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싸고 청와대와 여당은 국정화 반대자들을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다”라며 싸잡아 비난한다. 한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90퍼센트가 좌파”라고 비난했던 역사학자들과 많은 시민단체, 야당은 정부가 내놓은 국정교과서를 ‘친일 독재 교과서’가 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공식 역사서술의 주도권을 정부와 시민사회가 서로 갖겠다고 윽박지르고 있는 형국이다. 그 다툼의 갈피에 숨어 있는 황당함은 접어 두더라도, 분명한 것은 그만큼 ‘역사는 준엄한 것’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독재정권이라 해도 역사적 사실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5년짜리 계약직 공무원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뒤바꾸는 정권이 역사서술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면 5년마다 역사교과서 개정판이 나올지도 모른다. 나라의 정체성이 오락가락하는 셈이다. 사실상 역사서술에서 ‘사실’이야 바꿀 수 없겠지만, 오늘날의 사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언론인이 기사작성에서 생략과 확충을 통해 진실을 왜곡하는 것처럼 역사왜곡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부끄러운 역사사실은 대체로 생략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역사사실만을 확충함으로써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짓’이다.
역사를 ‘용비어천가’로 만드는 것은 비루한 ‘짓’이다. 박정희가 아무리 현직 대통령의 아버지라 해도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인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부끄러운 가족사를 국정교과서에서 지우거나 희미하게 만드는 것은 봉건 조선왕조에서도 왕들조차 부끄러워하던 일이었다. 그래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발걸음도 단정하게 조심하는 법이다.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한편 그리스도인들 입장에서 가장 부끄러운 역사적 인물은 누구일까? 아마도 예수를 배신했던 유다, 그리고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총독 빌라도일 것이다. 이중에서 유다는 사순절에 읽는 복음서에서 주로 언급되지만, 빌라도 총독의 이름은 미사 때마다 어김없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사도신경에서는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라고 그의 죄상을 명토 박아 놓았다. 사실상 사도신경이 역사적 문헌이라면 “예수님은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하에서 빌라도 총독에게 사형선고를 받으시고”라고 쓰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제국에서 생존해야 했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를 직접 신앙고백문에서 언급하기를 꺼렸던 모양이다. 훗날 총독에서 밀려난 빌라도 총독만 ‘죽일 놈’으로 신자들에게 기억되었다.
박해 중에도 늘 ‘로마 시민’임을 강조했던 바오로 사도를 생각한다면, 이 당시 신자들이 로마제국 자체를 상징하는 황제를 언급하지 못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방편일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유명해진 빌라도처럼,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것처럼, 역사는 냉정하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처럼, 아쉽게도 역사는 남아 있는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
한국천주교회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제주도 대정현성 동문지 밖 큰 도로에 ‘삼의사비’가 서 있다. 1901년 신축년 농민항쟁을 이끈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세 장두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천주교에서는 ‘신축교난’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제주도민들은 제주민란, 이재수의 난 등으로 부른다. 1884년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된 뒤 포교의 제한이 풀리게 되면서 제주도에는 교인이 202명, 예비 신자가 700명 정도 있었다.
천주교는 당시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면서, 한양에서 파견된 중앙봉세관의 마름 노릇을 하면서 주민들의 원성을 샀고, 당산 등 민간신앙을 파괴하면서 주민들의 반감이 더 커졌다. 마침내 대정 고을의 농민들이 천주교 배척하며 제주성을 함락하고, 관덕정 앞에서 천주교인들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을 구실로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하고, 조정에서도 군대를 파견하여 이재수의 난은 평정되었고, 이재수 등 세 장두는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또한 제주도민들은 6315원의 무거운 배상금을 프랑스에 물어야 했다.
제주 대정 삼의사비는 1961년 홍살문 거리에 처음 세워졌다가 인적이 드문 드랫물로 옮겨갔다. 이 낡은 비석을 대정청년회에서 1997년에 다시 큰 도로변에 세우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 비문의 첫 문장이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에 대한 언급마저 담겨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 측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천주교를 비방하는 비석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천주교 측에서는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축교난을 일으킨 장본인들을 기념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천주교 측은 행정관청에서 세웠던 비석 예산을 백지화시켰고, 4월 20일 예정되었던 제막식은 연기되었다. 당시 해괴한 사건이 계속되었다. 낮에는 천주교 측이 비문을 가리기 위해 종이를 붙이고, 밤이면 마을 사람들이 그 차단지를 찢어 버리는 숨바꼭질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4달 만에 천주교 측의 양보로 8월 13일 제막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천주교 측은 ‘순교’라 하고, 주민들은 지금도 천주교인들을 살해한 이들을 ‘의인’으로 기린다.
구한말 선교사들을 사람들은 ‘양대인’이라고 불렀다. 서양양반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그 위세가 대단했고, 고종은 “이들의 말을 듣기를 짐의 말을 듣는 것처럼 하라”고 교서를 내릴 지경이었다. 이들의 작폐가 컸으며, 이런 선교사의 태도가 결국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일제에 기생하는’ 친일교회로 나아갔을 것이다. 역사는 준엄해서, 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을 감출 방법이 없다.
노기남 대주교를 중심으로 했던 교회는 해방 이후에 미군정과 밀담을 나누면서 막대한 적산가옥을 인수했으며, 정치적으로 김구 등 임시정부 세력이 아니라 이승만 세력과 손을 잡았다. 스스로 일제에 부역했던 교회 입장에서는 당연히 ‘인재 보존’을 명목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보였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이승만 정권과 결별한 뒤로 한때 자유당과 다투고 민주당 정권을 지지했지만, 박정희가 군사쿠데타에 성공하자, 곧바로 이 군사정권을 승인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74년 지학순 주교가 양심선언으로 유신정권에 저항할 때까지 사실상 한국 천주교회는 2015년 역사교과서 국정화 세력과 다름이 없었다. 친일-독재세력은 노기남 대주교의 복사를 섰던 경험을 아직도 추억하고 있는 정진석 추기경을 마지막 세대로 남겨 놓고 있을 뿐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등장 이후로 전혀 다른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지배세력과 결탁하지 않고 가난한 민중과 연대하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다. 간혹 자선냄비를 두들기는 오웅진 신부 같은 자선교회도 남아 있지만, 이 세상에 공평과 정의, 피조물과 함께 이루는 평화를 위한 발걸음은 계속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음성을 자신들의 목소리와 포개며 예수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을 회복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여전히 한국 천주교회는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친일 행적과 반민주적 행태를 국민들 앞에서 솔직히 반성하지 않는다. 한국근현대사 안에서 천주교회가 지은 범죄에 대한 명백한 ‘죄책고백’이 없는 한 아직 한국교회는 빛 가운데 나아가지 못한다. 공식적인 한국교회사 안에서 삭제된 역사를 다시 적어 넣고 충분히 참회할 필요가 있다.
제주 대정 청년회가 삼의사비에 적어 놓은 첫 구절은 아직도 살아서 한국교회의 가슴을 치고 있다.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는 그렇게 준엄한 역사 안에서 행하는 자기성찰 속에서 거듭 탄생할 것이다. 친일과 독재의 무덤에 회칠하고 싶어 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한국 천주교주교회의의 입장을 내내 기다리고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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