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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 만들어야

유영안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1/11/29 [23:21]

다시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 만들어야

유영안 논설위원 | 입력 : 2021/11/29 [23:21]

 

다시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 만들어야

 

혹시 ‘개천에서 용 난다.’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아마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자주 들어 친숙한 반면에, 요즘 청년들은 그게 무슨 말이지? 하고 고개를 갸웃할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란 속담은 가난한 시절,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나는 자식들에게 용기를 주는 메시지였습니다. 부모들은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는 자식에게 흔히 “개천에서 용난다.” 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하였지요.

 

또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 사업에 크게 성공해도 “개천에서 용났네?” 하며 축하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개천에서 용 난다‘ 란 말은 가난한 집 아이들에겐 희망의 메시지였던 셈입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으로 조정에 진출하거나 지방 관리가 될 수 있었지요. 물론 이때는 신분 제약이 심해 양인 이상이어야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장원급제는 출세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분제도가 철폐된 후, 그러니까 현대에 와서는 과거시험 대신 사법고시가 ‘개천에서 용 나’는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요. 가난한 집의 자식들이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고시원이나 절로 들어가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장면을 쉽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공무원 준비생이 차지한 신림동 골목은 전엔 사법고시 준비생들로 가득했습니다. 한 평도 안 되는 골방에 앉아 두꺼운 법전을 외우고 또 외우고 했지요.

 

그뿐인가요, 깊은 산속에 있는 절에 가면 예외 없이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청년들이 몇 명씩 보였습니다. 마치 그 모습이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수도를 닦는 모습 같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법고시가 폐지되고 로스쿨이 그것을 대신하자 신림동에도 절에도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등록금이 비싼 로스쿨은 부잣집 자녀들이 차지해 ‘개천에서 용 난다’란 말도 전설처럼 되어 버렸지요.

 

알려졌다 시피 이재명 후보는 고향이 경북 안동으로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3세 때부터는 지금의 성남시로 이사해 공장을 다니며 주경야독을 하였습니다.

 

중학교도 가지 못하고 공장에 다니던 이재명은 공장에 다니다 프레스기에 눌려 팔이 비틀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재명은 희망을 잃지 않고 검정고시를 준비해 중앙대학교 법과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재명은 출세가 보장된 판사, 검사를 마다하고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계기가 바로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합니다.

 

대학 시절, 이재명은 5.18이 불순분자들이 일으킨 폭동이 아니라, 전두환 군부독재에 저항한 민주화 운동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인간 이재명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했습니다.

 

그 후 이재명은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걸으며 약자, 노동자, 서민들의 억울한 사정을 변호해 주는 역할을 했고, 세상을 한번 바꾸어보자는 생각으로 성남시장 선거에 뛰어들어 행정가가 되었습니다.

 

당시 성남시는 전 시장의 무능과 부패로 빚만 수천억일 정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재명 시장은 과감하게 시정을 개혁해 빚을 청산하고, 교복 무상, 청년 기본급 지금, 산후 조리원, 성남 의료원 등을 설립해 성남시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성남시 분당 하면 강남 못지않은 부유한 지역이지만 시민들은 이재명 시장의 실력과 실천 그리고 실적에 박수를 보내주었고, 이재명 시장은 재선을 거쳐 급기야 1400만 도정을 다루는 경기도 지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기자가 “왜 성남시 학생들에게 교복을 무료로 나누어주었지요?” 하고 묻자 이재명 후보는 눈시울을 적시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때 공장에 다니다 멀리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친구들을 보았는데,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 가 없었습니다.”

 

기자가 또 물었습니다. “왜 성남시 청년들에게 기본금을 주었지요?” 이재명 후보가 말했습니다. “그때 청년들에게 기본금이라도 주었다면 공장에서 일하며 공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제 팔이 프레스기에 눌려 비틀어지지도 않앴겠지요.”

 

기자가 또 물었습니다. “왜 성남시에 산후조리원을 짓고 의료원을 지었지요?” 이재명 후보가 대답했습니다. “생명이 탄생하는 데도 불평등이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산후 조리원을 지었고, 성남 의료원을 지었습니다.”

 

이렇듯 이재명 후보가 실천한 시정 속에는 그의 아픈 어린 시절이 투영되었고, 그것이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여 오늘 날 집권여당의 대선 후보가 되게 한 것입니다. 드디어 ‘개천에서 용이 난 것’입니다.

 

흔히 대선 후보를 평가할 때는 그가 걸어온 길, 도덕성, 소속된 당, 인물의 능력, 그동안 약속한 공약의 실천 등을 보고 지지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공감이지요. 공감이란 동질감의 다른 표현입니다. 공감과 동질감은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후보가 걸어온 길에 진정성이 있어야 발휘되는 감정의 작용입니다.

 

이런 것이 작용해서일까요, 매주 실시되는 ‘매타버스 전국 투어’ 때 이재명 후보에게 보이는 국민들의 환호는 정말 뜨거웠습니다. 단순한 지지가 아니라, 인간 이재명을 응원하러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이재명 후보는 대구서문시장, 울산중앙시장, 마산어시장, 부산, 경남 사천, 거창을 거쳐 대전, 논산, 보령, 아산, 순천, 여수, 광주, 나주 등을 방문했는데, 가는 곳마다 구름관중이 모여들어 “이재명!”을 외쳤습니다.

 

물론 대선 때 후보가 오면 어느 정도 흥분된 분위기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나 시장, 거리에서 보인 시민들의 반응은 단순히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공감이나 동질감이 아니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최근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이재명 후보가 과거 친인척의 살인사건을 변호했다며 이재명 후보의 이미지에 치명타를 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비록 살인자라 할지라도 변호사가 변호를 하는 것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으며, 더구나 변호사인 이재명 후보가 친척의 일을 돕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후보 본인은 물론, 장모와 처까지 수십 가지 비리 의혹에 휩싸여 있는 쪽에서 과연 이재명 후보를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요? 소위 ‘본부장 비리’는 다 열거하기도 벅찰 정도입니다.

 

비판이란 자신이 그 분야에서 정말 떳떳하고, 걸어온 길이 정의로웠을 때 비로소 얻어지는 감정의 작용입니다. 자신과 가족은 온갖 불법을 저질러도 기소도 되지 않고, 소송이 걸려도 다 승소하고 오히려 피해자가 감옥에 간다면 누가 그걸 공정하다고 말할까요?

 

일본이 우리에게 경제 보복을 가해와도 일본 편을 들며 정부를 비판하고, 전쟁을 끝내고 평화로 가자는 국민들의 염원을 배반한 채 종전선언까지 반대하는 후보가 과연 나라를 제대로 이끌 수 있을까요?

 

주 120시간 노동을 하라 해놓고,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나 한다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겐 부정식품이라도 먹게 해야 한다는 후보가 과연 노동자와 서민들의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광주시민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죽인 전두환이 정치는 잘 했다 하고, 비판이 일자 ‘개 사과’ 사진을 올린 후보가 과연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을까요?

 

선거는 최선을 선택하되, 최선이 없으면 차선, 차선도 없으면 최악이라도 피하는 행위입니다. 비록 이재명 후보가 조금 흠이 있더라도 최악의 후부가 대통령이 되는 일은 막아야 합니다.  

 

시 한 편을 소개하면서 가난하고 외롭고 소외된 사람에게 ‘톱밥 한 줌’ 던져 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에게 투표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제 다시 ‘개천에서 용이 나와’야 합니다.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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