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2월 1일자 주보에 ‘돌발영상’에나 나올 법한 글이 실렸다.
‘성령과 악령을 구별하는 법, 겸손’이라는 글이 ‘생명의 말씀’란에 실렸다. 여러 번 읽어 보았지만, 처음엔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총대리 주교가 한 말이라고 믿기에도 힘들었다. 나중에 내가 파악한 논지는 이랬다.
조규만 주교는 교회개혁을 요구하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수난 받고 죽음을 겪으셨는데도 세상이 그렇게 바뀌지 않았”는데 교황님이 다녀가셨다고 교회가 바뀌겠냐고 항변한다.
이들은 “마치 자신들만 정의로운 것처럼” 정의를 외치며,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사랑을 외치고, 교회를 비난하고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악의 세력들”이라며,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악령을 쫒아낸 이야기를 들려 준다. 자신들은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교회더러 사랑을 실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조규만 주교는 “자신은 바뀌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교회와 교회 지도자)더러 바꾸라고 해서는 (교회와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모진 수난을 당하고서도 세상을 바꾸지 못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자기 변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란 말인가. 교황 역시 자기 변화 없이 교회의 변화를 주문했기 때문에 한국교회 주교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교회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 의심스럽다.
가톨릭교회와 같은 권위주의적 구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주교의 변화가 교회의 변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인데, 결국 주교 자신들의 미욱함의 결과를 예수님이나 교황에게 돌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조규만 주교의 생각처럼 예수님도 교황님도 세상과 교회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그 정도로 (교황방한으로) 교회가 바뀔 것 같으면, 우리 교회는 수도 없이 탈바꿈해야 했을 것이다”라는 조 주교의 말이 입증하고 있듯이, 바티칸에서 이역만리에 있는 한국교회에서는 여전히 교황보다 강한 것이 지역 주교들이다.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역설하지만, ‘네’하고 냉큼 답변하고, 내내 딴청 부리면서 시간만 죽이더라도 특별한 스캔들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교구청 시계는 별 탈 없이 돌아간다.
교회의 복음적 재구성, 그리스도인의 권리이자 의무
더 큰 문제는 조규만 주교의 발언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그릇된 보수적 신념을 강화하면서, 변화를 추구하는 복음적 열정을 위축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당대에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처형당하셨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복음이 아닌 것이 아니다. 교황이 전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교회 안에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분의 발언이 악령의 사주를 받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조 주교도 신학을 공부했으니 잘 알 것이다. 하느님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오지 않은 나라다. 이른바 현재 진행형으로 시나브로 세상에 다가오고 있는 복음이다. 아직 그 나라가 오지 않았다 해서, 아직 세상이 그 나라처럼 바뀌지 않았다 해서 그 나라를 폄훼하거나, 그 나라의 선포를 중단하거나, 그 나라에 대한 복음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복음적 재구성’을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당연한 권리이며, 사실상 의무다. 교회는 복음이 아니라면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일부 주교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조속한 철수’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황이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방한 당시 한국에 와서는 “번영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자리에서 밀어내고 있다”고 했으니 얼마나 좌불안석이었겠는가. 가톨릭교회의 생리상 주교들이 드러내고 교황의 입장을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이런 교황의 생각에 기대서 ‘교회개혁’을 요구하며 마음껏 목청을 높이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얄밉고 분통 터지는 일이겠는지 짐작이 간다. 주교들이 보기에 이제 좀 살만하니까, 위에서 아래서 흔들어대는 격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정황은 참 묘하다. ‘교황과 동반하는 목소리’를 두고 ‘너희들만 잘났냐?’고 말하는 사람이 주교다. 교황의 권고를 찬찬히 묵상하고, 신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자리에서 ‘왜 교황 말만 듣느냐?’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 자세를 보이고” 있는 주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당혹스럽다. 사회정의와 교회개혁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들만 정의로운 것처럼”, “자기들만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그런다고 비판하는 것은 이른바 ‘교회 지도자’가 할 말이 아니다. 자신의 사랑 없음을 탓하는 겸손이 필요한 것은 주교 자신이다. 순박한 신자들의 ‘사랑 없음’보다 더 중대한 문제는 ‘사랑의 전문가’를 자처하는 성직자들의 ‘사랑 없음’이 아닐까.
성전을 소란케 한 그분을 다시 못박는 이는 누구인가?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성령의 지도이거나 악령의 사주로 간주하려는 태도가 위험천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겸손’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이를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위태롭다. 겸손은 자칫 굴종과 혼동되기 쉽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천국과 지옥으로 양분하는 것의 위험성 때문에 중간지대로 ‘연옥’까지 설정해 두고 있는데, 성령과 악령의 이분법을 마구잡이로 사람들에게 들이대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능멸하는 것이다.
주교가 신자들에게 겸손을 강조할 때는 “사제들에 대한 복종심”을 훈계한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겸손은 고위 성직자에게 더욱 요청되는 미덕이다. 겸손하게 자녀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주교 된 자의 마땅한 태도다. 요즘 ‘불통령’이라는 말이 있다. 소통하지 않는 대통령이라는 뜻일 게다. 대통령은 자신의 명령을 국민들이 듣지 않더라도 강요할 권력이 있다. 그러나 국민들의 요청을 듣지 않는 대통령은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이때에 발동하는 것이 국민들의 저항권이다.
조규만 주교는 말했다. “오늘 복음은 회당에서 악령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 줍니다.” 여기서 우리 주변에 맴돌고 있는 악의 세력은 사랑과 정의를 이루라고 교회를 소란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을 외면하고 ‘안온한 교회 안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교회를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고 장사치들이 주권을 차지하도록 허용한 이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가난했던, 그러나 용감했던 예수님을 참살하려는 음모가 지금도 성전 이곳저곳에서 소곤거리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지금은 사순절이다. 재를 쓰고 앉아 있어야 할 사람들이 사방에 재를 뿌리고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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