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당의 이른바 이승만 국부론으로 정국이 떠들썩하다. 이승만을 국부로 모셔야 한다. 정부수립엔 공이 있으나 국부로는 인정할 수 없다. 이승만은 친일파와 공모한 사기꾼일 뿐이다. 등 이념과 역사관에 따라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나서야 논할 수 있는 쟁점이다. 즉은 국민이 이승만의 국부를 논하기 이전에 먼저 이승만이 과연 대한민국의 정당한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가치가 있는지 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허나 각각의 정파나 이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양분되다 보니,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정론이 좀처럼 세워지지 않는다. 그로인해 양 진영이 물과 기름이 되어 화합하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그 대립의 각이 날카로워지면서 국민은 더욱 더 혼란스럽기만 하다.
우리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상식이며 상식은 역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다. 즉은 5000년 역사에서 비롯된 우리민족의 상식으로 하여금 이승만 개인의 역사를 평가하고 그 가치를 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 중앙정보부의 해제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이승만은 사적권력을 추구하는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 이라는 설명이 따르고 있다. 이승만은 1912년 11월 18일자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는 “한일합방 3년도 되기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의 느림보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 며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고 나섰다.
하와이에서 박용만장군의 무장독립투쟁에 반대했던 이승만은 한인학교를 운영하던 중 1916년 6월 10일자 미국신문(호놀룰루 스타 블라틴)에 “우리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일본인들은 나에 대해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글을 기고하여 자신이 항일투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임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1918년 이승만은 독립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하다 독립군들에게 발각되자 독립군들을 ‘폭동예비위험인물’ 몰아 미국 경찰에 고발한다. 하와이 (신한민보 1918년 2월 27일)에 따르면 이승만은 재판장에게 “이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 안에 한국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 운동을 하며 일본 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입항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몄습니다. 이것은 미‧일 간 중대한 사건을 일으켜 두 나라 간 평화를 방해하려는 짓입니다. 저들을 의법 조처해 주십시오.” 라고 호소했다. 결국 애국자 박용만 장군은 미국에서 해외로 추방당했다.
1919년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설립이 추진되자 이승만은 독립자금이나 독립군에 영향력이 컸던 기독교인들을 속여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고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 된 후, 재무부를 무력화 시키고 모든 독립자금을 자신의 손에 움켜쥔다.
1920년 6월 미 수사관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승만을 체포한다. 체포‧기소한 이유가 “백인 여성들을 유혹하여 데이트했으며 딸 같은 나이의 노디 양과의 합숙”이었다. 임시정부 대통령 임기기간 독립자금으로 어린처자들과 유흥을 즐긴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모금한 독립자금 중 13%만 임정으로 보내고 87%는 개인적으로 유용하였다. 3.1운동으로 수십만의 동포가 희생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1924년 이승만은 무장투쟁금지와 독립자금유용으로 결국 임정에서 탄핵 당한다. 이승만은 탄핵당한 보복으로 임정으로 가던 독립자금을 완전 차단하여 임정은 생사의 기로에 선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성공하자 이승만은 김구주석에게 “어리석은 짓 그만 하쇼. 독립운동에 전혀 도움이 안 되오.” 하며 일본인들처럼 비난했다.
1941년 8월 8일 일본이 화와이를 침공하자 이승만은 동포들에게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한다.”며 무장투쟁을 주장하면서 미국의 개로 화려하게 변신한다. 그리고 1945년 10월 이승만은 자신이 반공주의자임을 미국에 선전하며 맥아더를 만나기 위해 도쿄로 날아간다.
그 후 이승만은 공산주의진영과 자본주의진영의 대립을 이용해 미국을 등에 업고 험난한 통일정부 대신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하여 관철시킨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한다. 또한 미국이 원하는 대로 민족주의자 대신 매국노들과 손을 잡고 애국자들을 탄압하기에 이른다. 그로 인해 한반도는 해방 후 70년째 분단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여기까지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역사적 사실이다. 위와 같이 이승만 개인의 역사를 날짜까지 정확히 기술한 이유는 후에 불필요한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함이며 국민들에게 이승만 개인을 명확히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위에서 기술한바와 같이 이승만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찬양했음은 물론이요. 독립자금을 개인적으로 착복하기 위해 독립군을 밀고하여 추방시켰다. 그리고는 해외사정을 알리가 없는 한반도의 민족 지사들을 속여 임정대통령이 되었고 독립자금을 유흥비로 탕진하며 어린처자들을 희롱하다 체포까지 되었다.
게다가 임정에서 탄핵을 당하자 독립자금을 완전 차단하여 임시정부를 고사시키고 독립군들의 항일무장투쟁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까지 했다. 미국의 기밀문서에서 밝힌바와 같이 “이승만은 사적권력을 추구하는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임이 추호도 틀림이 없다 하겠다.
5000년 역사에서 비롯된 대한민국의 상식으로 비추어 볼 때, 이승만은 매국노에 사기꾼이자 난봉꾼이란 평가에 토를 다는 국민은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또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서는 아닐 될 인물이라는 것을 부정할 국민 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머리로 동포들을 속이고 한반도 분단지배를 원하는 강대국의 충실한 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이 위와 같을 진대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인 한상진은 “어느 나라든 나라를 세운 분을 ‘국부’라고 평가한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나라를 세운 분을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평가해서 그 화합의 힘으로 미래를 끌고 가려고 하는 정치적 지혜가 대단히 필요하다” 고 말했다가 국민들의 항의가 거세지자 며칠 후 “국부의 명칭에 따른 도덕적, 역사적 기준을 떠나 대한민국을 세운 공적에 유의해 국부에 준하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이념대립을 넘어 국민통합을 이루는 하나의 길이 여기에 있을 것으로 봤다.” 라고 해명하여 더욱 더 공분을 사고 있다.
이승만은 거짓과 매국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했다. 이승만을 국부로 대우한다는 것은 쓰레기더미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언제 그 기반이 썩어 무너질지 모른다. 이는 정부수립 후 6.25사변에 대한 부실한 대처는 물론 3.15부정선거와 박정희, 전두환의 쿠데타까지 연결 지어 볼 때 이승만의 비도덕하고 반민족적인 명분 없는 단독정부수립이 지금까지 우리 민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위와 같을 진대 또 다시 부도덕과 매국적인 토대위에 집을 지으려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을 또 다시 기만하고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의 늪으로 밀어 넣으려는 매국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해방 당시엔 우리 민족이 지식과 정보의 부재로 이승만의 기만에 속았고, 작금엔 장악된 방송과 언론이 국민을 기만하고 있으나 쓰레기 더미는 언젠가는 썩어 문드러질 것이며 민중의 역사는 언젠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와 모든 쓰레기더미를 쓸어버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아니한다.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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