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현'의 신간소개 독후평 [김학민.이창훈 공저]
책 제목에서 보듯 이 책은 박정희 손에 죽은 한 사람의 이야기다. 소위 ‘황태성 간첩사건’의 주인공 황 태성이 바로 그 사람이다. 박정희 형 박상희의 친구이기도 했던 황태성은 항일운동 경력에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런 황태성을 박정희는 한 때 멘토로 삼고 따랐다.
그러나 박정희는 황태성이 간첩 누명을 쓰고 궁지에 몰렸을 때 구명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사형 집행에 서명했다. 황태성이 처형된 지 사흘 뒤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에 취임(1963.12.17.)했다. 5대 대선 때 박정희는 ‘여순사건’과 ‘황태성 사건’으로 큰 곤욕을 치렀다. 역대 대선 사상 최소 표차인 15만 6천여 표 차이로 그는 윤보선에게 힘겹게 이겼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첫 공안조작사건이랄 수 있는 ‘황태성 사건’은 그간에도 더러더러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관계자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다 관련문서 또한 손에 넣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번 책에서도 이 사건의 세세한 전모를 다루진 못하고 있다.
크게 봐 황태성이 5.16 직후 남으로 내려온 후 쿠데타 세력과의 접촉과정, 이후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고 재판을 거쳐 처형된 경위 등을 다루는 데 그의 조카사위 권상능의 증언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그의 가계와 학창시절의 항일투쟁과 조선공산당 활동, 그리고 해방공간에서의 다양한 행적도 추적했는데 높이 살만하다고 본다.
소위 ‘대구 10.1항쟁’ 후 1946년 북으로 올라간 황태성은 북에서 무역성 부상(차관급)을 지내다가 5.16쿠데타가 나자 남으로 내려왔다. 김일성 등 북한 수뇌부는 쿠데타 주도세력 가운데 박정희가 포함된 것을 주목했다. 박정희는 과거 남로당에 관여했던 인물로 그의 주변에는 좌익성향의 인사들이 많아 뭔가 대화가 될 걸로 보고 황태성을 남파시킨 것이다. 황태성을 두고 간첩이냐, 밀사냐 논란이 많았는데 그가 조카사위 임미정-권상능 부부에게 밝힌 남하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때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미국과 야당이 그의 존재를 눈치 챈 데다 5대 대선에서 박정희를 둘러싸고 좌익전력 시비, 소위 ‘사상논쟁’이 가열되면서 그는 보호보다는 제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형 친구이자 한 때 흠모했던 그였지만 박정희로서는 자신의 정치생명과 바꿀만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간첩죄 혐의로 처형되었다.
그러면서도 박정희는 황태성이 죽이긴 아깝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황태성 사형집행 승인서류를 들고 박정희를 찾아갔다가 나눈 대화를 보면 그렇다.
박정희 “아까운 사람인데 꼭 사형시켜야 하나?” 김형욱 “미국과 야당에 몰리지 않으려면 사형을 집행해야 합니다.” 박정희 “아까운 사람인데 꼭 사형시켜야 하나?” 김형욱 “각하, 우리가 미국과 야당에 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사형을 집행해야 합니다,”
황태성은 재심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전격적으로 처형이 이뤄졌다. 2년 동안 조사, 재판을 하면서도 박 정권은 황태성의 존재와 체포, 군법회의 재판 사실조차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그러나 그의 사형집행 소식은 이례적으로 공식발표를 했다. 박정희로서는 미국과 야당뿐만 아니라 국내 보수층의 의혹의 눈초리를 말끔히 씻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황태성의 죽음은 제대로 된 재판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박 정권의 정치적 노림수에 따른 희생양이 된 셈이다. 황태성의 죽음을 둘러싼 조사.연구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번 책에서는 중정 발표문, 법원 판결문, 관련 인사들의 증언 등 상당한 자료를 망라했다.
그러나 아직도 중정의 핵심기록이나 미국 정보기관의 문서들은 손대지 못한 실정이다. 적잖은 부분이 새로 밝혀지고 확인되었지만 권력 상층부의 추한 음모는 후세 연구자의 몫으로 남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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