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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486의 알리바이

진보정치인들은 재벌에 의해 골목상권이 무너지는 걸 의제화하는 데 왜 그토록 오래 걸렸을까요?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5/07/21 [00:14]

복지, 486의 알리바이

진보정치인들은 재벌에 의해 골목상권이 무너지는 걸 의제화하는 데 왜 그토록 오래 걸렸을까요?

서울의소리 | 입력 : 2015/07/21 [00:14]

여의도는 486 세대의 전성기입니다. 보좌관들과 주요 당직자들은 이미 대세가 486 세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고 이제 곧 국회의원도 486이 주류가 됩니다.

 

2012년 19대 국회 개원시 민주통합당 의원들의 평균 연령이 52.8세였는데 이정도 평균연령이 유지된다면 2016년 20대 국회 개원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의 평균연령은 83학번 정도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대략 20대와 21대 국회가 수적으로 486 세대의 전성기가 되겠네요. 제가 하필 지금 486의 사상을 고찰하는 것은 단순히 여태까지 486 정치인의 공과를 평가하자는 게 아니라 486의 사상이 앞으로 진보 정치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486은 사상적으로 불행한 세대입니다. 젊은 시절에 믿었던 사상이 오래지 않아 파산하는 경험을 했거든요. 8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이 학생운동의 사상적 주류가 되고 노동운동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지금 젊은 세대가 보기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엄혹한 박정희-전두환 독재를 연속으로 겪으면서 단순한 민주화 요구로는 변화가 어렵고 보다 근본적인 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1980년대 유입된 레닌주의 및 주체사상과 만나면서 폭발적인 화학반응을 일으킨 것이지요. (NL 즉 민족해방 계열 가운데 주체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아 '비(非)주사 NL'이라고 불렸던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만 편의상 별도로 서술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은 파산합니다. 레닌주의의 파산은 1989년 동독과 1991년 소련의 몰락이 주된 계기가 되었고 주체사상의 파산은 1994년 이후 북한의 식량난으로 인해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벌어지고 탈북자들에 의해 북한 사정이 알려진 것이 주된 계기가 되지요.

 

486 학생운동 주류의 불행은 20대 시절 철두철미하게 믿었던 사상이 금세 파산했다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파산의 과정이 전혀 주체적이지 못했다는 게 더 큰 불행이었습니다. 치열한 실천과 학습과 고민을 통해 스스로 사상을 버리거나 극복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소련이 몰락하고 북한의 실상이 알려지는 등 '외부의 충격'에 의해 사상을 버릴 수밖에 없게 된 겁니다. 어찌 보면 사상을 박탈당한 것이죠.

 

 

이범, 교육평론가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

제가 알고 지내던 선배들 중에 이러한 박탈의 과정 끝에 삶의 방향을 크게 바꾼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소련판 철학교과서 학습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를 비판했던 선배들 가운데 지금 누가 봐도 보수 진영의 한복판에서 일하는 분도 있고, 저에게 주체사상 서적을 권유하다가 북한인권운동을 거쳐 새누리당에 들어간 하태경 의원도 있습니다. 

 

486 학생운동 주류 가운데 이러한 '전향'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길을 겪었을까요? 완전한 새출발을 지향한 경우(예를 들어 녹색당)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기존 사상을 고수한 경우(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전 의원 등), 기존 사상을 수선한 경우(대표적으로 사회주의에서 레닌주의를 빼낸 노동당) 등이 일부 있고 나머지 다수는 한마디로 '적응'을 합니다. 1980년대의 사상에서 체제변혁적인 요소를 털어내고 나머지 요소를 간직한 채 현 체제에 적응한 거죠. 그래서 자본주의 극복이나 혁명은 사실상 포기했지만 여전히 시장을 적대시하고, 노조에 친화적이며, 미국의 한반도 전략을 매우 경계하고, 남북간 평화협력을 최우선시합니다. 물론 개인별로 편차가 있긴 하지만요. 이런 점에서 야권 486의 사상은 아직 기본적으로 1980년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치관이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전혀 아닙니다. 뭐든 쉽게 표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감동을 주는 경우가 많잖아요? 정치적 지조와 일관성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상이 '업그레이드'된 것이 아니라 '잔존'하는 것이라면 정치이념으로서는 자격 미달입니다. 저는 야권 486이 보여준 무기력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상적 업그레이드 없이 잔존하는 사상으로 버틴 겁니다.

 

보수는 2000년대 엄청난 쇼크를 받고는 사상운동을 전개합니다. 1997년,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두 번 연속 정권을 내주고 2004년 총선에서 과반을 빼앗겼거든요. 선거 결과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2001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발족하고 2005년 친일 인사 명단 1차분 3천여명을 발표합니다. 2004년 육군사관학교 신입 생도들에게 설문조사를 해보니 우리의 주적(main enemy)이 누구냐는 질문에 '미국'과 '북한'이 거의 같게 나옵니다.(미국 34%, 북한 33%) 보수의 본질적 뿌리가 위협당한다는 절박한 위기감이 퍼집니다. 이 와중에 2004년 11월 자유주의연대가 출범하며 본격적으로 뉴라이트가 등장합니다.

 

원래 한국의 보수는 '친일'과 '독재'라는 지적 앞에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경제'와 '반공'을 중심으로 가치체계를 뒤집어 놓습니다. 이것은 때마침 나타나기 시작한 젊은 층의 자생적인 반북의식과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건국절 논란, 이승만·박정희 재조명, 교학사판 역사교과서 등이 이러한 가치 전도의 결과물입니다.

 

뉴라이트를 협소하게 이해하고 별거 아니라고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뉴라이트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그리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뉴라이트 '사상'은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무엇보다 이를 통해 보수는 매우 소중한 것을 되찾았거든요. 바로 '자신감'입니다. 과거 한국의 보수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한다는 자신감이 부족했는데, 뉴라이트 사상운동 이후 보수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도덕적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2000년대 이후 보수 정치 전체는 뉴라이트 사상의 영향권 안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면 진보는 사상운동 없이 1980년대 사상의 잔여물로 버팁니다. 사실 이 문제는 486만이 아니라 새정치민주연합이든 정의당이든 어디든 할 것 없이 대한민국의 범 진보정치 전체에 해당하는 얘기입니다. 업그레이드 없이 잔존하는 1980년대의 사상은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지요.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이해하고 반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사례를 들어볼까요?

 

진보 정치인들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급속히 증가하는데 이것을 포착하고 대응하는 데 왜 그토록 느리고 지지부진했을까요? 노동계급의 '단결'이라는 이념에 사로잡혀 노동계급의 '분화'(혹은 '분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진보 정치인들은 대형마트가 도시 한복판을 점령하고 골목상권이 속수무책 무너지는 걸 정치적 의제화하는 데 왜 그토록 오래 걸렸을까요? 노동-자본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습관이 자영업자 등 소자산계급(쁘띠부르조아)의 처지에 대한 관심과 공감을 방해했기 때문이지요. 진보 정치인들은 현대자동차의 품질·안전 문제로 인터넷이 들끓고 김부선씨가 '난방열사'로 등극해 열화같은 지지를 받는데 왜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걸까요? 자동차나 아파트관리비는 전형적인 소비자운동의 영역인데 소비는 생산보다 하위에 있다고 여겨지니 어딘가 손대기 꺼림칙해지는 겁니다.

 

정치인들이 민생을 립서비스로만 다루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보수 정치인이 그런 건 그렇다 치고, 진보 정치인이 민생 문제를 포착하고 대응하는 데 그토록 느렸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잔존하고 있던 1980년대의 사상이 비정규직이니 자영업자니 아파트관리비니 하는 것들을 모조리 주변화시켰던 것이죠. 그로 인해 보통 사람들이 진보 정치에게 기대하는 전통, 즉 약자의 편에 서고 차별에 반대하는 것과 진보정치인의 자기정체성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발생합니다. 진보의 의미는 협소해지고 사람들은 '진보가 진보가 아닌' 광경을 보게 됩니다.

 

이 와중에 사민주의가 '복지'라는 간판을 달고 옆문으로 들어옵니다. 왜 옆문이라고 했냐 하면 유럽에서 사민주의는 정당이나 노조에서 내거는 이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통상적인 길을 겪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민주노총 등이 진즉 사민주의를 표방할 수도 있었을 법 합니다. 그런데 이 조직들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민주의는 개량적이고 타협적이라며 경계하는 경향도 꽤 강했고, 여전히 민족모순의 해결이 선결과제라는 견해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의 강령은 아무리 봐도 현대적 사민주의를 지향한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탈자본주의(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자는 얘기로 보이기도 하고 한반도 평화체제가 최우선 과제라는 얘기 같기도 합니다.

 

이렇듯 눈밖에 나있던 사민주의는 2000년대 후반부터 진보 정치인들에게 본격적인 고려 대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사민주의에 관심있는 개인들은 예전부터 여기저기 있었지만 2007년 창립된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중심으로 비로소 복지국가와 사민주의 담론이 적극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합니다.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보수가 압승하고 민주노동당이 분란을 겪으면서 대안 이념으로 사민주의에 관심을 보이는 정치인들이 늘어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9년 죽기 직전까지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을 세 번이나 읽었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치인들 가운데 공공연하게 스웨덴이나 독일과 같은 사회모델을 지향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고, 정의당의 당 강령을 보면 과거 민주노동당에 비해 훨씬 사민주의에 가깝습니다. 심상정 의원은 2012년 통합진보당에서 탈당하기 전 당시 강기갑 당대표와 함께 당 이름을 '사민당'으로 바꾸고 싶다는 바램을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노조 조직률이 10%에 불과하고 노동운동과 정당간의 연계도 미약한 상황에서 어떻게 사민주의가 가능하냐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당의 사례처럼 사민주의가 노조와의 조직적 연계 없이 발전한 경우도 있습니다. 토니 블레어 이후의 영국 노동당도 그렇다고 할 수 있구요. 또 현실적 여건으로 인해 사민주의가 어렵다는 지적이 맞다 할지라도, 미래의 지향점으로서 스웨덴이나 독일과 같은 사회를 상정하는 건 나무랄 일이 아닐 겁니다.

 

문제는 사민주의의 대표상품 가운데 쉬운 것만 들어오고 어려운 건 안 들어왔다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친숙한 '복지'는 들어왔는데 사민주의의 핵심 정신인 '연대'는 안 들어온 거죠. 연대(連帶 solidarity)는 프랑스대혁명의 3대 정신인 자유·평등·우애 가운데 우애(友愛 fraternity)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사민주의의 역사를 보면 숱한 계급내 연대와 계급간 연대로 점철되어 있고, 이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보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 대기업 노조와 중소기업 노조의 연대, 노동자와 자영업자의 연대,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 등등. 그런데 사민주의 도입 과정에서 이 연대의 철학과 정신이 누락되었고, 이로서 1980년대 사상의 잔존에 따른 문제들을 해결할 기회가 유보됩니다.

 

특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배려와 양보를 수반하는 연대는 지난 십여년 간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스웨덴이나 독일에서 볼 수 있는 연대임금제는 한국에서 애초에 힘든 일이었겠지요. 연대임금제란 이를테면 현대자동차의 임금상승을 억제하고 하청·협력업체의 임금을 더 올리는 건데, 이건 노조 조직률이 높고 중앙교섭이나 최소한 산별교섭이 이뤄지는 환경에서나 가능할 테니까요. 하지만 연대임금제보다 수위가 낮은, 이를테면 사회연대기금 성격의 제도들은 시도해볼 법 하지 않았을까요? 분명 몇차례 제기되고 거론되기는 했는데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무산되었습니다. 하다못해 1990년대까지 일본 노동운동이 우리처럼 기업별 교섭을 하면서도 춘투에서 대기업/중소기업, 원청기업/하청기업간 임금불평등을 억제해온 전통을 벤치마킹할 수도 있었을 텐데, 여태까지 그런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재벌기업의 정규직이 독점적 이윤을 분배받음으로써 높은 급여를 받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들이 식민지로부터 흘러온 재화를 분배받아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는 것과 논리적으로 동일합니다. 제국주의 시기 대부분의 지식인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침묵한 것처럼, 한국사회의 진보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대부분 대기업·공기업 정규직의 급여수준에 대하여 아무런 견해도 입밖에 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르면 노동력의 거래는 애초에 등가교환이 아니기 때문에 '공정한 임금'이라는 개념이 원천적으로 성립하지 않고, 따라서 단위기업 노동자의 임금상승을 극대화하는 게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때 자신도 참여했거나 적어도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노동운동에 대하여 부채의식을 안고 있다 보니 쓴소리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겠지요.

 

2010년대 진보 정치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잔재 및 노동운동에 대한 부채의식이라는 사상적·심리적인 문제로 인하여 임금이라는 '분배'의 문제를 의제화하지 못하고 그 손쉬운 대안으로 '재분배'의 영역, 즉 복지를 택합니다. 이는 복지정책의 파급력을 제한하고 옆문으로 들어온 사민주의를 처음부터 왜곡시킵니다. 예를 들어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원청업체/하청업체간의 심각한 임금 격차를 그대로 둔 채로 재분배 영역에서 이를 보완하자면서 복지를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변죽만 울리다 보면 국민들의 눈에 진보 정치가 어떻게 보일까요? 분배의 문제를 외면한 채 재분배에 골몰하고, 연대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사회적 형평과 정의를 애써 외면하는 것으로 보이겠지요. 대기업·공기업 노조의 호위부대라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론스타로부터 민족자본을 지키자고 주장하면서 외환은행 정규직 직원들의 평균 연봉이 1억이 훌쩍 넘는 현실 앞에서는 침묵하는 '웃픈' 광경을 보며 국민들은 냉소를 보냅니다.

 

따지고 보면 복지도 일종의 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예를 든 연대는 '내'가 참여하는 연대임이 보다 직접적으로 체감되는 데 비해, 복지는 '국가'를 매개로 이뤄지는 간접적인 연대입니다. 따라서 복지를 통한 사회적 연대를 주장하는 정치집단은 높은 수준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담보해야 합니다.

 

그런데 2010년 이후 무상급식을 중심으로 복지 논의가 폭발적으로 이뤄지면서 진보 정치인들은 세가지 실수를 저지릅니다. 이로 인해 야권의 복지 정책은 그 신뢰도에 있어 상당한 약점을 안게 되고 포퓰리즘 논란에 빠지게 됩니다.

 

첫번째 실수는 보편복지를 무상복지 혹은 일률적 복지와 등치시킨 것입니다. 보편복지는 복지국가와 사민주의의 핵심이므로 이를 지향하는 정치인이 보편복지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무상급식 논쟁을 계기로 '보편복지는 일률적 복지, 선별복지는 차등적 복지'라는 잘못된 등식이 널리 퍼집니다. 정작 복지 전문가들은 진보/보수를 떠나 이러한 등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보편복지란 특정한 계층이나 집단을 배제하지 않고 보편적으로 혜택을 준다는 뜻이지, 모든 이에게 꼭 골고루 일률적인 혜택을 줘야만 보편복지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학교급식을 보면 일부는 급식비를 내고 일부는 감면받으며 일부는 무상으로 제공받습니다. 얼핏 선별복지로 보이겠지요. 하지만 미국 농무부가 식재료를 보조하여 급식비를 낮춰주고 있습니다. 이를 통한 혜택은 고소득층에게나 저소득층에게나 배제나 차별 없이 동일하게 돌아갑니다. 일본의 경우 식재료비는 학부모 부담이지만 운영비와 인건비는 정부가 보조하여 급식비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합니다. 역시 정부가 보편적인 지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과 일본의 급식은 보편복지일까요, 선별복지일까요?... 따지고 보면 유럽에서도 전면적으로 무상급식을 시행하는 나라는 스웨덴과 핀란드 2개국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스웨덴과 핀란드 두 나라만 보편복지이고 예컨대 독일이나 덴마크의 급식정책은 선별복지일까요?

 

그렇다고 제가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무상급식은 아동 시기의 낙인효과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고, 급식비를 내지 않은 학생-학부모와 교사 사이에 일어나는 심각한 갈등을 예방합니다. 교육적 효과가 큰 정책입니다.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는 헌법 31조 및 "학교급식은 교육의 일환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학교급식법 6조도 중요한 근거입니다. 그래서 '의무급식'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무상급식 정책이 가진 정치적 상징으로서의 가치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무상급식에 찬성합니다. 물러설 필요 없고, 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무상이거나 일률적이어야만 보편복지라고 여기는 것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오해임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2011년초 새정치민주연합(당시 민주당)은 '3무+1'을 당론으로 발표합니다. 무상급식, 무상보육, 무상의료의 '3무'에 반값등록금을 더한 것입니다. 무상급식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킨 정책이고 무상보육은 이미 이명박 정부에서 발표한 것이었으니 그런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하지만 무상의료와 반값등록금은 뭔가 이상합니다.

 

무상의료 정책은 2011년초 채택된 이후 2012년 연말 대선까지 꾸준히 구체화되는데, 이를 들여다 보면 정작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에서 볼 수 있는 무상의료가 아닙니다. 외래 진료시에는 상당 비율의 본인부담금을 내야 하고 다만 가계를 파산으로 몰고갈 우려가 있는 입원비의 본인부담금을 낮은 비율로 제한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연간 부담금 총액도 제한하구요. 따라서 무상의료라는 이름은 잘못된 것입니다. 좀 엉뚱한 이름이 붙은 겁니다.

 

무상의료는 '내용은 좋은데 제목을 잘못 지었다'고 변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값등록금은 내용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려운 형편의 대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등록금이 반값이어도 힘들거든요. 시골이나 중소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이나 대도시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경우라면 주거비 등이 더해지니 더더욱 그렇구요. 따라서 등록금을 일률적인 액수로 통일하는 것보다는 고소득층은 상대적으로 많이 내도록 하고 저소득층에게는 반값보다 더 낮춰주는 식으로 차등화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 정의감에 더 부합합니다. 그러면서도 보편복지에 부합하는 제도를 얼마든지 설계할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캐나다의 경우 각종 장학금 및 감면제도를 통해 대학등록금을 소득에 따라 여러 단계로 차등화합니다. 하지만 대학에서 정부보조금을 학생 교육비에 사용하고 있으므로 선별복지가 아니라 보편복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부보조금의 혜택은 고소득층에게나 저소득층에게나 배제나 차별 없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30위 정도인 우리나라에서 대학등록금이 세계 3위라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일이고, 등록금 문제를 절박하게 여기는 대학생과 시민단체에서 반값 등록금을 슬로건으로 내건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중운동의 슬로건을 정당의 정책으로 끌어오는 과정에서 과연 충분한 검토와 토론이 이뤄진 것인지, 특히 보편복지를 '일률적 혜택'과 등치시키는 오해가 작용하지 않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번째 실수는 보편복지만 내세울 뿐 공평과세는 미진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보편복지의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공평과세 뿐만 아니라 '보편과세'의 원칙이 요구됩니다. 세금을 내지 않고 혜택만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만큼 세금에 대한 저항감이 커질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조세-복지를 통한 사회적 연대가 위협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법인세 인상이 먼저이긴 합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법인세율을 25%에서 22%로 낮추고 추가로 다양한 감면을 확대하는 바람에 이후 매년 5~7조 가량의 세금이 덜 걷히고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게다가 세금 감면이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에 집중되는 바람에 법인세 실효세율은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더 낮은 실정입니다. 법인세율을 올리고 감면제도를 손보는 방안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보수도 상당 부분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법인세 문제에만 집중하다 보니 공평과세의 여타 과제들에 대해서는 소홀한 느낌입니다. 재벌의 기술적인 상속·증여세 탈루에 대한 대응도 중요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눈앞에서 뻔히 이뤄지는 일상적인 탈세도 아직 너무나 많습니다. 성형외과에서는 현금으로 계산하면 할인해 주겠다며 유혹합니다. 개인 용도의 고급 차량이 법인 명의의 리스나 렌트로 굴러다닙니다. 임대사업자의 월세 소득에 대해 제대로 세금이 부과되지 않습니다. 건강보험도 예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공평한 보험료가 부과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수준입니다.

 

'보편과세'의 문제까지 고려해 보면 상황이 더욱 심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소득세 감면 비율이 워낙 높거든요. 근로소득자 가운데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 면세자가 40% 이상입니다. 이명박정부 시기 30%대로 낮아졌다가 최근 다시 높아져 거의 절반에 달합니다. 물론 당장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상황에서 소득이 너무 낮으면 먹고살기 곤란하니 면세하는 게 필요합니다. 하지만 급여생활자의 무려 절반이 세금을 내지 않는 상황이니 보편복지를 이야기하기 궁색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 앞에서 진보 정치인들은 다들 꿀먹은 벙어리입니다.

 

세 번째 실수는 복지의 우선순위에 대한 고려 없이 '다다익선'이라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정책들에 대해 정책 전문가들은 '당선되었어도 큰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 많은 복지공약을 다 이행하려면 어지간한 증세로도 어려웠을 거란 얘기죠. 정부 지출의 우선순위가 없다는 것은 사회의 미래에 대한 가치기준이 정립되지 않았다는 뜻이고, 필연적으로 포퓰리즘 논란으로 이어집니다.

 

복지정책의 가치기준과 우선순위에 대한 판단력이 부족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우리는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경기도 도지사후보 경선에 출사표를 던졌지요. 그러자마자 여론조사에서 김진표 후보를 제치고 지지율 1위를 기록하며 기염을 토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로 내놓은 공약이 '무상버스'였죠. 무상버스에 대해 며칠간 떠들썩한 논란이 벌어지고 나서는 이후 여론조사에서 김진표 후보를 한번도 앞서지 못합니다. 왜냐 하면 일반인들의 가치기준에 따르면 출퇴근 비용보다 안락함이 훨씬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김상곤 후보는 뒤늦게 세번째 공약으로 '앉아가는 아침'을 내놓았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간 다음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무상버스 대신 그 재원을 버스 증차에 쏟아붓겠다고 처음부터 공약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겁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한국사회에서 저출산 극복이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거론되는 여러 정책들의 집행방식과 우선순위에 상당한 변경이 필요합니다. 결혼을 안하는 이유는 고용·주거에 있고 출산을 안하는 이유는 교육·보육에 있으니 여기에 총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다다익선이 아닙니다. 예컨대 고교 무상교육의 순위는 뒤로 밀려야 하고 산후조리에 대한 지원은 앞당겨져야 합니다. 외벌이 보다는 맞벌이에 대한 보육서비스에 우선순위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우선순위는 '저출산 극복'이라는 거시적 목표와 가치기준을 반영합니다. 돈이 충분하다면 후순위 정책들도 다 집행할 수 있겠지만, 재원이 한정되어 있다면 선순위 정책부터 시행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 당 강령에는 "보편적 복지를 통한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지향"하되 "선별적 복지와의 전략적 조합"을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복지를 강하게, 많이 주장할수록 당의 정체성에도 맞고 진보적인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2010년이라면 혹시 이게 통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모든 영역에서 압축성장이 이뤄지는 나라이고, 지난 몇 년간 국민들은 조세와 재정과 복지의 상관관계에 대해 압축적인 학습을 했습니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보편복지에 대한 지지율이 선별복지를 앞서지 못합니다. 새누리당은 이미 '맞춤형 복지'라는 혀에 착 달라붙는 용어를 선수 쳐 가져갔습니다. 복지를 많이 주장할수록 '무책임하다' 내지 '쓰는 정당'(버는 정당이 아니라)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만약 새누리당에서 유승민 의원 등이 영향력을 확장한다면 정책상 차별화가 별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생물학적 연령상 여의도에서 486 세대의 비중이 커지는 것은 필연입니다.

 

이미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486, 그리고 이후 20대와 21대 국회를 통해 등장할 486 진보 정치인들에게 권고합니다. 복지는 좋은 겁니다. 하지만 1980년대 사상의 잔여물에 덧붙인, 특히 연대의 원리를 빼먹은 복지는 우리에게 극복의 대상입니다. 더구나 보편복지를 곧 무상 또는 일률적 복지라고 여기고, 공평과세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복지정책의 가치기준과 우선순위를 세우지 않는 실수를 반복한다면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필패입니다.

 

앞으로 공천 심사를 할 때 복지정책들의 우선순위에 대한 논술고사를 치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여의도 486'보다는 '지자체 486'에게 유리할 겁니다. 복지가 486에게 진정한 '사상'이 될지 아니면 알리바이가 될지에 따라 진보 정치 전체의 명운이 걸려있습니다.

 

필자 - 이범, 교육평론가,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  http://www.huffingtonpost.kr/bohm-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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