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글쓰기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을 쓰고 난 뒤 글쓰기에 더 관심이 많아졌고,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유심히 보게 됐습니다. 좋은 글은 배우고, 못쓴 글은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최근에 쓴 어떤 글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글쓰기 책은 저런 분이 써야 하는데, 라며 머리칼을 쥐어 뜯었다니깐요.
먼저 이 글이 만들어진 배경을 말씀드릴게요. 제가 좋아하는 나경원 의원에겐 장애를 가진 딸이 있었어요. 이 딸이 2012년 성신여대에 들어갔는데, 그 과정에서 특혜가 있었다는 게 뉴스타파의 보도였어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나경원은 2011년 5월 성신여대에서 특강을 하면서 이 학교와 인연을 맺습니다. 2) 그리고 정말 우연하게도 그해 11월, 성신여대에서 장애인 특별전형이 생깁니다. 3) 나의원의 딸은 면접을 볼 때 자신의 어머니가 나경원임을 암시하는 발언을 합니다. 4) 나의원의 딸은 실기를 볼 때 MR 테이프를 가지고 오지 않아 제대로 시험을 치르지 못합니다. 5) 하지만 나의원의 딸은 당당히 합격합니다. 그 후 성신여대는 장애인전형을 시행하지 않습니다. 6) 그 후 나의원의 측근들이 성신여대에 임용됐고, 입학에 도움을 줬다고 보도된 학과장은 평창올림픽 음악감독을 맡았습니다.
정황상 그 딸이 특혜를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만, 우리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닐 수 있고, 그 대학 나름의 사정도 있을 수 있으니 대학 측과 나의원의 이야기도 들어봐야겠지요. 이에 대해 학과장과 나의원의 대응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러다 의혹이 확산되자 나의원은 ‘뉴스타파 보도에 대한 반박’이란 글을 씁니다. 다들 보셨겠지만, 그 반박문을 여기 옮기며 제 감탄을 추가합니다. 반박문은 어때야 하는지, 이 글만큼 잘 보여주는 글이 없기 때문입니다.
글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도입부입니다. 그 도입부를 나의원은 이렇게 작성합니다. “엄마가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딸의 인생이 짓밟힌 날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뉴스타파의 보도는 사실이 아닙니다”라거나 “제 딸은 실력으로 합격한 것입니다”로 시작했을텐데, 이 한 줄로 나의원은 지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일반인들은 엄마가 정치인이라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는, 매우 교훈적인 도입부지요. ‘인생이 짓밟힌’도 나의원의 어휘력을 엿볼 수 있는, 멋진 표현입니다. ‘딸이 매도당한’ 이라고 썼다면 공분을 일으키지 어려웠을 겁니다.
그 다음 나오는 “선거를 치르며 흑색선전을 너무나 많이 경험했다...비방은 이제 저 나경원에 대한 거짓과 모함을 넘어 가족에 관한 부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를 통해 뉴스타파의 보도는 흑색선전이 됐고, 뉴스타파는 정치인 본인도 아닌 딸을 건드리는 파렴치한 집단이 됩니다.
불과 글 몇줄로 이런 효과를 낼 수 있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수련을 쌓아야 할까요. 나의원의 역량에 대해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집니다.
그래도 다음 부분에는 조목조목 반박이 나오겠구나, 하고 기대한 분들도 계시겠지요. 좋은 글은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글입니다. 독자들이 예상한 사람이 범인이라면 그 얼마나 맥이 빠지겠습니까? 나의원의 반박문이 빛나는 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관계를 아무리 해명한들 끝없이 의혹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들에게 단호하게 대처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글로 인해 뉴스타파는 해명해도 소용없는, 타진요스러운 집단이 돼버립니다. 뉴스타파의 의혹제기에 대해 나의원이 굳이 반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정말 놀라운 능력 아닙니까?
보통 사람같으면 그건 이래서 어떻고, 저래서 저떻고, 라며 의혹에 대해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을 텐데, 변명은 아무리 잘해봤자 구차해 보이죠. 술을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같은 변명이 어떻게 응징됐는지 나의원은 잘 알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의혹제기에 대해 너무 아무말도 안하면 지지자들 중에서도 의심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들이 대학에 갈 기회를 얻고 있다며 “올해도 발달장애인 학생 두 명이 서울대 음대에 합격했습니다.”라고 한 것이죠.
뉴스타파가 제기한 의혹은 성신여대가 왜 나의원 딸이 입시를 보던 해에만 장애인 전형을 했느냐인데, 나의원은 서울대 얘기를 함으로써 그 의혹을 낱낱이 분쇄합니다. ‘아니 서울대에 합격한 애도 있는데 왜 성신여대 가지고 그래?’라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리는 듯합니다. 뉴스타파로선 완전히 허를 찔렸죠. 설마 서울대를 예로 들며 반박할 줄은 몰랐으니깐요.
이 틈을 타서 나의원은 쐐기를 박습니다. “제 딸은 정상적인 입시절차를 거쳐 합격했습니다.” 성동격서, 서울대 얘기로 상대를 당황시켜놓고 ‘내 딸의 합격은 문제가 없다’라고 함으로써이 논란은 순식간에 종결됩니다.
다른 대학에도 붙었지만 성신여대를 택했다는 그 다음 말은, 쐐기를 넘어선 대못입니다.
여기까지만 가지고도 충분히 멋지지만, 나의원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장애인에 대해 사회가 갖는 미안함에 호소하는 것이지요.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휠체어를 빼앗고 걸어보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장애인은 사회의 배려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주장합니다.
나의원 딸을 건드리는 작자들은 배려받아야 할 장애인을 괴롭히는 악당이라는 이미지가 그려지지요. 상대를 쓰러뜨린 후에도 나의원은 멈추지 않습니다. 맨 마지막에 나의원은 엄마가 정치인이라는 이유라 딸의 인생이 짓밟혀서 되겠냐는, 앞에서 했던 말을 반복합니다.
소위 말하는 수미상관법으로, 이 방법을 쓰면 자신의 주장을 수백배 증폭시킬 수 있지요. 이 반박문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줬고, 결국 나의원은 당당히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만약 나의원이 다음과 같이 썼다면 어땠을까요.
[저희 딸이 입시를 볼 때 성신여대에서 장애인입학전형이 생긴 건 순전히 우연입니다. 그 우연을 왜 저한테 따져 묻습니까? 게다가 저희 딸이 면접 때 ‘어머니가 판사출신 국회의원’이라고 한 건 맞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 저 하나뿐입니까? 그리고 저희 딸이 실기볼 때 카세트 테이프를 안가져가 학과장의 도움을 받았다는데, 그걸 가져갈 정도면 일반인 전형을 보지 장애인 전형을 봤겠습니까. 학과장은 원래 그런 일 하라고 있는 겁니다....] 이랬다면 아마 의혹은 점점 더 커져서 나의원이 당선 안됐을 수도 있었겠지요.
글쓰기 실력은 이렇듯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글쓰기 연습을 해서 나의원 정도의 반박문을 쓸 수 있는 단계에 이르도록 합시다.
기생충박사, 서민교수 http://seomin.khan.kr/206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서민교수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국제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