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자들, '이황 정신'을 본받고 '퇴계'처럼 실천하라! ”“인사가 만사다!”, 엄정하고 공명정대한 '정무고위직 인사'가 국정의 파행을 막고 성공으로 이끄는 관건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황(李滉)은 조선 중기에 살았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유, 대학자이다(1501~1570년, 자는 경호 景浩, 호가 퇴계 退溪, 퇴도 退陶, 도수 陶叟, 시호 문순 文純). 그는 여말선초에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년)이 정주학(程朱學,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여 보다 명확히 정립한 조선 특유의 성리학과, 독창적으로 확립한 교육론의 학설을 심화, 발전시켜 집대성하였다.
퇴계 이황은 27세에 향시(鄕試)에서 진사 장원, 생원 차석으로 합격했고, 이듬해에는 회시(會試)에서도 진사 차석을 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체질이 강건치 못하여 병치레가 잦았으나 타고난 호학(好學)의 기질로 학문에 정진한 결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치열하게 독서와 사색에 몰입하면서도 벼슬길로 나가 출세를 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직 모친을 섬겨 효도하며 집안을 근실히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출중한 학덕에 비해 상당히 늦은 34세에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수없이 많은 벼슬이 내려졌지만 무려 일흔아홉 번이나 사임하였다. 마지못해 단양·풍기군수, 충청도·강원도 어사(御史) 등을 역임했으나, 그나마도 중앙의 고위직은 마다하고 주로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는 외직을 원했다. 명종 3년, 48세에 단양군수를 자청한 이황은 어지러운 군정(郡政)을 평정하고, 3년 연속 흉년이 들어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그래서 약한 몸을 무릅쓰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직접 '확인행정'에 나섰는데, 기아를 (공평하고 효과적으로) 구제할 뿐만 아니라, 관민(官民)의 합심협력을 끌어내어 정신력에 의한 자발적인 위기 극복과 동시에 이를 통해 생산적인 활동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시너지효과를 위한 것이었다. 물이 많은 고장 단양은 홍수로 인해 흉년이 들고, 가뭄으로 흉년이 든다는 사실을 알고 몸소 보(洑,, 저수지)를 만들어 시범을 보임으로써 백성들이 보를 많이 만들기를 권장하였다(지금도 단양천에 복도소 複道沼라는 저수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후 열 달만에 풍기군수로 전근된 퇴계는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에 세운 서원을 소수수원(紹修書院, 국가공인 교육기관)'으로 격상시켜 '백운동서원'이 우리나라 사액서원(賜額書院, 국가지원 운영)의 효시를 이루게 되었다. 뒷날 조선조의 유학이 수많은 서원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사액서원이 일반 서원들의 선도적인 지위에서 그 역할에 충실토록 한 퇴계의 업적은 학문·교육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는 또한 '문치'(文治)를 중시한 정치지향을 확실히 드러내는 것이며, '교육입국·학문연구'를 유학자 본연의 사명으로 여겼던 학문적·철학적·역사적 의식과 사유의 발로였다. 그리하여 성리학 이론뿐 아니라, 치도의 요체, 자기수양, 현실개혁 등, 처세의 방법론을 가르쳐 저술하였는 바, 학문하는 목적이 벼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첫째는 심신수양, 즉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덕을 쌓는 것이고, 둘째는 지식을 깊고 넓게 많이 아는 것이며, 그 마지막은 행동이라고 했다(학행·지행일치).
그런데, 제대로 수양하지 않았고 지식도 많이 쌓지 못한 채 벼슬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국가의 재정을 축내고, 국민의 세금을 도적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서 줄곧, 일흔아홉 번이나 관직을 사양하여 사임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관리(공직자)들은 모름지기 지식 축적과 덕성 함양은 물론, 도덕성과 정의감을 견지하여 매사에 항상 조심하고 경계함으로써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지 말고 열심히 일하여 자신의 소임을 다하라”고 충고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풍기군수를 사임한 뒤에도 간곡한 부름을 마다지 못해 여러 번 관직에 나갔고, 그렇게 행한 업적이나 상소를 통하여 (후대에 와서도) 탁월한 정치적 경륜과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음이 확인된다. 그런 이황이었기에 나이가 들수록 나라에 대한 근심 걱정이 더해지고 커져서 국사를 논하게 될 때는 가끔 의기(義氣)가 복받쳐 원통하고 슬퍼하기를 자주 하였다. 언제나 불굴의 신념과 의지, 절개를 꺽지 않았던 평소의 태도와, 관직을 맡아서도 강직하게 처사하여 도리를 다했던 사실으로써 '정의실현·사회개혁'에 대한 남다른 의식과 뜨거운 정열 또한 알 수 있다.
특히 42세에 어사(御史)가 된 그는 충청도 지방의 민정검찰를 수행한 경위와 결과를 종합하여 임금에게 보고, 진언하였다. (각별히 상기하며 명심해야 할 발언은) “공주 판관은 원래 성미가 고약하여 청렴하고 근실한 목사 이명(李冥)의 명을 어겨 하는 일이 상반 모순될 뿐만 아니라, 관아의 물건을 말에 실어 가까이 있는 자기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는데, 그 탐욕의 추태를 형언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흉년이 들어 괴로워 하는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이때에 먼저 그러한 탐관오리를 반드시 징계한 뒤에라야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여 도와주는 일도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어느 무엇보다도 엄정한 '인사관리'를 최우선해야 한다 사실을 명확히 전제하며, 무능하고 무책임한 공직자에 대한 일벌백계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퇴계 선생의 지엄한 언명을 명심해야 하거니와, 이와 일맥상통하는 ㅡ “인사가 만사다!” ㅡ 이 짧고 간단한 경구는, 삼척동자라도 모를 리 없는 만인주지의 진리다. 기회 있을 때마다 끊임없이 주장해온 이 언설을 지금 다시 되풀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집권 중반기로 들어가는 분기점에서 분신이나 다름 없는 '대통령(청와대) 비서진'의 기강문란, 도덕적해이(moral hazard)가 핫이슈가 되면서, 가뜩이나 살기 힘든 대다수 국민들로 하여금 좌불안석, 걱정과 불안을 금치 못하게 하며, 정책중심 정치, 책임완수 행정의 부재, 그 난맥상을 여실히 드러내므로 해서다.
공직기강 해이(경호처직원 음주폭행, 의전비서관 음주운전, 반부패비서관실 특별감찰반원 전원교체), 인사검증 부실 논란(장관후보자 2인, 금감원장 낙마, 인사청문보고서 채택불발 장관 속출), 법률자문 적절성 논란(민간인 감찰실장 임명 시행령제정 법률위반 논란 초래, 전기료인하 대통령지시 직권남용 소지 야기), 민정수석 공개적 활동(헌법개정·검경수사권조정 사전발표, SNS 활동) 등등, 그런 적잖은 실책과 사건으로 인해 여론이 들끓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특별감찰반 사건'은 진상공개가 먼저이고, 그 책임은 민정수석이 져야 하는데도 지난달 30일, “특감반 전원 소속청 복귀를 건의했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게다가 일말의 자책이나 사과는 전혀 하지 않고 남의 말 하듯 하니 어이가 없고 상식 밖이라는 게 세론이다.
이 같은 국정파행 역시 결국은 인사문제에 귀결 된다. 그 핵심을 아주 간단히 말하면 '치열성·엄정성'이며, 그렇게 국정최고책임자의 신념과 의지가 투철하기만 하면, '대통령(중심)제'(presidential system)는 '관료주의'를 혁신할 수 있는 강력한 기제(機制, mechanism)가 작동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2~3천명의 정무고위직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의 '권한과 책임'은 국가의 명운을 가를 만큼 막중지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최고지도자는 물론, 그를 필두로 한 각계각층의 모든 지도자·위정자들은 '인사관리'의 중요성을 재인식하여 이를 공명정대, 공평무사하게 철저히 실행해야만 한다.
현명함을 발견하였거든 등용하며, 불가함을 발견하였으면 제거한다 (見賢用之 견현용지 見不可去之 견불가거지) ㅡ “나라의 임금이 어진이를 등용하되 부득이한 것처럼 해야 합니다. 장차 지위가 낮은 자로 하여금 높은 자의 위에 가게 하며 남을 친지들보다 윗자리에 있게 하는 것이니,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좌우의 신하가 모두 현명하다고 하더라도 아직 안 되며, 여러 대부(大夫 )들이 모두 현명하다고 하더라도 아직 안 되고, 나라사람들이 모두 현명하다고 한 연후에 살펴서 현명함을 발견한 연후에 등용하며,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더라도 듣지 말며, 여러 대부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더라도 듣지 말고, 나라사람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한 연후에 살펴서 불가함을 발견한 연후에 제거해야 합니다” (맹자 제7장)
현자를 높이고 유능한 인재를 부린다 (尊賢使能 존현사능) ㅡ “맹자가 말하기를, 현자(賢者)를 높이고유능한 인재를 부려서 뛰어난 인걸들이 윗자리에 있으면 천하의 선비들이 모두 기뻐하여 그 조정에 서기를 원할 것이다” (孟子曰 맹자왈 尊賢使能 존현사능 俊傑在位 준걸재위, 則天下之士皆悅而願立於其朝矣 즉천하지사개열이원입어입어기조. 맹자 제5장)
불혹의 나이에 암행어사의 소임을 다하고 '인사가 만사의 기본, 우선'임을 임금에게 고했던 퇴계 이황은 '지행합일·학행일치'(知行合一 學行一致)의 정신을 실천하였던 우리의 큰 스승이다. 앞서 말한 그의 사상과 행적을 더욱 빛나게 하는 대목은, 상대가 누구이든 차별 없이 예로써 응대한 '겸손의 정신'과, 위정자의 최고 덕목인 '여민동락'(與民同樂, 백성과 같이 즐거이 삶)의 실천이다. 권율(權慄)을 아들로, 이항복(李恒福)을 사위로 둔 영의정 권철(權轍)이 퇴계를 추앙하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 왔으나 예를 갖출뿐 특별히 우대하지 않았다. 그는 며칠 묵으며 회포를 풀 생각이었지만 입에 맞지 않는 음식 탓에 거의 굶다시피하고 하룻만에 떠날 채비를 하며 퇴계에게 기념될 만한 좋은 언명을 청하였다.
“대감께서 여기 골짜기까지 몸소 찾아주셨는데 융숭하게 대접치 못하여 송구할 뿐입니다. 하지만 대감께 올린 식사는 우리 백성들이 먹는 것에 비하면 더없는 성찬입니다. 그런데도 대감께서는 입에 맞지 않아 잘 드시지 못하시는 것을 보고 나라의 앞날이 은근히 염려되었습니다. 무릇 정치의 요체는 여민동락에 있는데, 관민이 이토록 동떨어져 있다면 어느 백성이 관의 행정에 충심을 다해 따르겠습니까?”
대통령(청와대) 비서진의 파행에 접하여, 이 퇴계 선생과, 그 '정언명령'(定言命令, 도덕적 명령)을 생각하며 염원하는 바는 우리나라의 모든 공인, 지도자·위정자들이 조선 유학의 거봉이 발하는 이러한 ‘이황 정신’을 본받고, 그리하여 '퇴계'처럼 실천하는 것이다. 하여, 불현듯 겨레의 영원한 스승, 퇴계 선생이 자청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며 읊었던 한시(漢詩 )가 생각난다. 그 시에 나타난 정신과 같이 우리 대한민국의 지도자·위정자들이 공직에 있더라도 그 자리에 연연치 않고 자연에 사는 듯하며, 사리사욕과 아집을 버리고 오로지 국리민복과 사회 정의·평화를 이루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헌신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호! 이 세상 사람들이여
嗟爾世上人 차이세상인 愼勿愛高官 신물애고관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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