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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제3의 프랑스 테러, 막을 수 있을까?

테러의 가능성을 낮출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을 시작할 때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5/01/23 [15:45]

제2, 제3의 프랑스 테러, 막을 수 있을까?

테러의 가능성을 낮출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을 시작할 때

서울의소리 | 입력 : 2015/01/23 [15:45]

 김재명 교수의 칼럼 <이슬람 모독과 테러, 정치적 이용의 악순환>

(프레시안, 2015.01.15)에 부쳐

 
‘어디선가 테러가 발생한다. 사회적 분노가 증폭된다. 테러 세력을 적으로 삼고 보복 공격을 감행된다. 테러로 희생된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희생자를 만든다. 다시 보복 테러가 계획된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사건들의 ‘흔한’ 구조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누군가 정의로운 목소리를 낸다 : ‘자신들이 저지른 일부터 먼저 반성하자’, ‘테러를 저지른 사람들의 입장도 생각하자’, ‘정치적 악용을 경계하자’… 그러나 이 역시도 ‘흔한’ 목소리다.
 
사실 김재명 교수의 칼럼에서는 크게 틀린 말이 없기도 하지만, 전문가로서 특별히 주목할만한 관점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샤를리 엡도> 테러사건을,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고, 악용되고, 순환되는 테러들의 일반적인 틀 속에서 파악하는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부제가 “제2, 제3의 프랑스 테러 막으려면…”인데도, 사건의 구성이나 해결 방안에 있어 프랑스라는 특수성은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실제로, 현지에서 “왜 그런 비극적인 유혈사태가 벌어졌는지 반성적으로 돌아보지 않는다” 또는 “테러사건의 결과만 강조될 뿐 동기는 가려져 버렸다”는 판단은 글쓴이가 현지의 분위기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테러 발생 직후부터 2주가 넘은 지금도 라디오만 켜면 무슨 무슨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사건에 대해 분석하고 이야기 한다.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분석이란 분석은 다 나오는 것 같다. 다만 어떤 전문가라도 ‘이슬람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자’거나 혹은 ‘이슬람을 더 깊이 이해 하자’ 정도로 손쉬운 결론에 도달하진 '못 하는' 것 같다.
 
종교의 전통과 국가의 가치
 
김재명 교수의 기본적인 입장은 ‘종교들의 특수성을 존중’해야 하며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종교를 가볍게 모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도 특수성이 있다. 한 국가 내에서 다수의 종교들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종교들도 그 국가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을 존중해야 한다. 생각해 보자.    
 
'이슬람에는 '이콘(ICON)'을 만드는 것을 금기하는 전통이 있다. 프랑스에는 국가의 근간이 되는 ‘공화국의 가치’라는 것이 있다. 표현의 자유도 바로 그 가치들 중의 하나이다. 이슬람은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전쟁마저 불사하고 있다. 프랑스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지금의 공화국의 가치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 수많은 피를 흘렸다.

이 문제의 핵심은 서구적 우월주의가 이방인의 종교를 비하한 것이 아니라, 한 나라와 한 종교에 있어 서로에게 물러설 수 없는 가치들이 충돌한 것이다. 어느 한쪽이 적당히 양보하라는 식으로 결코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더욱이 '잘 못된 일을, 잘 못된 방식으로 대응'했다는 지적은, 전문가의 안목으로선 너무 피상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표현의 자유를 후퇴시키라고?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이슬람교를 모독한 행위는 과연 옳았는가”? (미안한 말이지만, 김재명 교수의 ‘표현의 자유’에 관한 인식은 차마 거론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이 말이 프랑스인들에게는 얼마나 어처구니 없게 들릴지 보여줄 수 있는 예가 하나 있다.
 
프랑스에 <쁘띠 꼬띠디앙>이라는 6-10세용 일간지에, 테러 이후, 이런 문제가 실렸다 : “종교를 조롱하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언론들이 종교를 풍자하면 안 되는 것인가?” 참/거짓으로 대답하게 되어 있는데, 정답은 “거짓”이다.
 
프랑스의 모든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공화국의 가치들을 배우며 자란다. 좀 극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공화국의 가치가 보장하는 사회 제도 속에서 자라고, 그 가치들에 젖어 살며, 그것들을 양식처럼 먹고 자라며, 그들의 살과 피는 그 가치들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 등 공존하는 모든 종교와 무신론자들의 아이들이다. 이 가치들은 ‘독선’이 아니라, ‘공존’의 지침이다.
 
프랑스인들에게 제2, 제3의 테러를 막기 위해 이 가치들을 후퇴시키라고 하는 것은 실용적인 조언이 될 수 있을까? 이슬람 교도들에게 ‘세상과 타협하고 지내기 위해 전통을 바꾸라’고 조언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임을 생각하면, 답은 쉽게 나온다 : 거짓!
 
라이시떼(laïcité), 세속성 혹은 탈종교화
 
이번 프랑스 테러 사건들과 관련하여 꼭 이해 해야 할 가치들 중 가장 프랑스적인 것은 ‘세속성’ 또는 ‘탈종교화’로 해석될 수 있는 “라이시떼(laïcité)”라는 개념이다. 프랑스는 흔히 ‘가톨릭 국가’로 알려지지만, 이것은 역사적인 이야기일 뿐, 공식적으로는 철저한 종교 중립 국가다. 어떤 종교도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종교가 ‘공화국의 가치’를 침범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국가적 원칙이다.
 
이것이 프랑스에서 특정 종교의 교리나 신념이 표현의 자유를 넘어설 수 없는 이유다. 다양한 종교들과 문화들의 전통을 존중하는 것은 권장될 수 있지만, 그것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자유로운 선택에 속하는 문제다. ‘공화국은 표현의 자유는 보장하되, 신이 비판 받지 않을 권리는 보장해 주지 않는다’. 테러 이후, 프랑스 총리 마뉴엘 발스의 의회 연설에 담긴 내용이 이를 확인해 준다 : “우리의 법률에 신성모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원칙은 무엇보다, 유럽의 전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종교의 정치 개입, 종교와 정치의 결탁의 폐단에 대한 깊은 각성으로 성립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탈 종교화는 최초에 그 대상이 기독교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라이시떼가 그들 문화에 이질적인 종교들에 대한 배타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샤를리 엡도>의 풍자는 이슬람에 대한 풍자에 비해 훨씬 노골적인 경우가 많다.

 
히려 모든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원칙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한 나라 안에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할 수 있는 준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 원칙이 무너질 경우에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현재의 국가 시스템은 급속도로 ‘전통’으로 회귀할 것이다. 기독교와 백인 중심 사회로 돌아갈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다. 무슬림의 증가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백인 기독교 세력의 정치적 반격이 가능해 지고, 이렇게 될 경우 이 힘을 막을 수 있는 종교는 아직까지 프랑스 내에는 없다.
 
이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는, 정작 프랑스 내의 대다수 보통의 무슬림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가치들의 유기성
 
<샤를리 엡도> 테러는 프랑스인들에게 표현의 자유에 대한 도발로 받아들여 졌다. 그런데, 표현의 자유에 빨간 불이 깜빡이자, 동시에 라이시떼의 경보음도 요란하게 울렸다. 또 다원주의의 경보음도 함께 울린다!
 
사실 라이시떼의 원칙은 이 공화국의 또 다른 가치들 중 하나인 ‘다원주의’를 지탱하는 부벽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 그리고 사상의 다양성들 어느 것 하나 종교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화국의 각 가치들은 복잡한 회로와 같이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따라서, ‘테러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조금 자제 해야 한다’는 정도로 문제가 결코 단순화 될 수 없다.
 
테러는 막을 수 있는가?
 
(없다!! 그런 방법을 찾아 낸다면 노벨상 백 개를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사실 ‘테러를 막기 위한 방법’은 총론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프랑스인들이 고민하는 어떤 “근본적인 문제”에 비추어 부차적인 것일 수 있다. 한 고등학교의 교사들이 <르몽드>에 보낸 한 통의 자성의 편지 속에 이런 근본적인 고민이 엿보인다.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프랑스 교육 체제 아래서 자랐으며, 당연히 프랑스적인 가치들을 배웠을 이들이 어째서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되었고, 자기 ‘형제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끔찍한 테러리스트가 되었는가?’
 
밝혀진 바에 의하면 테러범들은 일찍 부모를 잃었고, 고아원에 맞겨져서 자랐다. 졸업 후 취직을 하지 못했고, 래퍼가 되겠다는 꿈도 좌절됐다. 프랑스는 이들 방황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포용하지 못했다. 그 사이 그들이 파리에서 만난 이슬람 극단주의 스승은 이들의 불만과 좌절을 파고들었으며, 그들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알라를 위해 큰 일을 하도록’ 이끌었다. 결국 프랑스는 자기의 젊은이들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빼앗긴 것이다.
 
교사들은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데 뜻을 모은다. 프랑스 사회 속의 다양한 ‘우리’들 :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정치권, 현실에 눈감는 지식인들, 정치를 외면하는 시민들,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가치관을 심어주지 못했던 교사들, 무책임한 공무원들, 물질적 삶을 추구하고 타인의 빈곤에 무관심한 우리들, 집단보다 개인을 중요하게 여겼던 우리들…
 
결국은 기본으로 돌아 간다. ‘우리’라는 개개인들의 삶의 자세들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공화국의 가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아이들이 극단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 역시도 매우 원론적인 이야기인 것 같지만, 매우 현실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의 입장에서 ‘파리 테러 사건’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주는 가장 현실적인 교훈이 여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직 대규모 테러와 희생자가 발생한 테러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 ‘징후’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목격된 바가 있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그리고 이것은, - 절대 그런 일이 생기지 말아야겠지만 - 만약 그런 종류의 비극이 한국에서 발생한다면, 그 범죄자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아이들’일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글을 적고 있는 동안, 이러한 우려들 중 하나가 현실이 되었다. 한국 청소년 한 명이 이슬람 전사가 되기 위해 IS의 영토로 넘어간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어처구니 없게도, 여성에 대한 혐오와 이슬람의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동경이 IS에 합류한 주요 이유이다. 인터넷에서 만난 ‘친구’, 우리 ‘대한민국의 아이’의 불만을 교묘하게 파고 들었고, 그를 유인해서 데리고 갔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아이를 극단주의자들에게 빼앗긴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파리 테러에서 얻어야 하는 교훈이며, 이미 우리에게 현실화 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비정상이 난무할수록, 극단주의의 위협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당장 우리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테러의 가능성을 낮출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을 시작할 때다. 
 
출처 : 파리이장의 한국보기 http://regardsurcoree.blogspot.fr/
프랑스에서 바라보는 한국, 프랑스 언론에 나타난 한국의 모습 등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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