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의 ‘백년 한(恨)’, 10억 엔으로 엿 바꿔 먹다위안부 협상은 아베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1,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1990년 1월 4일자 <한겨레>는 한 면을 털어서 이색 연재를 시작했다. 제목은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의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 윤 교수는 이대 영문과 교수로 평양 출신이다. 첫 회 연재를 시작하면서 윤 교수는 서두에 ‘필자의 말’을 장황하게 썼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구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렇게 한국사회에선 처음으로 공론의 장에 오르게 됐다. 위안부 문제를 처음 거론한 사람은 역사학자도, 여성학자도, 정부 관료도 아닌 영문학자였다.
‘필자의 말’에서 밝힌 대로 윤정옥(91) 교수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비를 들여 해외취재를 한 것은 순전히 ‘개인적 기억’에다 지식인으로서 양심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기생관광’, 기지촌 여성 문제 등 여성 인권이 사회문제여서 접근한 측면도 없진 않다.
지난 2000년 3월 1일, 광화문 네거리 교보문고 앞 대로변에서 열린 제400회 ‘수요 집회’ 때 만난 윤 교수는 필자에게 “당시 내 고향 친구들 가운데도 여러 명이 정신대로 끌려갔다”며 “70이 된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우리 역사에 엄연히 있었던 일임에도 그 누구도 잘 몰랐던 역사,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역사, 그리고 감추고 싶었던 역사를 윤 교수가 어두컴컴한 지하창고에서 끄집어 낸 것이다. 해방 55년이자 1965년 한일협정이 타결된 지 25년만의 일이었다.
윤 교수의 한겨레 연재는 한국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언론사 기자 못지않은 현장취재와 방대한 증언 채록, 관련 사료를 총망라한 역작이었다. 역사학계, 언론계, 정부 관련부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88년 여름 취재차 찾은 삿포로에서 윤 교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찾아간 곳은 ‘다치마스 미사키’라는 절벽이었다. 이곳은 매춘 강요를 견디다 못해 조선인 위안부들이 뛰어내려 목숨을 끊은 곳으로, 마을 사람들은 절벽에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어머니―, 어머니―”하고 울부짖는 소리로 들린다는 것이다.
해방 반세기가 넘도록 위안부 문제가 등한시되고 외면돼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윤 교수는 연재 첫 회에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우리 쪽 기록이 없고, 둘째, 정신대로 나간 여성이 거의 서민층 출신인데다 남성 위주의 한국사회에서 외면당한 점, 셋째, 일본이 자신들의 죄상을 감추기 위해 관련 자료를 폐기한데다 관계자들도 증언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두 번째다. 만약 역대 한국 대통령이나 정부 고위인사의 피붙이 가운데 위안부 피해자가 있었다면 이 문제가 이토록 방치돼 왔을까. 일본의 죄악을 결코 도외시 할 순 없지만 역대 한국 정부 책임자들의 책임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할 것이다.
2. 1965년 한일 간에 체결된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의 주된 목적은 한일 국교정상화였다. 일제 강점 35년사에 대한 과거사 청산문제는 전제조건, 즉, 선결과제였던 셈이다.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시작된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은 1952년 2월 제1차 회담 개최를 시작으로 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되기까지 14년 동안 무려 일곱 차례나 열렸다.
박정희 정권 출범 초기, 미국의 원조가 대폭 삭감되자 당시 최대 국정 현안은 민생고 해결이었다. 게다가 박 정권은 경제개발을 모토로 내걸고 있어서 거액의 자금이 필요했다. 이때 박 정권이 생각해 낸 것이 대일 청구권 자금을 활용하는 방안이었다. 한일 국교정상화를 성사시킬 경우 어떠한 형태로든 자금문제는 해결이 가능할 걸로 봤던 것이다.
박 정권으로선 행운도 없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特需)로 자본이 축적돼 기업들이 해외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 정가에서는 소위 ‘부산적기론(釜山赤旗論)’, 즉, 한국이 공산화되면 일본도 위험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어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다. 여기에 미국 또한 중공(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일 안보벨트를 필요로 하고 있어 한-미-일 3자간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다.
협상의 핵심은 청구권 문제였다. 박정희는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해 막후협상에 나섰다. 양국은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상 간에 소위 ‘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청구권 문제 해결에 전격 합의했다. 그 내용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연리 3.5%, 7년 거치 20년 상환)에 1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청구권 금액이었다. 제2공화국 때 장면 총리가 요구한 23억 달러와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로, 5분의 1정도에 불과한 금액이었다. 청구권 금액도 문제지만 어업권·문화재 반환문제 등에서 우리 측은 거의 백지위임을 하다시피 했다. 야당과 재야, 대학가가 들고 일어난 것은 당연했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제2의 을사조약’이라며 연일 반대시위를 펼쳤다.
청구권 자금이 한국의 경제개발에 도움이 됐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었다. 일본상품 및 일본자본의 한국 진출이 급증하면서 1980년대 들어 대일무역 누적적자가 300억 달러에 달하였다. 당시 일본의 대한무역의존도가 8.3%인데 비하여, 한국의 경우 일본은 제1수입국으로 의존도 40%, 제2수출국으로 의존도 20%를 차지하였다. 이로써 대일 경제예속이 심화되었고 이후 한국경제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돼 왔다.
한일협정이 안고 있는 대표적인 독소조항은 ‘모든 과거사 문제는 불문에 부친다’고 규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인적 피해와 관련해 강제징용, 징병 등은 거론(논의)됐었으나 위안부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양국이 일괄 처리키로 합의함에 따라 위안부 문제는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가 터질 때마다 한일협정을 거론하며 콧방귀를 뀌곤 했다.
위안부 문제 해결에 하나의 시금석이 된 것은 1990년 11월 16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결성이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시킨 윤정옥 교수는 같은 대학의 이효재 교수와 함께 37개 여성단체가 참여한 정대협을 발족시킨 후 초대 공동대표를 맡았다. 정대협은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수요 집회’를 시작한 이래 24년째 이어오고 있는데, 이달 30일이면 1,211회가 된다.
여기에 힘을 보탠 것이 1991년 8월 14일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1997년 작고) 할머니의 증언이다. 김학순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 시절의 참혹한 경험을 낱낱이 증언했고, 이후 아시아 각국의 피해자 증언이 잇따랐다. 문서나 제3자의 증언이 아닌 ‘살아있는 증거물’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기 시작했다.
김 할머니의 증언은 한일 양국에 큰 파장을 가져왔다.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해오던 일본 정부는 표면적이나마 사죄와 반성을 하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뒤늦게 우리 정부도 ‘정신대 문제 실무대책반’을 설치했으며, 이듬해 6월에는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을 제정했다.
1993년 6월 일본 정부는 2차 조사결과를 토대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했다. 이른바 ‘고노 담화’다. 이듬해 1994년에는 사회당 출신의 무라야마 총리가 특별담화를 통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반성 및 사죄를 표명했다.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이었다.
1995년 7월 일본 정부는 민간모금 형식으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이 기금은 피해자들로부터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우선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급한 배상금이 아닌데다 피해자들의 요구와는 무관하게 일시금 지급방식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 기금은 2002년에 활동을 중단하였다.
일본 내에서 사태가 급반전 된 것은 2007년 아베 정권이 출범한 때부터였다. 일본 극우세력을 정치기반으로 하는 아베 정권은 “위안부가 폭행과 협박에 의해 끌려갔다는 증거가 없다”며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인했다. 반면 그해 7월 미국 하원은 일본 정부에 대해 위안부 문제의 책임 인정 및 공식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일에 앞장선 사람은 일본인 2세 출신의 마이클 혼다 의원이었다.
2011년 한국에서 위안부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첫째, 8월 30일 헌법재판소가 “(한국)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청구권 분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보름 뒤 9월 15일 한국 정부는 외교공한을 통해 일본 측에 청구권 협정상 분쟁 해결절차에 따른 양자협의 개시를 요청했다. 그간 무소신, 무대책으로 일관해왔다는 비난을 사온 한국 정부로서는 큰 변화라면 큰 변화였다.
고 김학순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3명이 1991년 12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2004년 최고재판소에서 최종 패소 판결을 받았다. 일본 법원 역시 ‘가제는 게 편’이라는 식으로 번번이 일본 정부와 같은 입장에 섰다. 게다가 아베 2차 내각은 “고노담화 작성 경위를 검증하겠다(2014.2.28, 스가 관방장관).”며 퇴보에 퇴보를 거듭했다.
이에 대해 박근혜 정부의 윤병세 외교장관은 2014년 3월 5일 열린 제25차 유엔인권이사회 고위급 회기 기조연설에서 “고노 담화 수정 움직임은 반인도적·반인륜적 처사”라고 비판했다. 국제적으로 또다시 망신을 당한 일본 정부는 한 걸음 물러섰다. 급기야 아베 총리는 3월 14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고노 담화의 수정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후퇴했다.
한일 양국이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놓고 처음 대좌한 것은 2014년 4월 16일 서울에서 열린 제1차 한일 국장급 협의 자리였다. 이 실무회의는 금년 12월 27일까지 총 12차에 걸쳐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진행됐다. 양국의 극우정권이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보인 것은 더 이상 밀쳐둘 수만은 없는 막다른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8차 회담 이튿날인 지난 6월 12일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간의 논의가 상당한 진전을 보였으며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며 상당한 협상이 이뤄졌음을 암시했다. 11월 2일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위안부 문제의 조속한 타결을 위한 협의를 가속화하기로 합의했다.
3. 어제(28일) 한일 양국은 외교장관회담에서 위안부 문제를 타결했다. 국장급 실무협의를 시작한지 1년 8개월만이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이날 오후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외교장관회담 직후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위안부 문제 해결방안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양국이 합의한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일본 정부의 책임 통감 2) 아베 총리의 사죄 표명 3) 위안부 재단 설립비용으로 10억 엔 지원 등
1, 2항은 별로 주목할 것이 못 되는 게 일본은 총리가 공식 사죄한 것도 뒤집고 무시한 사례가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극우 정치인인 아베의 사죄는 진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눈여겨 볼 대목은 ‘재단 설립비용 10억 엔 지원’건이다. 이에 대해 기시다 외상은 “이 같은 지원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며,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와 함께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하는 것을 자제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기시다의 발언 속에 숨은 속셈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아베 정권이 형식적으로나마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선 직접적인 동기는 미국, 유엔 등 국제사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서라고 판단할 수 있다. 미 하원은 2014년 1월 15일, 2007년의 위안부 결의안 준수를 촉구하는 법안을 표결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이튿날 상원을 통과했으며, 그 다음날로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했다.
현재 미일 양국은 어느 때보다도 밀월을 구가하고 있다. 지난 4월 27일 양국은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에 합의했다. 이로써 미일 ‘신동맹 시대’가 열렸다. 최근 양국은 안보 관련 부처 핵심간부들이 참여하는 군사협의체를 설치하고 평시부터 미군과 자위대 운용을 일체화하는 등 군사동맹을 가속화하고 있다. 총리의 ‘립 서비스’와 10억 엔으로 미국에 잘 보이면서 국제적 비난을 피해갈 수 있다면 일본으로서는 거저먹다시피 한 셈이다.
이에 대해 한국 측 반응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날 윤병세 외교장관은 “일본 정부가 표명한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와 함께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했다”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실시하는 조치에 협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한국 정부에게 위안부 합의는 앓던 이가 빠진 격이니 윤 장관이 반기는 건 당연하다 . 그러나 이런 행태는 참으로 무식한 발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일본 정부가 이번에 표명한 조치를 착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부터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처사다. 아시아여성기금 운용 사례나 과거사 사죄 발언 번복 등 지난 역사가 입증하듯이 일본은 신뢰를 담보하기 어려운 집단이다. 걸핏하면 역사왜곡과 한국 침략 야욕을 드러내는 아베의 말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다음은 이번 협상결과를 두고 ‘최종적 및 불가역적(不可逆的)’이라고 한 대목이다. 한 마디로 이는 언어도단이다. 이미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의 사례에서 보듯이 협정이나 조약은 지나고 보면 늘 미비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65년 당시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짚었다면 이 문제가 오늘에까지 이어졌을까? 항상 협상은 재논의의 여지를 남겨둬야 하며 제대로 하지 못할 바엔 차라리 차기 정부로 넘겼어야 했다.
이번 합의문의 결정적인 하자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과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명쾌히 규정하지 않은 채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언제라도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피해 할머니들이 바라는 건 ‘돈’이 아니다. 이미 8, 90이 넘은 노인들이 큰돈을 쥐게 된들 뭣에 쓰겠는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들이 바라는 건 진솔한, 그리고 공식적인 사죄다.
그럼에도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 이전 문제가 오르내리는 것은 우리 정부의 협상 실패라고 봐야 한다. 합의문 발표 후 기시다 외상은 소녀상이 이전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일본으로서는 소녀상이 몹시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매주 수요일이면 소녀상 앞에서 ‘수요 집회’를 벌이는 데다 이 소녀상을 시작으로 곳곳에 파급되고 있으니 말이다. 소녀상 하나가 일본 극우세력들의 목줄을 쥐고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우리 정부는 그런 일본 편을 들고 나섰다. 윤 장관은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한다.”며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 정도면 소녀상을 이전키로 이면합의를 본 것으로 봐야 한다. ‘소녀상’은 얘기도 꺼내지 못하도록 했어야 마땅했다.
양국의 합의문이 발표된 뒤 국내 언론의 논조는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것 같다. ‘그 정도면 됐다’는 식이다. 평소 위안부 문제에 별 관심이 없던 언론의 ‘제3자적 입장’에서야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100년 한(恨)’을 안고 살아온 피해 할머니들 입장에서는 또다시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에도 없는(없을?) 일본 총리의 사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10억 엔, 그럼에도 자신들의 분신과도 같은 소녀상이 현 위치에서 쫓겨나야 한다니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 아니겠는가?
나라가 없을 때는 나라가 없어서 못된 짓을 당했다고 쳐도 나라가 있고서도 그들은 한동안 제대로 된 보호나 위로를 받지 못했다. 어언 80세가 넘은 고령에다가 건강도 좋지 않다. 지난 5일 최갑순 할머니가 숨지면서 정부에 등록된 군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46명이 됐다. 올해만도 아홉 분이 세상을 떠났다. 일본 정부는 할머니들이 다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간 해온 처사를 보면 한국 정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위안부 협상은 아베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일본은 해묵은 숙제를 단돈 10억 엔으로 ‘퉁치고’ 이로써 국제적으로도 온갖 생색을 다 내게 됐으니 말이다. 아베는 이제 조만간 ‘북일 수교’ 협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그는 한반도의 과거사 청산 문제를 전부 매듭짓게 되는 셈인데 이를 성과로 내세워 아베가 노벨평화상을 노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아베에게 반가운 일이 또 있다. 최근 한일 양국은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문제를 놓고 한국 국방부와 여러 차례 회의를 가졌다. 그런데 한국 국방부는 한국인의 국민정서를 감안해 회담 개최 사실을 ‘쉬쉬’해오고 있다. 아베에겐 꿩 먹고 알 먹고 여기에 깃털 뽑아 모자까지 만드는 ‘1거3득’이 아니겠는가?
반면 상대국인 한국은 ‘쓰리고에 피박’까지 덤터기를 쓴 셈이다. 특히 이번 위안부 협상은 피해 할머니들의 ‘백년 한(恨)’을 10억 엔으로 엿 바꿔 먹은 것이나 다름 없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매국조약 체결에 이어 박근혜 정권의 위안부 협상은 ‘제2의 한일협정’이라는 비난을 사 마땅하다. 졸속 합의로 일본에 면죄부를 준 데 대해 박근혜 정권은 책임을 져야 한다.
합의안 발표 직후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합의에 대해 피해자 분들과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이해를 해 주시기 바란다”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수용을 요구했다. 그간 위안부 할머니들이 기거하는 ‘나눔의 집’ 한번 방문한 적이 없는 마당에 이런 협상결과로 이해를 구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다. 이해를 구할 것이 아니라 사죄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합의안 발표 직후에 나온 보도에 따르면, 정대협이나 피해 할머니들은 협상 진행과정이나 협상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정작 당사자의 의견은 무시된 채 당국자들끼리 앉아서 탁상공론을 한 꼴이다. 한국 측 협상 실무자가 정대협 홈페이지에 한번이라도 들어가 봤으면 이 따위 협상결과가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다.
출처: http://www.ddanzi.com/ddanziNews/62867518 정운현(언론인, 친일문제연구가)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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