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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해 하지 말고 싸워야 하는 이유.

흔히 얘기하는 ‘봉건시대의 정신’을 극복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4/10/23 [00:35]

불쌍해 하지 말고 싸워야 하는 이유.

흔히 얘기하는 ‘봉건시대의 정신’을 극복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14/10/23 [00:35]

 

짜장면집 들어가서 볶음밥을 시켜 먹고 있는데, TV에 흔히 말하는 ‘불우이웃’을 위한 모금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화면 위쪽에는 전화번호와 모금 액수가 찍혀져 있는데, 방송되는 애절한 내용에 감동한 이들이 전화번호를 누르면 천 원씩 올라가는 시스템이다. 이렇기에 이 방송은 필연적으로 사연의 주인공을 불쌍하게 만들어 내야 한다. 시청자들이 눈물이 떨어지는 만큼 모금액이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한숨이 뿜어진다.

 

예전에 2002년 월드컵 당시 이 프로그램이 특별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단다. 한국을 찾은 세계인들에게 ‘한민족의 따스한 감성’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하여간 누가 볼 때는 특히 잘하는 민족이기에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혹은 애국심의 발로로 전화기를 눌러댔고 당시 상당히 기록적인 모금이 모아졌다고 한다. 이에 우리는 한국민으로서의 뿌듯한 자긍심을 느꼈었다.

 

그러면 이를 보는 외국인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몇몇 놀라워하는 이들이 있었기는 했겠지만 대체로 ‘왜 저런 것을 하냐?’는 반응이었다. 사람을 불쌍하게 만들어서 돈을 털어내는 그런 프로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네들의 판단으로는 빈곤층을 도울 수 있는 ‘제도’를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아마 이 글을 보고서 ‘정이 없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 ‘그네나라 정서와 우리의 정서는 다른 것이 아니냐?’며 ‘불쌍한 사람 돕는 게 뭐가 문제냐?’며 발끈하실 분이 있으시리라 믿는다.

 

그런데 보라. 저런 ‘온정이 가득한’ 프로가 줄기차게 방송되고 있는 나라의 행복지수는 정반대를 향하고 있다. OECD 복지혜택 최하위, 소득분배 최 하위, 청소년 삶만족도 최하위,청소년 자살률 1위인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이렇다보니 ‘이런 나라에서 자식 키우기 힘들다.’며 애를 낳지 않아 출산율이 최하위인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남에게 자선을 베푸는 마음’은 이리 풍족한데, 실지로는 정반대의 사회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단순한 이유이다. ‘논리-합리’의 시야로 돌아가는 상황을 보지 않고 ‘온정의 마음’으로 감상적으로 문제를 판단하는 국민성의 한계인 것이다. ‘감상’의 특징은 보일 때는 울끈 하지만, 안보일 때는 쌩판 잊어버린다. 따라서 저런 프로그램 나올 때만 이웃에 대해 아파하고 아닐 때는 아예 잊는 것이다. 1년 내내 한산하다가 크리스마스 때만 유난히 복지시설에 물품이 쇄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소외계층에 대한 온정주의적 시야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켜서, 제도적으로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을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저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사람들 눈물 짜게 할 이유도 없고, 국가의 책임방기를 서민의 주머니로 땜빵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사회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을 제도화 시키려는 노력’은 한국 사회에서는 참으로 기괴하게도 ‘국가경쟁력을 떨어트리려는 노력’으로 규탄 받고, 심하게는 ‘공산주의, 종북좌파적 발상’으로 낙인 찍힌다는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도 사회복지사로서 장애인 시설에서 근무하며 장애를 가진 이들 밥 먹여주고 목욕시켜주고 할 때는 ‘천사’소리 들었었다.

 

하지만,백날 그래봤자 정부에서 복지 예산 축소하면 한순간에 장애인들이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는 처지를 확인했었다. 하여 보다 넓은 시야로 사회 제도적 차원에서의 복지사회 구현을 위한 고민과 실천을 하고 다니니 ‘사회불만 세력’, ‘국가발전 저해하는 세력’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비근한 예로 해마다 수천의 사람들이 ‘저소득층에게 따뜻한 겨울을’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거리 돌아다니면서 모금활동을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저소득층 겨울 난방비 지원 500억을 삭감했었다. 백날 천 날 수천의 사람들이 떨면서 모금활동 하고 다닌 것보다 그들 위정자들의 손가락 하나 까딱 하는 것이 그보다 수백 배 더 큰 파급력을 가져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서 규탄했던 단체들은 이명박 정부로부터 단체보조금마저 삭감당했다. 박근혜 정권 들어서는 이러한 수법이 보다 더 교묘해 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들의 지속은 단순히 재벌위주의 정책, 사회불평등을 조장하는 몇몇 정치인과 관료들의 작품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온정주의적 시야’로 밖에 세상을 살필 여력이 없는 국민 여론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온정주의적(혹은 감상주의적)시야는 종합적이고 비판적으로 사회문제를 살필 여력을 빼앗아 감은 물론이거니와 ‘비판적활동’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의 표어는 ‘좋은 게 좋은 거야.’이고, ‘집단주의’는 그형제이다.

 

이렇기에 특히나 온정주의자들(상당수 국민)은 국가에서 추진하는 정책을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반감이 유난한 것이다. ‘좋게 좋게 서로 이해하고 화합하면서 하면 되는 건데 왜 저놈들은 허고헌날 반대하고 비판하며, 정부에 맞서서 사회를 시끄럽게 하냐?’는 것이다.

 

그리고 수구 정치인들은 부러 이러한 적대적 분위기를 극적으로 조장한다. ‘국가의 안위를 뒤흔드는 저러한 소행은 종북좌파들의 소행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주장 등으로...여기에 수구언론이 가세해서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복지비 지출을 줄여야 한다.’,‘외제차 끌고 다니는 이에게 복지혜택이 돌아가고 있는 현실’등의 제멋대로의 기사들을 남발하니, 가뜩이나 잘 먹고 잘살 병에 걸려 있는 이들이 보기에는 ‘복지 축소’야 말로 사회를 안정시키고 항구적 발전을 가능케 하는 첩경이 되는 것이다.

 

이 결과 대한민국의 노인빈곤율 역시 OECD 최고가 되었고, 온갖 복합적인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하루 종일 폐지 주어 5천원 벌이를 해야만 하고, 냉방에서 옷을 열 몇 개를 껴입고 자다가 동사한 후에 6개월 만에 발견되는 참혹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문제는 그들 소외받는 계층의 손으로 ‘복지축소’ 정책을 추진하는 정치인들을 거듭 뽑아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감상주의(온정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국 저들 ‘국민에게 빵 한 조각 던져주는 대신 국민의 고혈을 쥐어짜는 이들’의 마수에 영원히 놀아날 것이다. 여기에 더더욱 ‘이성’과 ‘주체’를 세워야할 필요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개중에 배운 이들은 ‘뭔 고리타분하게 시대착오적인 이성과 주체냐?’고 반발 할지 모르겠지만, 우선 그 수준을 섭렵해야, 21세기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제공하는 다양성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다. 흔히 얘기하는 ‘봉건시대의 정신’을 극복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하여간 사회소외계층에 대한 ‘실질적’ 관심을 경주하기 위해서도,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거나(어쩌면) 계란으로 바위치기 격인 자기만족적 자선 활동으로 끝내야 할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서서 저들을 비판하고, 싸워야 하는 이유이다.

 

계속보기 유랑일지 - 충청남도 천안시

 

글쓴이 : 둥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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