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에게 재산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한 존경받는 부자 어른들...대선에 출마한 "박근혜 후보가 ‘꼭’ 읽어보아야 할 내용"우리의 속담에 “세 동네가 망해야 부자 하나가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세 동네의 원성을 사는 인색함과 이웃 착취를 해야만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부자는 이웃 세 동네의 원망을 듣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유일하게도 12대 300년에 이르는 만석지기 집안이면서도 주위의 원성은 커녕 오히려 그 덕을 칭송받고 존경받는 가문이 있습니다. 바로 경주 최씨 가문입니다. 이 글에서 만석지기 부자 경주 최씨 가문이라함은 1대 최진립(1568-1636)으로부터 가문의 전재산을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학 설립에 기부한 12대 최준(1884-1970)까지를 말합니다.
영남대학교는 1947년 3월 최준 선생에 의해서 '대구문리과 대학'으로 개교하여 1947년 9월 재단법인 대구대학 설립을 인가 받고, 영남의 인재를 길러오던 중, 1967년 12월 박정희가 대통령 직권으로 강압적으로 주도한 청구대학과의 통합으로 교명을 바꾼 학교법인이며, 지금까지도 “박정희 교주의 창학정신을 칭송”하고 있는 독재자의 불법 탈취물입니다.
최준 선생은 백산 안희제 선생과 더불어 <백산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기업을 운영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한민국 상해-중경 임시정부와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비밀리에 보내는 일을 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조국이 광복된 후인 1947년에 남은 재산 모두를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에 내놓음으로써 대부호 가문의 막을 내렸고, 후손들은 지금 평범한 중산층으로 살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최준 선생의 이런 애국애족정신을 기려,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습니다.
또 한 분의 존경하는 부자로 1971년 3월에 세상을 떠나신 유일한 유한양행 사장을 소개합니다.
유일한 사장은1895년 평양에서 평양에서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미국 감리교 유학생 선발에 응하여 아홉 살에 불과한 어린 나이인 1905년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 선생의 인솔로 미국으로 가서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태프트 자매에 의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서읽기와 기도를 한 뒤, 밭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기독교의 노동윤리를 배우면서 성장했습니다.
1909년에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하여,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의 미식축구 선수로서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공부를 했습니다.
1919년 고국에서 기미년 삼일만세행진이 일어나자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미주한인의회에 참여함으로써, 미주지역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1926년 일시 귀국하여 서울에 유한양행을 설립했습니다. 이 때 그의 일시 귀국 사유를 알게된 서재필이 손수 제작하여 선물한 상표가 바로 지금의 유한양행을 대표하는 버드나무 상표입니다.
유한양행은 당시 국민건강의 공적이었던 결핵을 퇴치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미국에서 결핵약을 수입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팔기 시작했으며, 뒤이어 양약과 한방약을 결합한 보건 건강식품을 개발해 팔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 결혼한 부인 호미리 여사는 중국계 미국인이었는데, 중일전쟁으로 국내에 의약품이 부족해지자 소아과 병원을 개업해 거의 무료에 가까운 수준으로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유일한 사장의 경영윤리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재산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이 맡기신 것”이라는 기독교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1929년에 이미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여 한국기업의 미래를 선도했고, 평생 동안 탈세를 모르는 양심적 기업의 모범을 보였고, 1952년에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에 유한공업고등학교, 1970년에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설립하면서 학교법인 유한재단을 개인 소유가 아닌 공공재단으로 만들어, 이익을 교육사업에 환원하는 기업인의 귀감이 됐습니다.
더욱 우리가 눈여겨 볼 일은, 1969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며, 유한양행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넘김으로써 명실상부한 공기업으로 남게 한 것입니다. 그때 “아들 딸은 대학공부까지 시켜주었으니 나머지 인생은 스스로 열어나갈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유일한 사장은 1971년 세상을 떠나시면서 어린 손녀의 학자금 1만불을 제외한 나머지 재산을 모두 교육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기셔서 세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정부에서도 그 분의 청렴결백과 신앙심이 국가사회에 남긴 업적을 기려서, 1970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고, 별세하신 1971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습니다
제 18대 대통령 선거전이 종반에 이르면서 박근혜 후보 재력의 원천인 정수장학회와 영남대학에 대한 논란이 또다시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평생을 두고 생산노동은 커녕 직장인으로 일해본 적이 없는 박후보의 화수분같은 재부(財富)의 정체에 대한 논란은 박후보가 정치에 입문한 다음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왔기에, 이 글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앞에서 말한 두 분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최근 대선후보들에 의해 거론되고 있는 이른바 “노블리스 오불리제” 보다 상위개념인 “한국 부자들의 윤리”를, 부자인 박 후보와 안 후보에게 일깨워 권하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이 말하는 국민대통합과 사회변화의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관광명소로 탈바꿈한 경주 최부자집의 아흔아홉 칸 고택에는 가문 전승의 여섯 가지 가르침(六訓)과 지켜야 할 여섯 가지 마음가짐(六然)이 안내판에 한글로 적혀 걸려 있습니다.
六訓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마라!
2.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3.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말라!
4.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5. 주변 100리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6.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六然
自處超然 자처초연 서 있는 곳에 집착하지 말고 자리에 연연하지 마라!
對人靄然 대인애연 사람을 대함에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라!
無事澄然 무사징연 일이 없어 편안할 때는 마음을 맑게 가져라!
有事敢然 유사감연 일을 앞두고 결정할 때는 과감하게 실행하라!
得意淡然 득의담연 뜻을 얻었을 때에 오히려 담담하라!
失意泰然 실의태연 뜻을 잃더라도 태연하라
글쓴이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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