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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상 "고문치사 박종철 열사, 의료과실 사망으로 남을 뻔"

황희석 "종철이 형이 준 덤으로 사는 삶 뭐가 아쉽겠는가! 검찰개혁, 언론개혁, 국회개혁 갈 데까지 가보자"

정현숙 | 기사입력 2020/06/11 [14:12]

오연상 "고문치사 박종철 열사, 의료과실 사망으로 남을 뻔"

황희석 "종철이 형이 준 덤으로 사는 삶 뭐가 아쉽겠는가! 검찰개혁, 언론개혁, 국회개혁 갈 데까지 가보자"

정현숙 | 입력 : 2020/06/11 [14:12]

박종철 열사 최초 검안의 오연상 교수 "평상에 누워있던 젊은이.. 안 잊혀져"

 

황희석 열린민주당 최고위원이 10일 신림동 녹두거리에 '박종철 벤치'를 설치하는 제막식을 가졌다. 황희석 페이스북


10일 오연상 전 중앙대 교수가 박종철 열사의 사망 장소가 고문치사가 자행된 남영동 대공분실이 아닌 중앙대병원 응급실이 되어 의사들의 과실로 인한 의료 사망으로 뒤집어 쓸뻔한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87년 1월 15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사망'이라는 각 언론사 호외가 나왔다. 이날 오후 이 기사 내용의 사실을 확인하는 기자들에게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그동안 숨겨오던 박종철(21세, 서울대 언어학과 3년) 군의 사망 사실을 처음으로 시인했다.

 

배석했던 치안본부 박처원 대공담당 5차장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라고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하는 유명한 망언을 남겼다. 당시 수사관들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박 군을 숨지게 하고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은폐 조작했다.

  

오 전 교수는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당시 각 신문에 난 그 대학생, 고 박종철 열사를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것을 굳히게 했던 최초 검안의였다. 그가 33년이 지난 지금 “그런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라며 그날의 남영동 대공분실을 다시 떠올렸다.

 

그는 이날 tbs라디오 ‘김지윤의 이브닝쇼’에 나와 “남영동 대공분실 형사가 우리 병원 응급실에 와서 조사를 받던 학생이 상태가 매우 안 좋으니까 와서 왕진해달라고 요청을 했다”라고 서두를 뗐다.

 

오 전 교수는 “병원 앰뷸런스를 타고 남영동으로 갔는데, 보통 건물이라면 정문이 있어야 되는데, 정문이 없었다”라며 “함께 앰뷸런스를 탔던 형사가 무전을 하니까 미국 드라마에서나 보는 것처럼 벽이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열렸다”라고 기억했다.

 

그는 “조사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정면에 욕조가 눈에 들어와 조사실에 왜 욕조가 있나 싶었는데, 오른쪽 평상 위에 내가 진료를 해야 할 젊은이가 누워있었다”라며 “머리 감은 사람마냥 물에 다 젖었었다. 바닥에도 물이 흥건했고, 몸에도 물인지 땀인지 구별이 안 되는 액체가 많이 있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3초 정도 상황을 살펴봤는데, 눈에 빛을 비추면서 동공이 커지나 작아지나 봤는데 반응이 없었다”라며 “(동공이) 완전히 다 열렸고, 호흡도 없고, 심장도 뛰지 않았다. 이건 분명히 사망이었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생이 안 됐다"라며 '30분쯤 지나 사실상 소생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고, 아주 운 좋게 소생이 된다 하더라도 뇌손상이 거의 다 와서 생명만 연장될 뿐 의식은 돌아오기 어려운 상황이 와버렸다”라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사망이라고 말하려던 찰나 나이 많은 형사가 중앙대병원 응급실로 옮겨 전기 충격기를 한 번 시도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이야기했다”라고 했다.

 

오 전 교수는 “그걸로 소생될 가망이 거의 없었고, 응급실에 가서 심폐소생을 하게 되면 사망 장소가 바뀌는 문제도 있었다”라며 “병원에서 의사들이 진료를 잘못해서 사망했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고,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사망했다는 정보가 차단돼 버릴 수도 있었다”라고 했다.

 

그래서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오 전 교수는 응급실장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도착하니까 하늘의 도움인지 원장님, 진료부장님 등이 점심을 드시다 다 정문으로 내려왔다”라며 “대여섯 명이 내려와 인간 방패를 쌓고 차를 못 들어오게 막았다”라고 회고했다.

 

황희석 '내 삶은 형한테 빚진 삶'

 

한편 황희석 열린민주당 최고위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박종철과 나'라는 제목으로 2개의 글을 게시했다. 자신이 박종철 열사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2학년이던 1986년 8월경으로 지금은 없어진 성동구치소에서 출소했을 때였다고 같이 민주화 운동을 했던 엄혹했던 그 시절을 회고했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박종철 열사가 뛰놀던 바로 그 골목길에서 신림동 녹두거리에 박종철 벤치를 설치하는 제막식을 가졌다"라며 사진도 함께 올렸다.

 

그는 "33년 전 오늘부터 국민들은 6.10 민주항쟁에 나섰던 것"이라며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들 삶이 누군가에게 빚진 것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라고 자신은 '박종철 열사에게 빚진 삶'이라고 고백했다.

 

황 최고위원은 "종철이 형한테 하고 싶은 말을 적어달라고 해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내 삶은 형한테 빚진 삶'이라고"라고 했다.

 

그는 "1987년 1월 14일 지금의 경찰청의 전신인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선배의 소재지를 대라며 고문하는 경찰에 의해 종철이 형이 사망한 지 약 1달 뒤 신당동 닭장 하숙방에서 나도 선배 소재지를 대라며 경찰에 끌려가서 이틀 동안 얻어터지고 걷어차이는 고문을 당했다"라고 어두운 기억을 꺼냈다.

 

이어 "(음... 당시 대공3계장은 왼손잡이에 부모가 월남한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런데 그 당시에는 느끼지도 못했고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경찰들은 나를 때리고 나에게 어퍼컷을 날리고 발로 걷어차기는 했지만, 물고문이나 전기고문 같은 그 이상의 극악한 고문을 하지는 않았다"라고 했다.

 

더불어 "그것은 내가 그런 고문을 당할 정도의 급이 높은 사람이 아니었기도 하지만, 주된 이유는 바로 한 달 전 종철이 형이 고문으로 사망하고 그것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이어 "한마디로 나는 종철이 형 때문에 살았거나 하다못해 심한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가 내 삶이 종철이 형한테 빚진 것이라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황 최고위원은 "덤으로 사는 삶이니 뭐가 그리 아쉽겠는가!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마음도 종철이 형이 준 선물 같은 것"이라며 "검찰개혁도 언론개혁도 국회개혁도, 갈 데까지 가보자. 가다 못 가면 간 것만큼 간 것이고, 다음 사람이 우리를 밟고 가는 것이 이 길이지 않을까!"라고 글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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