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전 여성까지 글을 읽게하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의 민족자주정신과 민본주의

정현숙 | 입력 : 2018/10/09 [11:03]

오늘은 오백일흔두돌 한글날...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인 한글 창제의 뜻

▲ 한글을 창제한  뜻을 밝힌 훈민정음의 일부 국보 제 70호 /  출처 : 문화재청

 

이 넓은 세상에는 약 3천개의 민족이 7천개의 말을 쓰고 있지만 글자는 40개뿐이고, 우리나라처럼 스스로의 말과 스스로의 글을 모두 가진 민족은 극소수다. 뿐만아니라 누가·언제·왜·어떻게 만들었는지가 확실한 것은 한글이 지구상 유일하다고 볼 수 있어 정말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북한에서는 '조선글날'이란 이름으로 1월 15일 날짜도 다르게 기념하고 있다. 한글을 만든 시기와 반포한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한글날은 반포한 날, 북한의 한글날은 글을 만든 창제일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을 꼽으라면 단연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이 꼽힌다. 그의 최대 업적으로 손꼽히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유산으로 손꼽히며 창제일은 매해 10월9일 '한글날'로 기념하고 세종대왕의 탄신일은 매해 5월15일 '스승의 날'로 기념한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에게 한글 창제는 단순히 새로운 문자 하나를 보태는 문제가 아니었다.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사안이었다. 그랬는데도 반대 진영의 핵심인 중국을 끔찍히 신봉했던 대표적 사대파 학자 최만리조차 한글의 신통함과 오묘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한글 예찬론자 중 한 명인 미국 메릴랜드대학의 로버트 램지 교수는 한글의 창제 목적과 관련, “문자 해독 능력이 기득권층인 양반에 위협이 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평민은 물론 가장 권익이 낮았던 여성들까지 600년 전에 글을 읽게 하려 했다는 점에 한글 창제의 보편적인 의미가 있고, 인간 지성의 두드러진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대왕은 일반 민중이 글자 없이 생활하면서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음을 마음 아프게 여겼다. 그들 민중은 관청에 호소하려 해도 호소할 길이 없었고, 억울한 재판을 받아도 바로잡아 주기를 요구할 도리가 없었으며, 편지를 쓰려고 해도 그 어려운 한문을 배울 수가 없었다. 또한, 농사일에 관한 간단한 기록도 할 방법이 없었다.

 

세종은 백성들의 이러한 딱한 사정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던 성군으로, 주체성 강한 혁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한문은 남의 글이므로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더라도 매우 어색하여 뜻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었다.

 

세종의 주도하에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하여 만든 한글의 창제동기는 〈훈민정음〉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른 데도 중국글자를 쓰므로 불편한 점이 많아 우리말에 맞는 새 글자를 만든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세종의 강한 민족자주정신의 나타나 있다. 둘째,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글자를 배워 문자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다고 했으니 세종의 민족자주정신과 민본주의를 읽을 수 있다.

 

세종대왕은 사실 한글 창제 등 문화 뿐만 아니라 군사분야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바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포병(artillery)' 이란 독립된 병과를 만든 것이다. 한국사에서 화약을 이용한 대포가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인 1377년, 화통도감이 설치된 이후로 알려져 있지만, 이후 70여년 가까이 지나도록 포병이란 개념은 따로 없었다.

 

당시까지 전 세계적으로 대포는 제한적으로 운용됐고, 주로 보병부대에 소속된 일부 공병들이 공성전에서 고정포대를 설치, 성곽이나 누각 등 고정된 적의 주둔지를 향해 포격하는데 쓰일 뿐이었다. 세종대왕 때인 15세기 중반 시작된 이 포병의 탄생은 이후 150여년 뒤 발생한 임진왜란에서도 조선군이 초전의 패배를 딛고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세종대왕이 즉위 후 계속 밀어붙인 강력한 북방정책 역시 이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때 정착된 조선의 포병은 150여년 뒤 발생한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했다. 포르투칼에서 들여온 개인화기인 조총을 제외하면 화기가 크게 발달하지 못한 왜군은 조선군의 다양한 화약무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10배가 넘는 대군으로도 참패한 행주대첩, 몇십배에 이르는 병력차에도 결국 함락에 실패했던 진주성 싸움, 이순신 장군의 기적의 승리로 알려진 명량대첩 등에서 조선의 대포는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또한 세종대왕은 우리 민족에게 압록강과 두만강의 가장 북쪽 유역에 4군 6진을 두고 그곳에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해 북방 영역까지 우리 땅으로 굳히게 했다. 시대상으로 봐서 감히 엄두도 못냈음은 물론 깨치기도 너무 어려운 한문으로 문맹이 대부분이었던 조선의 여성과 평민도 한글로 자기 생각을 남길 수 있도록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한글로 민족의 얼을 지키게 한 혜안의 선각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나라를 위한 수많은 업적과 함께 눈병에 시달리면서도 한글의 문자 체계를 설명한 '훈민정음'이 세종대왕이 몸소 만든 것이라는 알고 있는 국민은 10명 중 2명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 우려가 되고 있다. 한글문화연대가 여론조사회사 리얼미터에 의뢰해 9월 13~14일 전국의 성인 남녀 1002명을 조사한 결과다. 

 

'세종대왕이' 몸소 만들었다'고 답한 사람은 17%에 그쳤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가 함께 만들었다고 아는 응답자는 절반이 넘은 55.1%로 나타났다. 세종대왕은 지시하고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고 아는 사람도 24.4%나 됐다.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3.5%였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눈병에 시달리며 직접 창제한 것으로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의 가르침과 지시에 따라 한글 안내서인 훈민정음 해례본 집필에만 참여했다. 집현전 학자들은 글자 '훈민정음'이 아닌 제목이 '훈민정음'인 책을 편찬한 것 뿐인 것이다.

 

이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세종 서문'과 '정인지 서문', 1443년 12월 제작된 '세종실록' '동국정운'에 실려 있다. 한글 반포를 반대한 집현전 학자 최만리의 상소문에도 세종대왕이 몸소 만든 것으로 나와 있다.

 

한글문화연대는 또 한글 창제자 왜곡의 주요 원인으로 초중·고 역사 교과서를 들었다.

"한국사를 가르치는 초등 5학년 사회 국정 교과서,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검인정 교과서 대부분이 한글 창제의 주역을 엉뚱하게 적었다"며 "이런 교과서에 바탕을 두고 편찬한 참고서, 참고 사전 등이 인터넷에 올라가 있어 잘못된 인식을 더 부추기고 퍼뜨린다"고 짚었다.

 

한글문화연대가 중·고교 검인정 교과서를 조사한 결과, 25% 정도만 세종이 직접 한글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과 집현전 학자가 공동 창제했다고 소개한 교과서가 62%나 되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한글 창제 주역을 세종이라고 믿지 않는 순간, 세종의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을 믿을 수 없게 되고, 세종의 애민 정신과 당대 업적을 모두 불신하게 된다"며 "그래서 한글은 문창살을 보고 만들었느니,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가림토 문자를 베꼈다느니, 파스파 문자와 같은 외국 문자를 모방했다느니 억측까지 일어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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