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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 나라가 어디로 가려는가?

윤일병 집단 살해 사건!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4/08/04 [21:11]

과연 이 나라가 어디로 가려는가?

윤일병 집단 살해 사건!

서울의소리 | 입력 : 2014/08/04 [21:11]

말문이 막힌다.

이러고도 어떻게 국가가 <병역>은 국민 된 자의 신성한 <의무>라고 징집영장을 발부하고, 그에 응하지 않으면 군 기피자로 처벌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게 군이 사회적응력이 부족한 사병들의 <도살장>이지, 어디 신선한 국방의무를 다하는 병영이라 할 수 있나? 그것도 아프고 상처 난 병사들을 치료해주는 의무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니 그 의무대는 <의무대>가 아닌 <살인대>였다.

 

▲ 윤재학  칼럼리스트

필자는 1967년 김신조가 투박한 북한 억양으로 “박정희 목을 따기 위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넘어왔다.”는 소위 1.21사태가 발생한 그 직후인 1967. 3월에 징집영장을 받고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1187????라는 군번을 부여받고 3년간의 군 생활을 부산 동래 반여동 장산기슭에 있었던 육군병기학교에서 35개월의 군 복무를 했다.

 

물론 병기학교가 있던 반여동 자리도 부산이 팽창함에 따라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 같고, 지금 그 자리에는 장산과 키 재기를 하는 고층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당시는 1.21사태로 30개월쯤인가 하던 복무기간을 매월 5일인가 10일 이상씩 복무기간을 연장하여 필자는 35개월로 6.25전쟁이 수습되고 난 이후 졸병으로서는 최장기 군복무를 했다.

 

그 당시는 말이 군이었지 “하사관은 등짐으로, 장교는 찦차로, 장군은 트럭으로”라는 말이 백주대낮에도 버젓이 자행되던 시절로 군이 복마전을 넘어 도둑놈 소굴이나 다름없었던 시절이다.

 

그런 살벌했던 시절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성질이 못 되어 먹었거나 괴팍한 선임병이 후임병들을 괴롭히는 것이 일상화되다시피 했던 시절이지만 최고참 선임병부터 순차적으로 그 아래로 내려가며 하향식의 단계적인 괴롭힘이었지, 22사단 총기난사의 임병장의 예에서 보듯이 선임후임 할 것 없이 모두가 한 병사를 상대로 자행하는 집단인격모독이나, 윤일병의 예에서 보듯이 집단이 한 사람을 찍어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런 가혹행위를 넘은 살인을 저지르는 만행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위서부터 단계적으로 내리물림으로 당하는 고통이라 동기간에는 더 끈끈한 전우애가 우러나 혼자 외톨이로 당한다는 서러움은 없었다. 그러니 그 때는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고참이 되어가니 세월이 약이었다. 윤일병이나 임병장에게는 세월도 소용없고, 오직 죽음만이 그 고통과 치욕에서 해방되는 길이었다.

 

그게 세월호가 침몰하기보다도 10일 전에 발생했는데 왜 이제 서야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나?

누가 어떻게 사건을 축소해서 쓸어 덮으려 했나?

이거 제대로 밝혀 우리 병영문화 근본적인 처방을 내리지 않으면

우리는 천만대군을 보유하고 있어도 한갓 허깨비놀음에 불과하다.

 

김정은이가 얼마나 좋아하겠나?

저런 남한 군을 향하여 휴전선 몇 군대에서 총 소리 몇 방만 내면 한국군끼리 서로 죽고 죽이고 인민군이 휴전선을 넘을 필요도 없이 한국군 간에 치고받다 천만대군이 순식간에 괴멸될 것이다.

 

괴롭힘을 당하여 하루하루 죽음으로 몰리던 윤일병에게 총과 실탄이 주어지고 북한군을 향하여 사격을 하라고 했을 때 그가 누구에게 제일 먼저 총구를 겨누었겠나!

 

윤일병 사건이 나고 나서 4월 한 달 동안에만 파악된 비슷한 사례가 5,000건에 육박한다니 그런 군을 가지고 어떻게 인민군을 막아 내겠나? 인민군이 국군을 향하여 총 한 방 안 쏘고, 한국군끼리 서로 죽고 죽이다 끝장날 것이다.

 

첨단무기를 산더미처럼 수입해서 쌓아 놓으면 뭘 하나?

60만 장병이 세월호에 타고 있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아들자식 있는 부모들 어디 살이 떨리고 피가 말라서 자식 군대를 보낼 수가 있나?

 

이번 기회에 군대내의 가혹행위 아주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한다.

당시 국방장관부터 해당 사단장 급까지  별을 단 간부는 그런 병영문화를 개선치 못한 죄를 물어 살인방조죄로 다스리고, 그 이하 영관급장교는 미필적 고의의 살인죄로 다스리고, 그 이하 위관 급 장교부터는 그런 내막을 알고 몰랐고에 관계없이 살인죄로 다스려야 한다.

 

필자가 군대생활 할 때 군의 실상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두 개의 사례를 예로 든다.

 

얘기 하나!

아무리 애국심으로 똘똘 무장이 되어 있어도 배가 고프고 서야 어떻게 전쟁을 할 수가 있나?

그러니 경제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당시에도 육군 정량을 다 먹으면 비만에 걸릴 정도로 주부식이 풍부하게 보급된다고 했다. 하지만 졸병들은 항상 배가 고팠고, 그것도 거의 꽁보리밥이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데 식사당번을 하는 두 명의 전우 훈련병이 밥과 국을 다 먹은 알루미늄 큰 통을 취사반에 반납을 하러가서 오리무중이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으나 그 당시는 각 소대(40명)별로 식사당번병 네댓 명이 취사반에 가서 큰 알루미늄 통에 밥과 국과 부식을 받아 내무반으로 가지고 와서 침상 앞에 앉은 소대원들이 내미는 양은양재기 2개에 국과 밥을 나눠주었다.

 

영양가를 말 하는 것은 너무나도 순박한 세상물정 모르는 얼간이 소리이고, 불결하기가 이명박이 만들어 놓은 녹차 물에 밥을 하고 그 물에 이끼벌레를 넣고 끓인 국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하도 몰아치니 그런 비위생적인 식사를 하고도 배탈이 날 틈도 없었다.

 

두 명이 양은 통을 반납하러 가고 나서 내무반으로 돌아오지를 않았다.

탈영을 한 것이 분명했다.

고참병장인 내무반장의 안색이 새파래지더니 곳 내무반에 비상이 걸렸다.

40명이 뿔뿔이 흩어져 2명을 찾는데 화장실(똥뒷간으로 표현해야 적합)뒤쪽에서 “내무반장님!”하고 크게 외치는 소리가 났다.

 

내무반장과 소대원들이 달려가 보니 알 철모 두 개가 옆에 나뒹굴고 두 명은 임신8개월 된 임산부 같이 배가 남산만 하게 부풀어 올라 몸을 움직이지도 못 하고 눈만 멀겋게 뜨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때 경험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고참병인 내무반장은 즉시 상황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즉시 내무반에 가서 모포를 열장 쯤 포개서 갖고 오라고 하더니 힘을 쓸 것 같은 훈련병 10명을 선발하고 그 누워있는 훈련병들의 등 밑으로 양편에서 팔을 집어넣어 서로 손을 맞잡게 하여 10명이 한 동작으로 그 훈련병을 살짝 들어 10겹으로 포갠 모포위에 누이고 10여명이 모포를 당기며 내무반으로 운반하여 침상에 반드시 눕혔다.

그것으로 상황 끝이었다.

 

그러고 나서 내무반장이 그 두 명을 보며 “내일 아침에 보자!”한 마디 던지고 모두다 취침에 들어갔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 고참병인 내무반장은 한 눈에 상황파악이 되었던 것이다.

 

다음날 멀쩡히 일어난 두 명을 심문하여 보니 식사를 배급받으러 갈 때 취사반에서 고향친구를 만났단다. 그 고향친구가 식사 끝나고 알루미늄 통 반납하러 올 때 알 철모 두 개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그렇게 했더니 그 철모에 밥을 고봉으로 퍼서 둥근 밥덩이를 만들고 한 철모에는 국을 건더기만 건져 꽉 담아 주더란다.

 

둘이 입이 찢어져서 그걸 가지고 와서 사람들의 눈에 안 띄는 똥 뒷간 뒤편의 똥을 퍼내기 위해 4각 구멍이 뚫려 있는 콘크리트 위에 올라앉아 둘이서 손으로 허겁지겁 퍼 먹은 것이다.

 

그러고 나서 배가 부풀어 올라 일어나는 것은 고사하고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고 숨이 차 올라와서 자신들을 찾고 있는 소리를 들었어도 도저히 대답을 할 수도 없어 그대로 누워있다 발견이 된 것이다.

 

그때 내무반장 참으로 성격이 날카로운 병장이었는데 경험이 없었다면 그 두 명의 훈련병을 발견하고 홧김에 발로 걷어차거나 강제로 일으켜 세웠으면 그 둘은 그 자리에서 장 파열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오죽이나 배가 고팠으면 그랬겠나?

 

얘기 둘!

“고재봉” 하면 우리 살인사상 따를 자가 없는 전무후무한 처참한 살인자다.

필자가 중학교 다닐 때 군에서 그 사건이 났으니 1940년 앞뒤로 태어난 남성이었다.

 

전방 어떤 부대에서 졸병생활을 하다 하루는 대대장(중령)의 관사에 청소를 하는 사역병으로 차출되어 나갔다. 집 안을 여기저기 청소하다 보니 부뚜막에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누룽지 한 조각이 있어 배가 고픈 김에 한 입에 집어 먹었단다. 그게 식모 → 대대장 마누라 → 대대장 귀에까지 들어가 고재봉은 절도범으로 군 감방생활을 몇 개월 하게 되었다.

 

그 당시 군의 형무소라는 것이 말이 형무소지 인간의 사지를 다 잘라내고 분해했다가 다시 맞추는 “인간재생창”으로 불렸다. 하루 종일 기합을 받느라고 거꾸로 매달려 있는 시간이 12시간, 발로 차이고 얻어맞는 시간이 12시간이었다.

 

지옥도 그런 지옥은 없었을 것이니 “인간재생창”으로 불렸을 것이다.

군 형무소를 거쳐 온 사병은 제대하고 나서도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누룽지 한 조각 주워 먹고 그런 혹독한 형무소 생활을 마친 고재봉은 출소 즉시 이를 부드득부드득 갈며 야전도끼 한 자루를 품에 끼고 어두운 밤에 그 대대장관사를 찾아갔다.

 

잠자는 다섯 사람을 깨워 도끼로 산채로 무차별 난타하여 정육점에서 털 벗겨진 돼지를 부위별로 자르듯 토막을 내어 벼렸다. 그리고 얼마도망 도망 다니다 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5명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범도 많지만 죽이는 방법이 잔인하기로는 고재봉을 따를 자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논산훈련소 훈련을 받을 때는 터키 민요 “위스키다라”라는 곡조에 맞춰 고재봉을 추모(?)하고 존경(?)하는 비공식 군가가 한 동안 유행을 하기도 했다.

 

아뿔싸!

그런데 고재봉이 죽인 다섯은 고재봉을 영창 보낸 대대장이 아닌 후임대대장일가족이었던 것이다. 엉뚱한 일가족이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그때 대대장이 마누라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랬겠느냐고 그 다음번 사역 나올 때 고재봉에게 뜨거운 고깃국에 흰 쌀밥을 고봉으로 퍼서 먹였더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였겠나?

 

필자가 부산병기학교에서 군 생활을 할 때 2km쯤 떨어진 조병창이라는 군부대가 있었다.

그 조병창장이 고재봉에게 죽을 뻔 했던 대대장이 대령으로 승진을 하여 조병창장으로 온 것이다. 당시 조병창에 근무하는 병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자신들은 군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고 천당생활을 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고재봉에게 죽을 운명이었는데 엉뚱한 일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해 자신은 남의 삶을 대신 살고 있다고 하며 불교인지 기독교에 귀의하여 부처님이나 하나님 같은 심성의 인간이 되어 부대사병들을 아주 따뜻하게 대우해 주었던 것이다. 진즉에 그랬더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재봉”하면 다 알고 있었는데, 요새 집회현장에서  젊은이들에게 “혹시 고재봉을 아느냐?”고 물어보면 모두다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만큼 세월이 지나갔으니 모두다 호랑이 담배피울 때의 얘기가 되었다.

 

그런 혹독한 시절에 군 생활도 했는데, 지금과 같이 풍족한 시절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군을 요 모양 요 꼴로 만든 국방장관이하 군 지휘체계도 문제지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훨씬 전에 일어난 사고가 왜 이제야 그 실상이 들어났는지가 더 큰 문제가. 누가 이것을 단순 사고로 쓸어 덮으려 했나? 지옥까지라도 샅샅이 뒤져서 뜨겁게, 아주 뜨겁게 그 죗값을 치르도록 해야 한다.

 

미국이 대주는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장개석 군대가 죽창으로 맞서는 모택동 군에게 괴멸을 당하여 드넓은 중원대륙에서 쫓겨나 대만이라는 작은 섬으로 쫓겨 간 것이 바로 권력 상층부와 군의 부패 때문이었다.

 

이거 이대로 놔뒀다가는 나라는 절로 망한다.

 

아- 대한민국!

전국 방방곡곡, 요소요소가 세월호가 아닌 곳이 없다.

 

이 나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어떻게 멀쩡하던 나라가 6년 반 동안에 이 지경이 될 수가 있나?

 

                                                                                         칼럼리스트 윤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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