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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어수웅기자 칼럼 "이재명 시장과 紳士道"에 대한 비판

이 글에는 이재명 개인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는 위험한 저의들이 깔려 있다.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5/03/03 [21:44]

조선 어수웅기자 칼럼 "이재명 시장과 紳士道"에 대한 비판

이 글에는 이재명 개인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는 위험한 저의들이 깔려 있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15/03/03 [21:44]

1. 아름다운 것은 선하다?

 
조선일보 어수웅 문화부 차장
고대 그리스의 이름난 미녀들 중 지금도 ‘신화급’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프리네라는 여인이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다수의 비너스 조각과 그림들이 그녀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명성을 오늘날까지 전해주는 것은 무엇보다 <프리네의 재판>으로 늘리 알려진 일화다 :
 
그녀는 ‘신성모독’으로 재판을 받게 되는데, 당시로서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심각한 죄목이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선 웅변가 히페리데스(Hyperides)는 자신의 변론이 제대로 통하지 않자, 재판관들 앞에서 그녀의 옷을 벗기고 ‘이렇게 아름다운 몸을 가진 여인이 어떻게 죄인일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재판관들은 그녀의 무죄를 결정했다.
 
이 일화는 남성들의 관음증을 조롱하는 비유로 주로 회자되었지만, 그보다는 ‘아름다움이 곧 선’이라는 인류의 '순진한' 믿음에 대한 풍자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실제로, 현대인들에게도 이런 고대적 믿음을 은연중에 남아 있으며, 이것이 종종 심각한 판단 착오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넓게 보면, 외모뿐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언행을 통해서 사람의 인격이나 진심까지도 판단하는 태도 역시 이러한 원시적 믿음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겉모습만으로 빨리 사람을 판단토록 조장하는 말들이 ‘충고’ 혹은 ‘교훈’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히 전파되기도 한다.  그러나, 달콤하고 세련된 말이 귓속으로 스며드는 독약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특히, 오늘날,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의 그 세련된 말들이 그들의 도덕성을 보장해 주는 경우는 보았던가? 다음에 우리는 그 한 예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뜬금 없는 '신사도'
 
대한민국 최고의 언론을 자부하는 언론사의 한 차장 기자가 ‘살벌한’ 언어를 구사하며 한 여성을 무참하게 공격하는 한 고약한 정치인을 발견한다. 그의 머리 속에 최근에 봤던 영화가 하나 떠 오른다. 그 주인공은 전형적인 영국 신사 복장에 산뜻한 매너 그리고 고상한 정신까지 소유한 인물이다. 기자 자신이 밝힌 것처럼 참 ‘뜬금없는’ 연상이다. 어쨌거나 그는 여성을 보호하고 악한을 응징하기 위해 '우아하게' 펜을 꺼내 든다. 스스로 신사도를 발휘하기로 한 것이다. 

'매너'에 관한 한 서로 원조를 자부하는 영국이나 프랑스에서의 정치 논쟁들을 보면 흡사 전투를 치르는 듯 격렬하게 대화를 '치고 받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 민감하거나, 대립이 심각한 문제들을 놓고 벌이는 격론은 특히 그러하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때론 '피를 부르는' 격렬한 발언조차 불사하며 구축해온 그들의 정치문화가 이를 허용한다.
 
박유하 교수가 촉발시킨 문제는 어떤 것인가? 기자 자신이 이 문제의 민감성을 잘 지적하고 있다 : “일본 아베 정권의 우경화가 점입가경이라고 할 상황에서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일본뿐 아니라 한국의 책임도 지적하고 있는 책 내용은 매우 도발적이다. 학자의 연구서지만 민족주의적 분노의 화살이 빗발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종군위안부 문제는 피해 당사자들뿐 아니라 한국민 전체에 원한과 상처로 남아 있는 문제다.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한 언급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한 남성이 교양 있는 한 여성을 대하는 개인적인 입장’과는 전혀 다른 종류다. 여기에 신사의 예절을 운운하며 딴죽을 거는 것은 그야말로 '뜬금 없는' 소리다. 
 
수긍 못할 지 모르니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가자. 가령, 박근혜 ‘대통령’의 표현들, 예컨대 ‘한꺼번에 단두대에 올려서’, ‘원수’, ‘암덩어리’, ‘진돗개는 한번 물면 살점이 완전히 뜯겨져 나갈 때까지’ 등에 16세기 프랑스 파리 사교계의 예절을 적용시켜 ‘교양 없다’고 비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지? 기자가 스스로 대답해 보면 될 것이다. 
 
3. 선동적인, 너무나 선동적인...
 
그런데 정말 이 기사에 대해 불쾌함을 무릎 쓰고 반박의 글을 적게 만든 것은, 그 '뜬금 없음'을 넘어 드러나는 어떤 불순하고 위험한 저의를 차마 지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논쟁을 촉발시킨 것은 다름 아닌 박유하 교수다. 백번 양보하여 박 교수의 주장이 학문적 연구의 결과와 학자적 양심이라 할지라도, '범행을 인정하지 않는 성폭행범 앞에서 성폭행 당한 사람이 먼저 자기 잘못을 반성하라'는 주장에 분노하지 않을 대한민국 사람은 거의 없다. 실제로 위안부 문제는 피해 여성들뿐 아니라,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마음의 상처로 여기고 있는 문제로, 박유하 교수는 그 상처에 다시 칼질을 한 것이다. 상처의 고통이 배가된 사람은 고통의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기자는, ‘박유하 교수에 대한 ‘인신공격’성 비난들이 이재명 시장의 '선동적인' 언어 때문에 촉발되었다’며, 이 시장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 정치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충분히 분노할 수 있는 일이며, 특히 정치인이라면 이런 반민족적인 주장의 위험성을 성토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그 어떤 정치인도 이 민감한 문제에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에 이재명 시장만이 '어쩌다 이런 사람과 (같은) 하늘 아래서 숨 쉬게 되었을까'라며 한탄하며, 다소 직설적으로 박 교수를 비난했다. 그런데 기자는 이 말을 "증오와 저주의 언어"로 풀이했다. 여기서 정작 드러나는 것은 이재명 시장에 대한 기자(혹은 조선일보)의 "증오와 저주"의 악감정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딱 잘라 몇 마디 말에 포커스를 맞추고, 마치 야만적인 한 남성이 가련한 한 여성에게 돌팔매질을 하도록 선동한 것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 교묘하게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바꾸어 버리는 것! 이보다 더 선동적일 수 없다. 달리 말 할 것 없이 지극히 ‘조선일보적인’ 수법이다. 
 
아울러 기자 자신은, 이러한 논란에서 중립적이고 냉정을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것이 과연 신사적인 성품 덕분일까? 혹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부족하거나, 민족적 아픔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은 아닐까? 혹은 지나치게 어떤 '사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다음에서 살펴 볼 문제가 이 점을 설명해 줄 것이다.
 
4. 위험한 저의들
 
사실 이 글에는 이재명 개인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는 위험한 저의들이 깔려 있다.
 
기자는 표면적으로 이재명 시장이 진영논리를 뛰어넘어 사회통합까지 고려해 줄 것을 점잖게 요청한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이재명 시장의 발언과 행동에는 어떤 진영논리도 발견할 수 없다. 이 시장은 오히려 평소에도 '독도지키기' 행사를 열거나, 성남시 내 독립유공자들을 극진히 대접하고, 특히 위안부의 역사를 기리고, 생존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에게 깊은 정성을 쏟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박유하 교수의 주장에 대한 적극적인 반발 역시 이러한 연장선 상에 있을 뿐이다.
굳이 그 동기를 말하라면 투철한 역사관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자는 여기에 '진영논리'라는 딱지를 슬쩍 붙인 것이다. 이것은 '이재명 시장은 좌파'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박유하 교수에 대한 비난이 '좌파 논리'라는 연기를 피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의 노림수는 무엇일까? 분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종군위안부 문제만큼 진보/보수를 떠나 국가적으로 정서가 일치된 사안도 찾아보기 힘들다. 논쟁화 시키기가 여의치 않은 것이다. 논쟁화 되기 위해선 일정부분 균열을 만들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진영논리를 끼워 넣어, 좌파에 맹목적인 적의감을 가진 세력들을 그 정서적 일치로부터 떼어놓으려 한 것이다.
 
기자는 표현의 자유와 학자의 양심에 대한 존중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박유하 교수의 주장이 최소한 '심도있는 토론'으로 발전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민족적 분노를 표현한 이재명 시장을 원색적인 선동꾼으로, 그리고 이에 동조하여 박유하 교수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가상공간에서 해방감을 느끼려는 익명의 무리들로 만들어 버리는 정신의 소유자에게 그런 명분이 진실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친일사상의 전도사들', 즉 <뉴라이트>의 활동양상과 ,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의 접근법, 즉 일단 독도의 영유권에 대한 도발을 하고, 분쟁지역화 한 다음, "국제사법재판소"로 제소하려는 일련의 과정들을 생각하면, 박유하 교수의 주장이 토론으로 발전하길 바라는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신사본색
 
전체적으로 이 기사의 논점들은 매우 고약하고, 의도는 악취로 넘쳐난다. 
 
박유하 교수가 만든 논란이 한국인들에게 끼친 충격과 고통은 뒷전으로 감춰지고, 한 남자가 한 여자에 조리돌림을 선동한 것처럼 보이는 각도에 관점을 고정시켰다. 이재명 시장의 거친 표현을 비판하지만, 정작 본인의 거칠지 않은 말 속에는 '노련한' 비하와 폄하 그리고 모략들이 넘쳐난다. 중립적인 척 하는 태도 속엔, 편애와 편파로 인한 심각한 기울어짐이 보인다. 진영논리의 극복을 주문하는 척 하면서 진영논리를 끼워 넣고, 사회통합을 주문하면서 분열과 대결구도의 형성을 부추긴다. 
 
기자가 대한민국에 넘쳐나는 거짓 신사들의 위선의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몸소 타락을 작심한 것이라면 이 글은 참고 읽어 줄만 했다. 그러지 않고, 신사복을 차려 입었는데, 풍겨 나오는 고유의 몸냄새를 가리지 못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역겹다. 만약 핍박 받는 한 여성을 보호해보려 했다면, 하릴없이 신사도의 허세를 부리지 말고, 차라리, 혹시라도 있을 고대적 믿음을 간직한 순수한 사람들을 찾아 이렇게 호소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박유하 교수는 예쁘니까, 그녀의 주장은 옳다!"
 

출처 : 파리이장의 한국보기 http://regardsurcoree.blogspot.fr/

프랑스에서 바라보는 한국, 프랑스 언론에 나타난 한국의 모습 등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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