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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은 좀 두냐?: 서능욱이란 분이 계신다

"인생은 도전의 연속. 한번 넘어졌다고 끝이 아니죠.”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5/07/12 [17:27]

바둑은 좀 두냐?: 서능욱이란 분이 계신다

"인생은 도전의 연속. 한번 넘어졌다고 끝이 아니죠.”

서울의소리 | 입력 : 2015/07/12 [17:27]

 

격세지감. 아, 이창호

 

새벽에 깬 잠이 다시 쉽게 올 것 같지 않다. TV의 리모컨을 이리저리 만져보다 <바둑TV>에 채널을 고정한다. 이창호다. 반가운 얼굴이다. 자막을 보니 올 1월 합천에서 있었던 따끈따끈한 대국이란다. 한·중 영재&정상 바둑 대결이라는 플래카드가 화면 상단에 보인다.

 

이창호는 한국의 정상이고, 상대는 촉망 받는 중국의 신예 기사인 랴오위안허 2단이다. 해설자인 백성호 9단의 설명에 따르면 랴오위안허는 2000년 생, 15살이라고 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직 아이 티를 벗지 못한 얼굴이다. 한 시간 정도 지켜보았을까? 여태까지 이창호의 바둑이 이런 적은 없었는데, 내 눈이 의심스럽고, 과연 이창호가 두는 바둑이 맞는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이창호는 끌려가고 있었다. 백성호 9단의 안타까워하는 해설이 대국 내내 굳어 있는 얼굴의 이창호를 더욱 참담해 보이게 했다.

 

이날 이창호는 15살 랴오위안허 2단에게 대국 초반부터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203수만에 돌을 던지고 말았다. 이창호, 바둑 최강자 이창호. 메이저 세계대회에서 17차례나 우승을 차지한, 오랜 시간 세계 최정상의 기사로 군림했던 이창호가 말이다. 이날 이창호를 무참하게 KO시킨 랴오위안허는 2013년 열세 살의 나이로 프로 기사가 된, 중국 랭킹 144위의 소년이었다.

이창호.jpg

이창호 프로 바둑기사

 

그 날 이창호의 바둑은 내내 속상했다. 물론 어찌 보면 그날의 바둑은 함께 나이 들어가는 나의 안타까움일 뿐,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창호가 랭킹 1위의 자리에서 내려온 지 오래 되었고 이제 더 이상 그의 시대도 아니다. 이세돌, 목진석, 최철한, 박영훈의 시대가 펼쳐진 지도 오래되었고, 또다시 이들을 밀어낸 박정환, 김지석, 강동윤, 조한승, 박정상들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창호가 현재 한국 랭킹 30위의 기사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새벽의 당혹스러움과 참담함은 잊기 힘들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창호가 그렇게 박살 날 수 있다는 게 (물론 상대도 잘 뒀다) 믿기지 않았다. 가슴 쓰린 이창호의 패배를 보면서 마음 한구석 저쪽에서는 뜬금없이 다른 한 사람이 생각났다.

 

바둑, 프로 기사들의 서열과 성적

 

우리나라에 프로 바둑기사가 몇 명쯤 될까? 최근의 인기 드라마 <미생>에서 잠깐 나왔듯 프로 기사가 되는 건 아주 힘들다. 현재 한국의 프로 바둑기사는 약 300여 명. 그 가운데 최고수인 9단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약 60여 명이다. 생각보다 9단의 숫자가 많지 않은가?

 

바둑이라는 종목이 워낙 어려서나 젊었을 때 전성기를 구가하는 두뇌스포츠라 그렇다. 예전에는 30대나 40대에 도달하던 9단을 요즘은 20대에 도달한다고 한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국제대회 등에서의 입상 경력이 크게 작용하리라 본다.

 

1위  조훈현 - 1953년 생 (1982년 9단)

2위  김인 - 1943년 생 (1983년 9단)

3위  서봉수 - 1953년 생 (1986년 9단)

4위  서능욱 - 1958년 생 (1990년 9단)

 

현존하는 프로 기사들의 9단 승단 시기를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다시 말해 9단이 된 지 가장 오래 된 사람들을 차례로 적어놓은 거다. 물론 위의 사람들 말고도 장수영(5위, 92년), 김수장(6위, 93년), 양재호(7위, 94년), 백성호(8위, 95년), 강훈, 유창혁, 이창호(96년) 등 우리 귀에 익숙한 이름들이 줄줄이 나온다. 국제대회에서의 성적을 논외로 한다면 여기 나열되는 이름들은, 이른바 그 시기 한국 바둑의 레전드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 시대를 빛냈던 한국 바둑의 스타들이었다는 이야기다.

 

바둑계에 58년 개띠인 서능욱이라는 분이 계셨다.

그분 스타일이 딱 이래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서능욱 9단이다. 마이클 잭슨 형님과 마돈나 누님과 동갑으로 58년 개띠인 우리의 서능욱 9단. 그는 열넷의 나이인 1972년에 프로 기사가 되었고 서른둘의 나이에 9단의 자리에 올랐다. 요즘처럼 체계화된 바둑 조기교육이 없었던 때에 이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서능욱은 아홉 살에 입단해 스물아홉 살에 9단이 된 조훈현(1962년 입단) 이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입단한 선수였다. 이후로도 열한 살에 입단해 스물한 살에 9단이 된 이창호(1975년 생, 86년 입단, 96년 9단) 정도를 제외하면 비교할 만한 대상이 드물다. 그야말로 서능욱은 대단한 재능을 갖고 등장한 천재 바둑 소년이었다.

 

또 다른 서열을 한 번 보자.

 

1위  조훈현 – 1879승 2위  이창호 – 1614승 3위  서봉수 – 1514승

4위  유창혁 – 1173승 5위  서능욱 – 1009승   (2013년 1월 기준)

 

위는 우리나라 프로 기사들의 통산 승수를 순서대로 적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아래는 위의 다섯 명이 지금(2010년 기준)까지 국제대회를 포함해 우승한 횟수다.

1위  조훈현 - 150회 우승

2위  이창호 - 140회 우승

3위  서봉수 - 30회 우승

4위  유창혁 - 24회 우승

5위  서능욱 - 우승 없음

다시 한 번 확인하자. 서능욱의 우승은 없다. 적어도 2010년까지는.

 

드라마 <미생>에 나온 조훈현(좌), 유창혁(우) 기사

 

손오공 서능욱

 

서능욱의 별명은 (반상의) 손오공이다. 신출귀몰한 수를 잘 두고 누구보다 전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기발함과 호전성에 있어 서능욱을 따라올 기사가 별로 없다. 오죽하면 “서능욱은 쌍립도 끊는다.”는 말까지 있었겠는가. 뭐니 뭐니 해도 서능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그의 속기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그의 바둑을 번개바둑이라 불렀다.

 

프로들도 바둑을 두는 데 기본 네다섯 시간, 빨리 두어도 서너 시간은 걸린다. 하지만 서능욱은 상대방이 돌을 놓은 지 1~2초 만에 응대의 돌을 놓는다. 직관이 강하고 수읽기가 빨라 시원시원한 서능욱의 바둑은 팬들에게 대단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많은 팬들은 이기든 지든 시원시원하게 놓이는 그의 속기 바둑에 통쾌해 했고, 그의 스타일은 인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예측할 수 없는 기발한 수와 공격성, 그리고 정신 없이 몰아치는 싸움 바둑과 속기의 수는 그에게 손오공이라는 멋진 별명을 가져다 줬다. 그러나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장고해야 하는 바둑에 있어서 그의 속기는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훗날 서능욱은 한 인터뷰에서 이런 고백을 한다.

 

“승부사에게는 맞지 않는 기풍이었습니다. 승부사는 결정적일 때는 좀 비겁하고 치사해질 줄도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습니다. 화려하다고 우승컵 주는 거 아니잖아요? 이기는 기술의 측면에서 보면 나는 부족한 승부사였습니다.”

 

서능욱의 화려한 기풍과 속기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가 꽤 있다. 비슷한 속기파인 김희중과의 공식대국에서 40분도 되지 않아 대국을 끝낸 이야기도 유명하지만, 돌을 놓고 아직 채 손을 떼지 않은 상대의 손가락에 자신의 돌을 놓다 반칙으로 실격패 한 것 역시 유명한 이야기다. 얼마 전에 있었던 1,000번째 승리에서도 49분 만에 판을 끝마쳐, 역시 서능욱이란 소릴 듣기도 했다.

 

또한 1991년 88체육관에서 111명을 상대로 약 8시간에 걸쳐 다면기(고수가 동시에 여러 사람을 혼자 상대하는 바둑)를 두었던 것은 그의 천재성과 속기력을 한 번에 설명해주는 사건이다. 지금까지도 111명과의 다면기는 세계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하는데, 서능욱은 이날의 다면기에서 71승 40패를 거두었다고 한다. 111명과의 동시 대국, 헐.

 

하늘은 서능욱을 내리고 어찌하여. 소서(小徐) 서능욱

 

서능욱과 조훈연의 악연은 바둑계는 물론 일반인에게까지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사였던 조훈현은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 바둑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서능욱이 처음으로 조훈현의 ‘최강자’ 타이틀에 도전했던 건 1979년이었다.

 

당시 존재했던 9개의 타이틀 가운데 8개는 조훈현의 것이었다. 그나마 남은 하나의 타이틀은 유일하게 조훈현을 견제할 수 있는 상대로 평가 받던 서봉수의 것이었다. 하지만 서능욱은 서봉수조차도 넘어서지 못해 패배를 하곤 했다. 그 결과 얻은 불명예스런 별명이 소서(小徐). 그것은 대서(大徐) 서봉수에 비해 꼭 그의 키가 작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멍멍.jpg

(출처- 한국기원)

 

드물기는 해도 대서 서봉수의 산은 한 번씩 넘곤 했던 서능욱. 그러나 시대를 잘못 타고난 2인자 혹은 3인자로서의 불행은 끝없이 그를 괴롭혔다. 천신만고 끝에 타이틀을 획득하기 위해 도달한 결승에는 언제나 조훈현이 있었다. 그리고 각종 타이틀 결승에서 무려 열두 차례나 무릎을 꿇었다.

 

1979년부터 1992년까지 14년여에 걸친 잔인하고 끔찍한 긴 세월의 패배였다. 더 참담한 것은 무려 30패(4승)에 달하는 일방적인 종합전적이다. 이는 단순히 서능욱에게 승운이 없었다고 이야기하기 힘든 기록이다. 그는 조훈현에게 늘 처절하게 패했다. 조훈현은 서능욱에게 가장 큰 미움과 원망의 대상이었다.

 

혹자는 여기에 조훈현의 제자 이창호에게 당한 패배까지 더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서능욱의 잔혹사에 악재를 더하려 하지만 이는 적절치 않을 뿐더러 작위적이기까지 하다. 어찌되었든 서능욱의 바둑 인생을 거대한 1인자 조훈현에 막혀 끝내 개화하지 못한 꽃에 비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주유를 내리고 어찌하여 또 제갈공명을 내리셨나"

하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던 주유의 심정이 이해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서능욱은 우승은 맛보지 못했어도 1990년까지 각종 대회의 본선에 64회나 진출했다. 당시에는 인정할 수 없었겠지만 이때는 그가 빛나던 시기였다.

 

오랜 세월 우승의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하는 그를 보며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화려한 행마와 불굴의 전투 의지 그리고 시원시원한 속기 덕분에 조훈현이나 서봉수보다 많은 팬들을 몰고 다녔던 서능욱. 그의 팬들 가운데 대다수가 그의 패인을 속기, 그의 빠른 손으로 지목했다. 많은 이들이 그에게 조금 더 생각하기를 충고했고, 당사자인 서능욱도 요가며 명상 등을 통해 속기 버릇을 고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의 아내는 염주를 그의 손에 쥐어주며 장고를 권유했다고 한다.

 

손오공의 손에 쥐어진 염주

 

이후 서능욱은 왼손에 염주를 쥔 채 천천히 돌려가며 대국에 임하기 시작했다. TV를 통해 이를 지켜본 많은 바둑인들은 어쩌면 서능욱에게 제2의 전성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의 수 다음에 눈 깜짝 할 사이에 내려놓는 응수로도 이미 그 정도의 실력이니, 조금만 생각을 가다듬은 수가 나온다면 크게 발전된 괴력이 나올 수도 있다는 근거 있는 예상이었다.

염주.jpg

염주를 차고 대국하는 서능욱 기사

(출처- 한게임)

 

한동안 참고 또 참는 그의 염주 돌리기는 지속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염주를 돌려대는 그의 왼손과는 상관없이 예전처럼 쉼 없이 돌을 내려놓는 오른손이 팬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속기는 결국 서능욱의 천성이었다. 약점이란 결국 그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속기는 다시 살아났지만 아직은 왼손에 아내가 쥐어준 염주를 쥔 채 대국에 임하던 어느 날, 한국 바둑계에 오래도록 회자될 사건이 벌어진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반상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하자, 빠르고 정신없이 돌리던 염주의 줄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줄이 끊어지면서 수많은 염주알들이 사방으로 구르고 튀어 대국장에 한바탕 소동이 났다. 반상 위로 굴러다니는 염주알을 수습하느라 대국이 잠시 중지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손아귀에서 풀려나가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염주알은 그에게 또 한 차례 허탈감을 안겼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손에서 염주를 떠나 보냈고 우승에 대한 마음을 접기로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불혹을 넘어가면서는 체력이 달렸다.

 

세월은 흘러, 그를 좌절하게 만들었던 조훈현의 제자 이창호가 국내뿐 아니라 세계 최강의 위치에 오르고, 코흘리개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바둑을 배운 10대 신예들이 밀물이 들어오는 서해안처럼 한국 바둑계를 서서히 뒤덮었다. 명백히 서능욱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그도 이제는 여타 무관의 9단들처럼 바둑 해설 자리를 알아보고 도장을 차리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려야 하는 처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 인터넷의 시대는 열리고

 

21세기가 시작되고, 그 무엇보다 요란하게 등장해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어 놓은 것은 인터넷이었다. 90년대 초중반부터 시작되었던 길지 않은 PC통신의 시대를 거치며 몰아친 인터넷의 열풍은 광풍과도 같았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기술의 발달은 빨라졌고, 신기술은 발표되는 순간부터 이미 신기술이 아니었다. 이제 상상을 하면 만들어지는 시대였다.

 

오랜 세월 큰 틀에서의 변화 없이 유지되어 오던 바둑이지만 인터넷 시대를 맞아 변화의 요구에 직면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속도였다. 사이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속도였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가운데 바둑만이 예외일 수는 없었다.

 

사이버상에서 많은 수의 바둑대회가 열리기 시작했고, 엄청난 숫자의 바둑 동호인들이 인터넷 바둑으로 몰려들었다. 일상에서 바둑의 상대를 찾기는 힘들지만 사이버 세상은 달랐다. 컴퓨터만 있다면 누구라도 상대를 찾아 바둑을 둘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사이버 바둑에서 속도는 가장 중요한 요건 가운데 하나였다.

 

프로기사가 아닌 일반인들은 바둑을 두면서 상대방의 장고를 기다리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의 돌이 놓인 후 10초 안에 자신의 돌을 놓는, 빠른 속도의 바둑에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사이버상에서의 속기바둑은 전통적인 오프라인에서의 대국시간마저 조금씩 줄여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서능욱에게는 유리한 흐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젊은 시절 그 기발했던 속기의 천재 서능욱의 시대가 다시 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능욱은 인터넷을 통해 하루 20~30판의 바둑을 두며 그의 속기 본능을 원 없이 풀 수 있는 세상을 만난 것에 더없이 행복해 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새로운 속기의 내공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기사들에 비해 서능욱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군자의 복수는 아무리 늦어도 늦은 것이 아니다

 

서능욱은 지난 2011년 12월 27일, 제2회 대주배 시니어 최강자전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결승전 상대는 다름 아닌 조훈현이었다. 그는 피가 튀는 혈전 끝에 조훈현의 대마를 몰살시키고, 마침내 조훈현을 이겼다. 평생에 걸쳐 13번의 준우승만 차지했던 저주받은 바둑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비록 대주배가 만 50세 이상만이 참가할 수 있는 제한기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의 우승은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더구나 결승에 오르기 전, 준결승의 상대인 서봉수마저 꺾고 차지한 우승이기에 서능욱에게는 평생의 한이 풀린 우승이었다.

 

프로 기사가 된 지 만 40년 만에 이룬 우승의 꿈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서능욱은 우승 직후의 인터뷰에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기쁘다. 비록 제한 기전이지만 평생 앞길을 막아 섰던 조훈현 9단을 이겨 만감이 교차한다.”

 

라는 소감을 밝혔다. 이날 서능욱이 받은 우승 상금은 1,000만원이었다. 그는 시상식 후 고깃집에서 뒤풀이 행사 치렀는데, 결제한 금액이 이미 천만 원을 넘었다며, 다른 곳에서도 우승턱을 내야 하니 상금의 몇 배는 더 들지 않겠냐며 호방하게 웃었다.

우승.jpg

 

1년 후에 있었던 제3회 대주배에서도 서능욱은 또 다른 숙적 서봉수를 결승에서 꺾었다. 상대 전적 26승 47패로, 자신에게 소서(小徐)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안긴 또 하나의 원수(?)를 넘어선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이제 두 개의 우승컵을 갖게 되었다.

 

두 번에 걸친 우승 직후 가졌던 수많은 인터뷰에서, 40년 만에 우승한 사람으로서 실패의 고통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청하자 이렇게 말했다

 

“욕심을 버리지 마세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뭘 채울 수 있지 않을까요? 꿈을 가진 뒤에야 비로소 부질없음도 알게 되는 것. 처음부터 ‘난 안돼’라고 하면 열리는 것이 없어요. 인생은 도전의 연속. 한번 넘어졌다고 끝이 아니죠.”

 

ps - 바둑 이야길 하니 내 바둑 급수를 묻는 이들이 몇몇 있다. 이렇게 대답하겠다. 내 아들이 5학년 때 아마 1단을 땄고, 나는 그런 아들을 한 손으로 상대한다. 

딴지일보 아직은투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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