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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코더를 든 아줌마...“무너지는 민주주의가 나를 지탱한 힘” 안단테사랑

누군가는 방송을 하고 촛불을 들어서 이정도 버티고 있는 게 아닐까.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2/08/30 [14:59]

캠코더를 든 아줌마...“무너지는 민주주의가 나를 지탱한 힘” 안단테사랑

누군가는 방송을 하고 촛불을 들어서 이정도 버티고 있는 게 아닐까.

서울의소리 | 입력 : 2012/08/30 [14:59]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의 광장에서, 영하의 날씨에 물대포 쏟아지던 한미FTA 저지 시위 현장에서, 4대강 반대집회와 언론노동자들의 파업현장에서... 소형 캠코더가 올려진 삼각대를 들고 거리를 누비던 자그마한 체구의 여성을 한번쯤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저 분은 집회 시위 현장에 자주 나오는구나' 싶었는데 정말 2년여 동안은 거의 매일같이 나왔단다.

뭐하는 사람일까? 실제 직업이 뭘까? 결혼해서 자녀가 있을까?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힘은 무엇일까? 든든한 '빽'이 있는 걸까? 이 모든 궁금증을 풀기 위해 실제 주인공을 만나기로 했다. 사실 강씨는 안단테사랑이라는 닉네님으로 더 유명하다.

VJ '안단테사랑' 강동진씨 
노트북을 들고 현장에서 인터넷생중계 중인 강동진(안단테사랑)씨


강씨가 인터넷 생중계를 시작한 건 2008년. 그 해 촛불은 그 많던 수만큼이나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을 움직였나 보다.

"제가 경기도민이거든요 일을 하던 중 인터넷 아고라 사이트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광우병 쇠고기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아프리카TV 중계를 보면서 밤새 울고 그러다가 저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게 됐죠"

강씨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 당시 첫 거리행진을 하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청계광장에서 행진을 시작할 당시 현장에 강씨도 있었다. 종로거리에서 청와대로 가는 길목에서 막혀 물대포를 쏘는 경찰도 봤다. 그런데 강씨가 놀라웠던 건 물대포가 등장하고 긴장된 상황에서도 휴대폰을 꺼내들어 경찰을 찍는 시민들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시민들이 늘어나고 경찰이 물러서는 장면을 본 것이다.

"아 이렇게 뭉치면 뭐든 하겠구나 싶더라구요"

경찰에 쫓기는 시민들의 신발이 벗겨지고 운동화와 안경들이 거리에 나뒹굴었다. 그 속에서 강씨는 '촛불시민들'과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느라 힘들다 싶었는데 경상도에서 올라온 사람도 있고 지방에서 많이들 올라왔더라"며 "주부이고 다음날 일을 해야해서 먼저 가는게 늘 미안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집에 와서 아프리카TV를 통해 상황을 보는데 인터넷 중계가 꺼지고 사람들이 연행된다는 소식이 들릴 때면 정말 아찔했죠.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맞나 싶은 생각에 울다가 출근을 하고 저녁엔 서울로 촛불 들고 가곤 했어요.

강씨는 "아고라와 아프리카TV를 몰랐다면, 사람들이 연행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거리에 나와 방송을 해보자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라며 "그해 여름 1인 미디어가 이런 거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강씨도 인터넷 생중계에 도전했다, 처음 장만한 장비는 웹캠이 달린 노트북과 인터넷 연결을 위한 와이브로 모뎀이 전부였다. 노트북의 웹캠으로 현장을 중계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화면을 보여주는데 제약도 많았지만 어찌되었건 현장을 중계하는 짜릿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강씨는 지금도 현장중계를 하면서 끊임없이 네티즌과 대화를 한다. 현장을 설명하고 네티즌의 궁금증에 답해준다.

4대강 문제가 불거지고 이포보 공사현장을 찾았을 때다. 공사에 찬성하는 쪽 주민들이 현장을 중계하던 강씨에게 폭력을 행사해 노트북이 떨어지고 카메라가 망가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혼자 활동하다보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작년 여름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가 시작됐을 때 저도 부산에 내려갔어요. 비가 많이 왔는데 거기서 어렵게 장만한 캠코더를 잃어버렸어요. 와이파이 기능이 들어있던 거라 바로 아프리카TV 생중계가 되고, 제가 쓰기에 딱 좋아서 누가 주신건데 이틀만에 잃어버린 거죠"

당시 현장에선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가 빗속에 경찰에 행진 보장을 요구하다 탈진상태에서 최루액을 맞고 응급실로 실려가는 일이 발생했다.

"저도 옆에 있었지만 이정희 의원이 실려갔다는 건 모르고 있었죠. 그런데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 누군가 제 카메라를 막 빼앗는거에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빼앗길 수밖에 없었죠. 얼굴도 기억 못해요. 그 자리에서 카메라 돌려달라고 돌아다니고 트위터에도 올리고 했는데 결국 못찾았죠. 경찰은 아니어도 무슨 이유에선지 영상을 못찍게 하려던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강씨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아프리카 TV 시청자 등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똑같은 새 캠코더를 장만할 수 있었다.

"카메라 잃어버리고는 울고 다녔어요. 카메라 없으면 방송도 못하는데... 주위에서 트위터에 글을 올려주셨어요. 희망버스때 카메라 분실했다고. 그걸 보고 아프리카 시청자들이 5만원씩 10만원씩 보태줘서 지금 이 카메라를 장만하게 됐죠"

이 아줌마가 4년 동안 현장을 뛰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강씨는 "이 나라 민주주의가 무너지는구나 하는 마음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며 "그런데 지금은 더 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다"고 안타까워 했다.

강씨에게 사회운동 경험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아이들 잘 키울 생각만 했던 엄마였다. 강씨는 "보수정당, 전두환, 이승만 등에 대한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직접 행동을 하진 않았고 그저 먼발치에서 보기만 했다"고 말한다.

강씨는 2008년 촛불집회를 겪으면서 현실과 현장의 괴리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저는 분노한 상태였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보면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며 "신문 방송에 보도는 많이 됐지만 왜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이런 행동들을 하는 지 많이들 모르더라"고 말했다.

4년 동안 생중계 장비도 꾸준히 업그레이드 됐다.


인터넷생중계 중인 강동진씨 
현장에서 인터넷 생중계 중인 안탄테 사랑


처음엔 노트북에 와이브로 꽂아 웹캠 중계를 했는데 2008년의 일이다. 하다보니 웹캠의 한계를 느끼게 됐다. 때에 따라 아니 수시로 클로즈업도 필요했다. 그러자면 캠코더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소니카메라와 TV수신기로 광주 전남도청을 지킨다고 방송을 했었다. 그땐 노트븍과 캠코더 외에도 배터리와 연결선까지 챙겨다녀야 해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강씨는 "지금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업그레이드 한 장비가 지금 쓰는 와이파이 캠코더와 삼각대의 조합이다. S사 캠코더가 아프리카TV로 직접 생중계할 수 있는 모델을 출시했는데 1인 생중계 시스템으로는 적당했다.

중계 처음할 때는 흥분한 상태로 멘트를 하곤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는 차분히 설명하는 식이 됐죠.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때만 해도 대열 맨 앞에 서서 방송을 하곤 했는데, 카메라 잃어버린 뒤로는 자꾸 대열 뒤로 가게 되더라구요. 경찰 물대포가 등장하면 우산으로 가리게 되고. 이제 이 카메라마저 없으면 방송을 못한다는 생각에 몸을 좀 사린 게 사실이에요"

앞서 밝혔듯이 강씨는 두 아들을 둔 주부다. 2008년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은 고등학생이 됐다.

"엄마로서 좀 미안하죠. 고등학교만 나와도 잘사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얘긴 하는데 나가서 하는게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거 아니냐는 얘기 듣기도 해요. 누군가는 아이들도 못챙기면서 밖에서 그러느냐고 할 수도 있는데, 생각해보세요. 내가 돈이 많은 부자도 아니고 아이들 대학가면 반값등록금도 아니고 한학기 5백만원씩 되는 돈을 도저히 댈 수 없어요. 이런 사회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이 어디가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요.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해고되는 그런 세상을 물려줄 수 있나요 그런 생각으로 4년 5년 온거라고 봐요"

강씨는 "지난 5년을 돌아보면 국민들의 힘으로 막은 것도 많지만 그렇다고 크게 해결된 것도 없어 보인다"고 회상했다. 그는 "촛불로 잘못된 정책들을 많이 막았지만 사실 국민들이 이만큼 했으면 나라가 뒤집어질 만한 상황도 많은데 이 나라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누군가 그러겠죠. 네가 그렇게 고생해서 한게 뭐냐고. 하지만 누군가는 방송을 하고 투쟁하고 촛불을 들어서 이정도 버티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위안을 삼아요"

2008년 2009년 지난 해 한미FTA상황까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거리로 나섰던 강씨. 하지만 요즘은 그게 쉽지 않다. 현실적인 여건도 안되고 또 중계하러 나간다고 누가 돈 주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좋아서 택한 일이었다. 지금은 중요할 때 그리고 정말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판단해서 챙기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챙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거리에서 어깨에 배낭을 메고 한 손에 캠코더와 삼각대를 들고 현장중계를 하는 작은 체구의 여성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눠보자.

                                                                                              민중의 소리, 김도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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