목적으로 배회한 것이 판명되었으며 또 동인은 ○○○○(조선독립)운동자의 한 사람으로 ??에 비밀결사가 잇는 듯 하야 더욱 취조를 진행 중인데 동인은 십 구세 때에 목포부(木浦府) 순사 길??의 소개로 대판에 와서 과자집에서 고용사리를 하다가 그 이듬해에 고향에 돌아왔다가 재작년에 다시 대판에 가서 전기 과자 집에서 냉대하는 것을 분개하야 이리저리 돌아다니든 중이라더라(대판발)

 
1929년 6월 21일자 <조선일보> 기사 '전문'(일부 표기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괄호로 설명하거나 현대문으로 고쳤음)이다.  '일왕 히로히토 주살 미수' 사건은 <조선일보>뿐 아니라 <동아일보>와 <매일신보> 등의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다.
 
히로히토는 단순한 통치권자가 아니라 신의 아들(天子)이었다. 일제가 조선 민중들에게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일왕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게 한 것)를 강요하면서 황국신민의 영광을 받들라고 한 배경에는 일왕이 있었다. 그러므로 식민지 백성이 천황폐하를 주살하려고 했던 사실을 그대로 밝히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신문들은 '일왕 주살' 기도는 쏙 빼버리고 사회 불만에 의한 우발적인 범행으로 몰아갔다.
 
묻힌 역사... 히로히토 처단에 나섰던 전남 무안 출신 청년
 
  
김종성 애국지사의 생존 당시 모습.
ⓒ 김봉수
애국지사


김종성(1906~1977) 지사의 '일왕 히로히토 주살 미수' 의거는 단독 거사였다.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조직의 소행으로 몰기도 했지만 사실은 '큰 뜻'을 품고 적국(敵國)에 건너온 한 조선 청년의 준비된 의거였다.

 

김 지사의 의거는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이봉창 의거(1932년)보다 3년 앞서서 감행된 역사적인 의거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연구나 자료란 거의 없는 '묻힌 역사'가 되고 말았다.
 
이봉창 지사의 정신적 지주는 백범 김구 선생이었다. 한인애국단원이었던 이 지사는 백범의 지도 아래 히로히토를 처단하기 위한 거사를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감행했다. 그렇다면 김종성 지사에게 적국의 수괴를 처단하겠다는 기백을 심어준 정신적 지주는 누구였을까?
 
김 지사의 정신적 지주는 무명 한학자로 추정된다. 김 지사의 고향 전남 무안 해제에서 훈장 생활을 하던 잠와(潛蝸) 김용수 선생은 조국이 일제에 짓밟히자 왜놈 세상을 보지 않겠다며 전남 신안군에 위치한 사옥도라는 작은 섬에 식솔들을 데리고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던 꼿꼿한 선비였다.
 
스승 '잠와'는 제자 김종성에게 한학뿐 아니라 일제에 대한 의분과 독립 의지를 가르쳤다. 김 지사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매우 컸던 것 같다. 19세이던 1924년 스승에게 '나라를 되찾는 큰일을 하고 오겠다!'고 하직인사를 마친 김 지사는 자신이 신던 고무신을 벗어놓고 대신 가난한 스승의 짚신을 신은 채 적국 일본으로 향했다. 이 같은 사실은 조부의 기록을 정리한 잠와의 손자 김화중(66·중학교 교감으로 정년퇴직)씨를 통해 밝혀졌다.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김 지사는 조선 민중들의 참상을 목격했다. 일본인들에게 천대와 학대를 당하는 민족의 아픔 앞에서 의지를 거듭 다진 김 지사는 24세가 되던 1929년 6월 4일 일왕이 오사카를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날 오전 9시 히로히토(裕仁)를 주살(誅殺-죄를 물어 죽임)한 뒤 할복자살로 최후를 마치기 위해 비검(匕劍)을 품고 환영 군중 속에 대기하던 김 지사는 거사 직전에 일경에 체포되면서 일왕 주살 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고 오사카 형무소 698호 감옥에서 6년간의 옥고를 치르던 김 지사는 1935년 특사로 풀려났다. 히로히토가 이해 득남(둘째아들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의 경사를 맞아 자신과 관련돼 투옥된 이들을 사면하면서 가까스로 풀려난 것이다.
 
초야에 묻힌 가난한 애국지사... 세상 떠난 뒤 추서된 '애국장'
 

  
김종성 애국지사의 아내 김처례(90) 여사.
ⓒ 조호진
애국지사


애국청년은 폐인이 되어 귀향했다. 고문과 옥고를 견뎌냈지만 그 후유증은 김 지사를 평생 괴롭혔다. 그의 집안은 일제 치하에서도 고무신을 신고 다닐 정도로 부유했다. 그러나 그의 의거로 인해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돌아가셨다.
 
일제의 보호관찰 대상이었던 그가 1939년 33세의 늦은 나이에 17세 처녀를 아내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장인 덕분이었다. 전남 함평 출신의 장인은 의거 사실 하나로 김 지사를 사위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노동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서당을 열어 한학을 가르쳤으나 가족을 부양할 정도의 수입은 없었기 때문에 생계의 책임은 전적으로 아내 몫이었다.
 
"시집 갈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나라를 위해 큰 일 한 사람이니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결혼했어요. 고생이요? 힘들게 살아온 이야기를 어떻게 다할 수가 있겠어요. 내가 일하지 않으면 자식들이 굶어 죽기 때문에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어요."
 
애국지사의 아내 김처례(90)여사가 키운 것은 3남2녀만이 아니었다. 말로 다할 수 없다는 그의 역경이 얼마나 힘겨웠는지는 손이 대신 증명했다. 남편을 대신해 농사꾼으로 살아온 그의 손은 녹슨 호미처럼 휘어져 있었다. 게다가 큰아들(용수)과 막내아들(현삼)이 어미보다 먼저 세상을 떴고 그 충격으로 인해 청각이 크게 손상됐다. 하지만 애국지사의 늙은 아내는 아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몸도 정신도 꼿꼿했다. 둘째아들 김봉수(67)씨가 어머니의 곧은 성품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마을 잔칫집에 가면 굶주리고 있을 저희들 생각에 음식을 싸가지고 오시곤 했어요. 저희들은 그런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렸는데 어머니는 잔치 음식을 싸가지고 온 아버지를 몹시 나무라셨어요.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신 어른이 품위를 지켜야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자갈논 두 마지기로 자식 다섯을 키운 어머니는 남의 신세를 지기를 싫어하는 대쪽 같은 분이십니다."
 
향년 72세(1977년)로 애국의 삶을 마친 고산(高山) 김종성 지사. 그는 자신의 의거에도 불구하고 초야에서 묵묵히 살았고, 독립된 조국은 그의 의거에 관심이 없었으며, 가족들은 궁핍에 시달렸다. 정부는 1990년 애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지만 그것은 정부의 발굴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수고로 인한 것이었다. 1994년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된 김종성 지사의 묘지에는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
 
초야에 숨쉬는 몸이
한 자루 칼에 혼을 실어
젊은 육신을 분연히 내어주고
영어의 뒤안길 혹한 세월에
할퀴우고 얼어붙은 심신을
광복의 빛자락에 포근히 녹히고
빈손 모두어 눈을 감으니
혼은 우리의 가슴에 묻히어 살고
몸은 초야에서 숨쉬리라
 
애국의 피는 민주화와 효의 피로 이어져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둘째아들 김봉수 장로.
ⓒ 조호진
애국지사


"한신대를 다니던 동생(현삼)이 시국사건에 연루되면서 수배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동생이 집에 나타나자 잠복근무하던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런데 동생을 잡으러 온 용산경찰서 형사가 '너를 잡아넣으면 진급이 되겠지만 너의 아버님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다 옥고를 치렀는데 어떻게 너까지 감옥에 집어넣겠느냐. 앞으로 데모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기고 그냥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동생 '현삼'을 서울 용산의 자취방에서 데리고 살았던 둘째형 김봉수씨가 들려준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벌어진 일화다. 신학생 현삼씨는 유신독재에 저항했는데 용산경찰서 담당 형사가 '빨갱이' 집안에 대해 뒷조사하기 위해 고향을 찾아갔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고 돌아와서 경고로 끝낸 것이다. 이로 인해 현삼씨는 운동권 동료들로부터 '프락치'로 오해를 샀지만 아버지의 내력과 형사 발언에 대한 설명을 통해 오해가 풀렸다고 했다.
 
애국지사의 핏줄은 달랐다. 현삼씨는 형사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자유와 정의를 향한 행보를 이어갔다. 고(故) 문익환 목사를 따르던 김현삼 목사는 목포 죽동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전남회장과 목포민주시민운동협의회 공동의장 등을 지냈다. 그러던 김 목사는 1996년 46세의 일기로 갑작스레 타계하면서 노모와 둘째형의 애를 끓게 했다.
 
가난한 애국지사 집안을 일으킨 주역은 둘째아들 김봉수(하름교회 장로)씨였다. 해군에 복무하면서 정비기술 자격증을 딴 그는 1967년 현대자동차 정비기술자로 입사해 일급 정비사로 활약하면서 가난 탈출의 밑바탕을 장만했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중동에 노동자로 가 사업자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88올림픽 개최로 건설 붐이 일자 노원구 하계동에 벽돌공장을 운영하면서 사업가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병고에 시달리던 아버지를 서울의 큰 병원으로 모셨던 이도 둘째아들이었고, 어머니를 25년째 모시고 있는 이도 둘째아들이었다. 뿐만 아니다. 두 동생(고 김현삼 목사와 여동생 김숙례 목사)의 학비 뒷바라지를 하고, 형님을 서울로 불러다 먹고 살게 하는 등 부모형제를 위해 헌신하느라 서른셋에 늦장가를 갔다. 애국의 피를 흘린 아버지가 효자의 피와 우애의 피를 물려준 것이다.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교회 장로인 김봉수씨는 한국 개신교 가운데 진보적인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전국장로회 부회장과 CBS와 한신대 이사 등을 맡은 덕분에 바쁘게 지낸다. 그는 "고난의 역사적 사명을 다했던 김재준 목사님과 문익환 목사님의 기장 정신을 잃으면 기장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있는 애국지사 아들의 인생사는 이렇듯이 감사뿐이다.
 
"아버님은 비록 가난하게 살다 가셨지만 어머니는 요즘 아버지 덕분에 연금(120만원)을 받아 호강하며 사십니다. 우리 아들(31)은 할아버지 덕분에 취직이 어려운 이 시기에 취업(서경대학교)했습니다. 나라와 정의를 위해 흘린 피를 인정받게 되어 감사할 뿐입니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가족들이 평안히 지낼 수 있으니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김종성 애국지사 묘소를 참배한 김봉수 장로와 독일인 둘째사위, 막내아들, 큰딸, 둘째딸(맨 오른쪽부터)
ⓒ 김봉수
애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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