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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검∙판사 역사인식 없는 꼭두각시 불과해”

김창근씨, 지위 낮은 경찰이나 교도관은 일본대사관 돌진에 “속 시원하다” 칭찬 

김대용 | 기사입력 2012/09/06 [09:02]

“잘난 검∙판사 역사인식 없는 꼭두각시 불과해”

김창근씨, 지위 낮은 경찰이나 교도관은 일본대사관 돌진에 “속 시원하다” 칭찬 

김대용 | 입력 : 2012/09/06 [09:02]
▲     © 구장회

지난 7월 9일 위안부 소녀상 말뚝테러에 분노 서울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을 향해 돌진한 김창근(62세)씨가 구속 54일만에 시민의 품에 안겼다.

21세기 신 독립투사나 다름없는 김창근씨는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화물차로 일본대사관 정문으로 돌진한 혐의(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로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 18단독 이동식 판사로부터 징역 1년에 2년의 집행유예, 그리고 2년간 보호관찰 명령을 받아 화제가 된 인물이다. 5일 김창근씨의 석방을 반기는 듯 햇살도 오랜만에 따사로웠다.

김씨는 지난 7월 11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의왕교도소로 이감되어 55일 동안 8명의 강력범들과 혼방에서 지내다가 이날 오후 석방된 것이다.

그러나 테러를 가한 자와 응징을 한 자에 대한 한∙일간의 대우는 판이하게 달랐다. 
말뚝테러를 가한 일본인 ‘스즈키 노부유키’는 일본정부가 자금을 후원하는 등 일본인들의 애국자가 된 반면, 김창근씨는 실정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판사의 훈시 아닌“잘못했다고 말 하면 집에 보내 줄께”라는 제안에 김씨는 단호하게 “아니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말하는 바람에 검사 구형 보다 더 무거운 보호관찰 선고도 받았다.

그보다 더 부끄러운 사실은 김씨의 석방을 지켜본 이들은 한국 언론이 아닌 일본 기자들이었다.
김창근씨가 이날 오후 의왕교도소 정문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한국 주재 10 여명의 일본 기자들은 카메라를 터트리며 김창근씨의 석방을 밀도 있게 취재하기 시작했다.

반면 한국기자와 언론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한 시민은 “독립투사인 김창근씨를 외면한 한국의 언론은 죽었다”며 “한국언론들의 현 주소는 돈 맛을 쫒 거나, 여배우의 치마끈 길이를 쫒 거나 아니면 권력의 눈치에 절로 기는 언론이 돼 버렸다”고 한탄했다.

9월5일은 의왕교도소 앞 일본 기자들 앞에서 한국 언론의 치욕스런 치부를 드러낸 날이기도 했다. 이에 본지는 김창근씨와 밀착 인터뷰를 통해 석방 심정에 대한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그대로 실기로 했다.
▲     © 구장회

-출소 후 한국 기자 보다는 일본 기자들이 석방을 취재한 보습을 보고 느낀 소감은
우리나라의 언론이 아직까지 패쇄적 이구나. 일본신문들은 ‘일본 대사관을 침입한 한국 남성이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많이 보도했다. 8월 20일 구형을 받던 날에도 일본기자들이 많이 왔다. 그리고 오늘 역시 일본기자만 10여명 왔다. 제가 내일 일본신문에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아마 집행유예로 나왔다고 보도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것을 보고 제가 과연 이 땅에서 살아야 되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적대국가인 일본도 자기나라에 대하여 응징을 가한 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너무 빨리 잊는다. 제대로(언론의 역활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언론에 대해 바라는 사항은
요구라기보다는(말뚝테러 응징이) 1회 성으로 끝나는 이슈가 아닌, 20~30대 젊은 층에게 잊혀져 가는 일본의 침략정신을 제가 한 행위로 인해서 새롭게 인식을 하게 했으면 한다.
 
-구속 전후 신념의 차이는 없는가
변함없다. 재판정에서 피고 입장에서 섰을 때 판사가 마지막으로 제게 할 말이 없느냐는 말을 했다. 당시 법정에서 말뚝테러를 가한 일본인 ‘스즈끼 노부유끼’는 일본 정부 보호아래 말뚝을 제작해 일본 국민들을 대상으로 말뚝을 판매하고 있다. 또한 8월 11일 히로시마 우리나라 총영사관에 벽돌을 던져 유리 창을 깬 일본인은 어떻게 되었나?

제가 한 일에 대해 자부심을 떠나 똑 같은 국권을 갖고 있는 나라인데, 한쪽에서는 그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을 보호도 해주고 지원도 해주는데, 우리나라는 보호는 커녕 징역 1년에 2년간의 집행유예, 관찰보호 2년을 더했다. 그렇다치더라도 내 한 목숨 던져서라도 20~30대 젊은 층에게 일본의 침략 정신만큼은 꼭 알리고 싶다.
 
-재판정에서 검사와 판사는 역사의식은 있다고 느꼈는지
둘 다 역사의식은 없는 분 같더라. 8월 16일 법정에서 공안부 이시원 검사가 징역 1년을 구형했는데, 서울중앙지법 이동식 판사는 역사의식을 떠나서 독립된 사법부가 아직까지도 정부정책에 얽매여 꼭두각시 같은 판결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속기간 가장 많이 생각한 부분이 있다면
54일간 구속을 당했는데, 제가 한 일에 대해 진전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안에서도 그 생각만 했고, 좀 달라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재판과정에서 역시 달라지지 않으니까 정말 그 자리에서 죽고 싶더라.
 
-왜 선생은 일본대사관에 당신만의 방법으로 응징하고 싶었는가
일본 대사관을 향해 물리적 방법으로 행동을 옮긴 이유는 6월 19일 스즈키 노부유끼라는 자가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에 말뚝을 박고 말뚝 테러를 했다. 저는 이 메스컴을 보고 우리 정부에서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라는 일말의 기대를 했는데, 열흘 후 정부가 한일군사협정에 대한 밀실처리를 할려다 세상에 들통나지 않았는가. 그래서 제가 더 분노했다.
당시 민주통합당은 ‘한일군사협정 즉각 철회하라’라는 프랭카드를 걸었다. 저는 군사협정 철회가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을 노무현 대통령 탄핵 하듯이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을 속이고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은 청와대 일개 인사의 사퇴문제가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 탄핵을 마땅이 주장했어야 했다. 그래서 내 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차로 응징하고 싶었다.
 
-당시 죽을 수도 있는데 거사를 결정할 당시 심정은
제가 마지막에 강한 철문을 받으면 많이 다치든가 아니면,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 유서를 썼다. 혹시 만약에 죽게 되다면 ‘제 유골을 독도 앞 바다에 뿌려주십쇼’라고 썼다.
 
-일본대사관 정문을 받았을 때 순간적인 느낌은
일본 대사관 철문이 굉장히 강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정문이 압축식 스프링처럼 생겼는지 받는 순간 소리는 ‘뻥’하고 크게 났지만 받는 감각은 스폰지를 받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가 많이 안 다쳤다. 
 
-생업에 가장 중요한 수단인 차를 이용해 대사관을 받은 이유는
그 일을 하기 위해 일본대사관을 세 번이나 답사했다. 그 길이 좁고 잘못하면 사람이나 행인이 다칠 수 있다. 또한 근무를 서는 우리나라 전경들이 위험해 보였다. 그래서 사람이 안다치게 할려고 인적이 뜸한 새벽시간을 골라 잡았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지만 사람을 해쳐서는 안된다. 
그리고 1인 시위를 해서는 되질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선 맨 몸으로 힘들 것 같고 제가 좀 위험하더라고 저의 분신인 차와 같이하고자 했다.
제가 먹고사는 차니까 말이다…

-한국경찰이 처음 한 말을 기억한다면
그것을 물으면 마음이 안 좋다. 제가 일본 대사관 정문과 부딪혔을 때 정신이 멍했다. 그때 책임자인듯한 경찰의 첫 말이 ‘야! 음주측정기 같고 와’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욕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야! 이놈들아 내가 술을 먹고 이런 짓을 했으면, 이건 대한민국의 수치다. 우리나라 국민에 대한 모욕이다 그랬더니 경찰이 ‘죄송합니다’ 라고 말했다.
 
-가장으로서 가족에 대한 생각은
가장으로서 아무리 떳떳한 일을 했다지만 여전히 가족들에게는 죄스럽다. 물질적인 면을 충족 못 시키고 피해를 주는구나…구치소에서 찾아온 아들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집을 나설 때 마지막으로 한말이 있다면
그 날은 얘기도 안하고 성남 집밖의 차 속에서 지냈다. 밤을 새며 생각을 정리하고 새벽 3시에 집 근처를 출발했다.
 
-한일군사협정을 추진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하는지
제가 뭐 감히 한 나라의 대통령을 평가는 못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영호남 지역감정에 또 하나를 플러스 시킨 사람이다. 바로 종교분쟁. 진짜 나쁜 사람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갈려져 있고 영호남으로 갈라져 있는데 거기에다 종교 분쟁까지 일어나게 했다. 나라를 하나로 융합시키는게 아니라 분란을 일으킨 사람이다.
▲     © 구장회

-국내의 친일파에 대한 생각은
우리사회는 친일파에 대한 정죄가 이루어 지지 않았다. 친일분자들은 왜 그렇게 까지 일본을 정리 못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과거 속에 친일분자지만 뿌리를 계속 이어 나가는 이유는 이들이 편히 살려다 보니 친일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 뿌리 뽑아야 한다.
 
-친일파를 뿌리뽑을 방법이 있다면
친일에 대한 공개로 끝나지 않고 처벌내지 강력한 재산환수가 이뤄져야 한다. 몇 명 사람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리스트를 작성해 거기에 맞게 입법기관에서 명확하게 법 추진을 해야 한다.
 
-교도소에서 생활할 때 격려는 없었는가
경찰 하위 부서에 근무하는 분들은 정말 우호적이었다. 특혜는 없지만 말 한마디라도 ‘아 독립투사’ ‘속 시원하다’ 그런 표현을 많이들 했다. 자기들도 마음이 뿌듯하다고 했다. 대체로 권력을 가진 자보다 권력을 안 가진 사람들이 더 호의적이었다.
 
-친일파인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생각은
박정희 대통령은 전체적으로 갑론을박은 있지만, 일본으로 인해서 많은 권력을 갖게 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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