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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맺힌 가슴을 달래준 진정한 선구자”

<박상규 작가의 연변기행> '천재시인 윤동주 생가를 찾아'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0/11/07 [16:52]

“한맺힌 가슴을 달래준 진정한 선구자”

<박상규 작가의 연변기행> '천재시인 윤동주 생가를 찾아'

서울의소리 | 입력 : 2010/11/07 [16:52]
▲ 윤동주 시인이 수학했던 대성중학교. 지금은 용정제일중학교로 개명 <포토 소정현>  

4일차, 우리 일행은 다시 전날 백두산의 여운을 뒤로하고 우리민족의 대표 민족 시인이자 천재시인 윤동주의 생가를 찾아 출발하였다. 

사실 나는 윤동주의 생가와 묘소가 이곳 연변에 있는 줄도 몰랐기에 이곳 연변을 이번기회에 잘 왔구나 하는 생각과 글을 쓰는 나로서는 교과서에서만 보왔던 윤동주의 생가를 방문하는 것은 나에게 큰 의미와 설레임으로 다가왔다. 

우리 일행은 연길에서 약40분을 달려 용정시 명동촌이라는 시골마을에 도착하여 윤동주 생가를 방문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의 어느 시골마을과 다를바 없는 야산과 산밑으로 자리잡은 들녘은 마치 한국에 와있는 것 같은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 아름다운 농촌의 풍경이 윤동주 시인의 시상을 일깨워 주고 우리 민족의 가슴에 아리도록 아름다운 시를 남겼나 보다. 

 
▲ 일행은 연길에서 약40분을 달려 용정시 명동촌이라는 시골마을에 도착하여 윤동주 생가를 방문. <포토 소정현>  

윤동주 생가, 말로만 듣던 천재 시인의 생가는 1900년경 조부께서 기와집으로 지었지만 이사간 후 다른 사람에게 매매되어 허물어졌고 다시 1994년도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당시의 북간도의 조선동포들이 이주하여 살았던 주택의 구조와 난방방법을 볼 수 있었고 생가 옆으로 윤동주가 태어나고 자랐던  명동학교 시절의 유물 등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일제의 암흑기에 머나먼 북간도에서 태어나 조국의 운명과 함께한 윤동주. 민족시인, 천재시인이라고 하였지만 28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의 차가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원인을 알수 없이 죽었다고 한다. 

비록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우리곁을 떠났지만 그의 흔적은 우리 곁에 아니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더욱 활활 타오를 것을 확신하며, 당신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에 일궈놓은 저 차가운 북간도에서 일제의 탄압과 점령의 시대를 살아온 당신과 당신들의 동포인 우리 민족을 생각해 보게 된다. 

 
▲ 윤동주 생가 내부의 윤동주시인의 기념관 <포토 소정현>  

 
윤동주의 묘소는 생가 인근에 있었지만 차로 접근할 수 없고 비포장 길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 관계상 돌아보지 못하였는데 윤동주의 영면뒤 해방이후 가족들의 북간도로 부터의 이주와 사망, 상당기간 중국과의 미수교와 이로 인한 무관심 등으로 부끄럽게도 연길의 일본인 교환교수가 윤동주의 묘소를 찾았다고 한다.  물론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어쩔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모두 부끄러워하고 마땅히 책망 받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윤동주, 그 시대의 등불임과 동시에 우리시대의 진정한 영웅이기에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영원이 잊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보며 암흑기에 우리 족에게 아름다운 언어로 우리의 한 맺힌 가슴을 달래준 진정한 선구자 임을 다시 한번 생각 본다.

 
▲ 윤동주 생가에서 필자!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조국과 운명을 같이한 그의 짧은 생애를 보면서 삶의 깊이는 결코 세월의 길고 짧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생생히 감지할 수 있었다.  <포토 소정현>  

 
생가를 방문하면서 느낀 것은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조국과 운명을 같이한 그의 짧은 생애를 보면서 삶의 깊이는 결코 세월의 길고 짧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며, 우리 민족의 아픈 마음을 아름다운 언어로 승화시키고 재탄생시켜 주옥같은 글로 우리 곁에 머물게 하였듯이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영원히 고이 간직하며 살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일행은 윤동주 생가와 더불어 같은 마을에 문익환 목사의 생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시대에 까지 기독교계와 우리사회에 큰 족적을 남긴 재야운동가 문익환 목사의 고향도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고 문익환 목사가 우리세대까지 생존해서 큰 발자취를 남기었기에 천재시인 윤동주의 짧은 생애는 우리에게 많은 아쉬움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우리는 윤동주 생가를 방문하고 오는길에 그가 다녔던 학교를 방문하였다. 당시에는 대성중학교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용정제일중학교로 현제도 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있는 곳이다.

학교 앞에는 윤동주 시비가 있고 2층에는 기념전시관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기념관에는 윤동주를 비롯한 일제 암흑기의 독립운동 사료와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일제 암흑기의 사료들을 보면서 나라 잃은 슬픔과 서러움이 무었인지 알수 있었고 다시는 이런 비극은 되풀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좀더 자세한 글과 기록들을 보고 싶었지만 일행들과의 일정 때문에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만 했지만 그날의 여운은 내 인생에 있어서 잊지 못하는 날로 기억될 것이다.

 
▲ 우리 일행은 다시 발길을 돌려 용정시 인근에 있는 일송정이 있는 야산을 올라갔다.  일송정 옆으로 흐르는 해란강과 용정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정상에서 우리 일행은 ‘선구자’를 불렀다.  <포토 소정현>  

우리 일행은 다시 발길을 돌려 용정시 인근에 있는 일송정이 있는 야산을 올라갔다.  일송정 옆으로 흐르는 해란강과 용정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정상에서 우리 일행은 ‘선구자’를 불렀다.  독립운동가 들이 이곳에 모여 나라를 잃은 설움을 달래고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의지를 불태우던 역사의 현장에서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였다.



마무리 하면서 

▲ 박상규 칼럼니스트
나는 이번 연변 문학기행을 통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며 내가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를 알게해준 말그대로의 느낌 여행이었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해외 여행을 하는 것이 처음이었고 모든것이 낯선 여행이었지만 한국을 떠나기전의 회의적 여행이 너무 뿌듯하고 멋진 감개무량 여행으로 바뀐 아름다운 그리고 의미 있는 여행이었으며 연변 문학단체의 따뜻한 환대와 문학에 대한 열정이 나를 감동시켰고 곳곳에 문학과 역사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기회였다.

이 지면을 빌어 지난 8월중 해외문화교류를 위한 연변 방문시 행사준비와 진행을 위해 4박5일 동안 함께하여 주신 집행부와 문학회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내년에 한국의 답방을 통하여 더욱 우의를 다지고 양국 간의 문학을 통한 아름다운 만남에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연변문학 기행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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