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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선거혁명으로 루비콘강을 건넜으나 카이사르가 안 보인다

공적사명에 투철한 용감한 진보 정치지도자의 출현을 염원한다 

권혁시 칼럼 | 기사입력 2016/05/26 [15:25]

4·13선거혁명으로 루비콘강을 건넜으나 카이사르가 안 보인다

공적사명에 투철한 용감한 진보 정치지도자의 출현을 염원한다 

권혁시 칼럼 | 입력 : 2016/05/26 [15:25]

거듭하여 언급했듯이 우리나라는 지금, ‘총체적 난국’(crisis management)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국가관리의 위기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16년 전, IMF 경제위기에 버금할만큼 공포와 두려움이 서서히 증폭되고 있다. 그 주된 원인은 사회정의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 무원칙하고 부조리한 정치·경제의 문제이며, 원흉은 그에 기생하며 사리사욕에 눈멀어 부패하고 타락한 소수의 주류 기득권자들, 상위계층이다. 특히 정치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므로 위정자들의 책임은 더없이 크고 무거우며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지난 4·13총선은 이렇게 무도·불의하고 무능하며 부패한 정치세력을 엄중하게 심판한 위대한 국민의 ‘선거혁명’이었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말로는 그 지엄한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겸허하고 결연하게 다짐하는 듯싶었지만, 지금까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대통령은 의외의 참담한 선거패배, 즉 정권심판에 나섰던 분노한 민의를 의식하여 마지못해 인사개편을 했으나 제스처일 뿐 국정쇄신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정치개혁을 간절히 바라는 국민의 목소리는 마이동풍이 된 듯하다.  

 

더 기가 막힐 노릇은 석고대죄는 물론 참회록을 써도 시원치 않을 정부여당이 목불인견, 패거리 싸움질을 서슴지 않은 것이다. 김용태 의원은 “정당 민주주의는 죽었다. 국민의 뜻을 모아 싸우겠다”며 혁신위원장을 그만뒀는데, 언제부터 그렇게 민주주의를 위해 투신했는지 묻고 싶다. 게다가 정쟁을 일삼으면서 국민의 뜻을 내세우는 것은 아전인수이고  몰염치하기 짝이 없는 실언이다. 그리고 친박이 “나가주면 좋겠다”는 소릴 한다며 정두언 의원, 정진석 원내대표를 비롯한 인사들이 거취를 고민했다는 것이다. 정의화 국회의장 또한 제 3의 정치세력화(정당결성)를 위해 움직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정치파행과 국정실패의 책임을 통감하고 혼연일체가 되어 난국을 앞장서서 헤쳐 나가야 할 정부여당에서 오히려 파열음이 진동하니 그렇잖아도 좌불안석인 국민들은 더욱 불안하고 걱정이 앞선다. 야당 역시 다를 게 없다. 총선을 치르기도 전에 벌써 갈라져서 동력이 떨어져 무력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새누리당이 뒤늦게 계파해체를 선언했지만 분열현상은 ‘엎질러진 물’인 듯하며, 이렇게 국정주체가 본분을 망각하고 이전투구하는 사이 ‘경제위기’의 골은 깊어 질대로 깊어졌다. IMF환란 때 보다 더 위급한 경제위기의 시한폭탄(타임워치는 벌써 수년 전에 작동이 시작되었다), 그 재앙의 전조인 부실한 조선, 해운 업체를 구조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임을 정부여당은 물론 야당까지 이구동성으로 떠들어대며 뒷북을 치고 있지만, 애꿎은 약자들만 위기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이미 구조조정을 빙자한 인력감축(고용조정)의 한파가 부지불식 간에 업종을 가리지 않고 밀어 닥치고 있었다. 단지 무지,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치·경제의 주체가 이를 정확하게 인식, 감지하지 못했거나 문제의식이 결여된 탓에 표면으로 불거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조선, 해운은 말할 것 없고 중공업, 항공, 건설, 금융에 이어 잘나가던 자동차, 전자 산업마저도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비껴가지 않는 듯하다. 이렇듯 국가경제가 매우 급박하고 위중한 상황인데도 정부와 여야정당은 창조경제·4대부문구조개혁, 경제민주화·경제개혁, 경제의 중도화 등등, 개념도 분명치 않은 어설픈 공염불이 만병통치약(panacea)이라도 되는 듯 탁상공론만 되풀이 한다. 그렇게 말뿐인 대책만 내세우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실상을 잘 모르면 (왜곡된) 여론과 이데올로기의 허상, 그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오로지 파벌, 파당적 이기주의·기회주의에 사로잡히고 교만과 안일에 빠져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다. ‘인식·경청·선견지명’의 리더십이 확립될 수 없고, 따라서 관리능력은 물론 위기의 대응(response)이 제대로 이뤄질 리가 만무하다. 뿐만 아니라, 정치 마인드의 중핵인 보수와 진보의 개념을 명확하게 알 턱이 없고, 이도저도 분명치 않은 중도는 유명무실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도 어려울 터이다.

 

베이컨이 그의 논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관습의 강한 지속력은 혁신과 같이 난폭한 것이다” 힘없는 사람들에게 부과된 보수의 대가는 특권을 잃은 사람에게 부과된 혁신의 대가만큼 무거운 것이다(에드워드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이처럼 보수든 진보든 어느 것도 견지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이는 상호보완의 조건이지 대립, 갈등의 논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어설프고 섣부른 진보, 보수의 운운은 자가당착이며 몰지각의 소치다. 정치의 발전과 안정을 위해서는 반드시 확실한 보수, 진정한 진보를 명정하게 의식화하고 실행하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기득권 유지에 급급하여 변화의 관리와 개혁을 외면한 채 말로만 떠든다면 어떤 세력, 정파이든 ‘수구’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진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진보, 보수, 그도 아닌 중도로써 경제위기 극복과 복지증진을 말한다면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소득이 많아져야 인간의 행복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이스털린의 역설) 미국 민주당 경선에서 돌풍을 몰아가고 있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롤 모델로 삼고자하는 북유럽 복지국가의 대표 격인 덴마크 국민들이 행복한 비결도 소득이 전부이고 최고가 아니다. 그들의 행복 조건, 요소는 자유와 안정과 평등을 바탕으로 상호신뢰와 상부상조, 그리고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그것은 모름지기 그 나라의 ‘정치역량’이 바로미터이고, 정치의 막강한 힘은 온 국민의 정치적 관심과 참여, 그로부터 생성되는 정치 또는 정책의 철학으로부터 나온다. 그러한 까닭은, “철학은 기본원리를 제시하는 추상성을 보이지만 추상성이 구체성으로 더욱 확고해진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철학 속에 정책이 있고 정책 그 자체는 철학의 표상이라고 하겠다"(김형렬, ‘청책은 철학이다’)

 

 이렇게 미적거릴 우리나라의 상황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위정자와 공직자들은 정치·정책의 철학이 없지 않은가 싶다. 하물며 선거에서도 심도 깊고 진지한 정책대결이 없을 뿐 아니라, 정책공약이 말뿐인 공약(空約, 헛된 약속)이 되고마는 경우가 허다하니 더욱더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기대난망인 지경에서 달리 묘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이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부패한 정치·경제시스템을 뜯어고쳐 바로잡고, 파국에 이른 국정을 강력하게 이끌어 바로 세워 나갈 단 한 사람의 불세출의 선구자, 정치지도자가 나타나기를 대망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먼저 ‘정치혁명’을 실현하고 이에 기반하여 덴마크처럼 자유·안정·평등의 인프라를 구축하여 힘없고 가난하며 소외되었던 국민들이 행복하게 잘살 수 있는 복지국가를 이룩하여야 한다. 바로 이것이 정치가 추구하는 정책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4·13총선, 선거혁명을 통하여 위대한 국민은 한국 정치의 3분지계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천명(민의)으로써 우리나라는 정치의 ‘루비콘강을 건넜다’ 그런데도 용감하게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큰 소리로 외치며 분연히 나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가 보이질 않으니 안타깝다(시저는 제정, 곧 독재정치를 의심하는 공화제 옹호자들에게 살해되었으나 여론중시·민중본위·서민친화의 정치를 실행했고 그가 스스로 자인한 천부적인 자질과 능력을 발휘하여 로마가 대제국으로 가는 길을 낸 위대한 정치지도자였으며 뛰어난 웅변가, 문장가이기도 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버나드 쇼, 자작묘비명)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게 미적거릴 우리나라의 상황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누구이든 나라의 최고지도자, 대통령이 되겠다면 지금 바로 나서야 하며, 무엇보다 목숨을 건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리사욕을 끊는 멸사봉공의 사명의식과 불굴의 의지, 그 탁월한 리더십을 당당하고 패기만만하게 유감없이 드러내야만 할 것이다.

 

거침없이 막말을 쏟아내는 도널드 트럼프가 (어찌 생각하면 어이없게도) 미국 공화당의 차기 대통령후보로 거의 확정된 상태다. 미국 시민들이 정치지도자로서 큰 결함을 지닌 트럼프를 지지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사회적 약자’를 편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는 고착화한 모든 법칙과 관념, 특히 선거운동의 방식들을 여지없이 뒤집으며 깨뜨렸다. 그가 발 디디고 있는 공화당의 주류, 기득권 세력을 향하여 반기를 높이 쳐들었다. 자당의 정강정책에 정면도전하여 사회보장(미국은 소득보장의 ‘국민연금’(national pension)이 사회보장의 중핵이다), 그 제도 및 정책의 문제점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어느 누구도 언급한 적이 없었던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생계, 즉 ‘민생’에 관하여 그들 대신 말해준다. 적정소득(임금인하 반대), 노후소득보장(연금개혁) 등의 제반문제를 약자들의 편에서 명확하게 짚어 신랄하게 추궁한다. 어디 그뿐인가. 미국의 전쟁(개입) 무조건 반대, 금권정치의 강력비판 및 결사반대 등등, 중하위층 국민들의 막히고 쌓인 불만을 터뜨려주면서 가차 없이 공세를 퍼부었다.

 

그렇게 리더들은 고함을 치고 큰 소리를 지르는 법을 알아야 한다. 종종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어리석거나 낡아빠진 정책에 강력하게 항의하기 위해서다(그리해야 할 때 소심하고 비겁하게 이리저리 눈치나 보는 건 리더가 할 짓이 아니다). 자신의 열정을 드러내며 탁월성(excellence)에 전력투구하는 것이다. ‘대의’에 열정적으로 헌신하지 않는 리더는 타인으로부터도 헌신을 끌어낼 수 없다. 세상은 자신을 원하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그 길을 열어준다(로리 베스 존스, ‘최고경영자 예수 Jesus CEO’).

 

그런 면에서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도 트럼프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대권주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만이라도 샌더스를 닮고 드럼프의 장점을 본받았으면 한다. 부디 공적사명에 투철한 뛰어난 기질과 역량을 갖춘, 정의와 진보를 향하여 거침없이 나아가는 위대한 정치지도자가 출현하여 위기에 처한 국민과 나라를 구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권혁시 대한글씨검정교육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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