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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 와인들은 이 나락으로 떨어졌을까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4/09/29 [15:26]

어쩌다 이 와인들은 이 나락으로 떨어졌을까

서울의소리 | 입력 : 2014/09/29 [15:26]

 

주말에 아내와 함께 '그로서리 아웃렛'이란 곳에 다시 와인 쇼핑을 다녀 왔습니다. 롱 위크엔드를 맞아 쉬는 동안에 아내에게 이 가게는 어쩐지 보여주고 싶더군요. 요즘 제가 와인을 사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난번에 갔다가 그 가격에 놀라서 그 다음에 아내를 데리고 가야 하겠다고 맘을 먹은 것인데, 그것은 이곳의 황당한 와인 가격 때문이기도 했고, 그 희한한 셀렉션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마꽁 빌라쥬를 $9.99, 라 로지아의 바롤로를 $7.99 에 살 수 있는 이 황당한 곳은 사실 지금 미국의 와인 권력 지도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와인이 미국의 알코올 음료 시장에서 급성장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닷컴 거품이 한참 자라기 시작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보잉과 마이크로소프트 등에 근무하던 직원들이 유럽으로 출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진짜 유럽 와인 맛'을 보기 시작한 것이지요. 알면 알 수록 '재미'가 늘어나는 와인의 특성은 곧 수많은 미국 와인 매니아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거품 경기이기는 했으나, 그 덕에 와인은 곧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매니아들을 만들어내게 됐습니다. 그리고 매니아 문화의 특성상, 조금씩 더 '확실하게 미쳐가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 와인 좋은데? 이걸 미국으로 수입하면 어떨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왜 미국에서는 이런 와인을 만들어 내지 못하지? 라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생기게 되고 조금 더 지나면 이런 사람들도 생기게 됩니다. "내가 이 와인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것이 방향이 어떻게 됐든간에, 그리고 그것이 거품이든 무엇이든 간에, '소비자'가 있는 이상 상품은 생명을 얻게 됩니다. 비록 그것이 와인, 지금까지 미국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는 주종이었더라도, 일단 추력을 받은 상품은 날개가 돋친 듯 팔려나가며 인기를 얻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관련 산업들도 계속해서 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닷컴 붐, 혹은 거품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와인이었습니다. 여기에 확실하게 와인 붐에 불을 질렀던 것은 CBS의 시사교양 프로그램 '식스티 미니츠' 를 통해 확산된 이른바 '프렌치 패러독스' 였습니다. 프랑스인들이 미국 사람들보다 더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담배를 더 많이 피우는데도 심장병엔 덜 걸린다는 사실에 주목한 일련의 과학자들의 연구결과가 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건강이라는 화두에 꽤 관심이 많은(그러면서도 제일 나쁜 식습관을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고수하고 있는) 미국인들은 와인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또 실리콘 밸리, 닷컴 붐의 중심에서 주식가격의 폭등으로 인해 거액의 돈을 만지게 된 일부 실리콘밸리의 직원이나 사업가들은 은퇴를 하고 나파 밸리를 중심으로 한 캘리포니아 지역의 포도원들을 매입하고 직접 와인을 만드는 데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폴 홉스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죠)

 

그리고 이들은 나파 지역의 땅값 및 와인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놓기 시작했고, 자본이 뒷받침되기 힘들었던 신흥 와인메이커나 비티컬처리스트(포도 재배 영농인)들은 새로운 포텐셜을 찾아 나파 인근의 파소 로블레스, 센추럴 밸리, 산타 바바라 등지에서 포도원을 찾거나 아예 워싱턴이나 오리건주로 떠나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워싱턴주의 와인 르네상스 역시 캘리포니아 출신의 명 와인메이커들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죠. 일례로 '버나드 그리핀'의 랍 그리핀이 그런 캘리포니아 출신 명 와인메이커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와인의 붐은 이렇게 형성됐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뿌리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곧 드러나게 됩니다. 원래 미국은 영국 이민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나라. 그렇기에 와인보다는 맥주라는 대중주가 더 뿌리가 깊었을 뿐 아니라, 닷컴 붐 안에서 성장한 것은 포도주  뿐 아니라 맥주 역시 유럽식 맥주의 스타일로 성장하게 되면서 마이크로브루어리가 더욱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확산됐습니다.

 

미국에서 포도주의 붐이 꺾인 것엔 여러가지가 있지만, 일단은 경제성장률의 둔화 또는 퇴화가 가장 큰 이유였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미국 와인의 질적 성장이 그간 이뤄진 것은 하나의 수확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와인의 인기는 조금씩 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와인의 소비량이 감소됨과 동시에 한참 닷컴 붐 때 소비가 높았던 고급 시가의 소비도 퇴조됐다는 것입니다. 역시 와인과 시가는 호황과 축제 때의 소비재였던가,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미 와인은 과포화 된 이후였습니다. 심지어는 와인 전문 샵들도 그만큼 늘어난 상태. 그리고 이런 것을 미리 예견한 일부 도매상들은 이런 과포화 상태의 와인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체 브랜드를 만들고 이를 기존의 와인 가격의 포맷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저렴한 수준으로 시장에 출시, 시장을 교란하고 자기들의 파이를 넓혀갑니다. 트레이더 조, 코스트코 같은 유통업체들이 이런 식으로 와인 시장에 대한 점유율을 이런 식으로 넓혀 갔습니다.

 

그 때문에, 일반 와인 디스트리뷰터들은 살아남기가 점점 힘들어져 갔고, 이들이 유통시키던 와인은 결국 대량으로 '떨이 시장'으로 넘어갔습니다. 이 와인들 중 유통이 어쩌면 더 이상 불가능한 것들이 마켓을 거치고 거쳐 결국 흘러들어간 것은 저소득층들이 저렴한 가격에 식료품을 구할 수 있는 시장이라 할 수 있는, 디스카운트 식료품 체인 '그로서리 아울렛'으로까지 흘러간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팔리는 와인의 가격은 애초에 그 와인들이 구가하던 황금기 때의 소매가격의 1/3 에서 심하면 1/5 이하까지도 떨어져 버린 가격으로 흘러나오는 겁니다. 

 

물론 오랜동안의 '이동'으로 와인의 퀄러티는 완전하게 보장은 못한다는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이곳에서 사 마셨던 와인 중에서 부쇼네, 이른바 '콜크드' (TCA) 화 되거나, 또는 식초가 된 것은 없었습니다. 약간 상하지 않았나 느껴졌던 것이 있지만, 정말 오래된 쁘띠 시라 한 병. 상태가 이 정도까지 괜찮다면 그럭저럭 당장 사 마실 와인들은 이곳에서 구할 만한 가격들입니다. 며칠 전 이곳에서 구입한 와인이 여덟 병(그 이후로 아내와 어제 가서 다시 일곱 병인가를 샀습니다만), 그때 지불한 가격이 60달러 정도. 그리고 영수증을 보면 제가 정가에서 할인받은 가격이 무려 80달러가 넘는 걸로 나옵니다. 

 

이 와인들은 결국 소비되지 못하고 이렇게까지 '굴욕'을 당하는 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와인의 양극화도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참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신흥 떼부자들이 싹 쓸어가고 있는 보르도의 최고급 와인들의 가격은 병당 수백-수천달러를 홋가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렇지 못한 와인들은 이렇게 굴욕에 가까운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와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확 줄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만의 현상은 아닌 듯 합니다. 한때 시끌벅적했던 와인 관련 인터넷 모임들이 어떻게 됐나를 지켜보고 있으면, 역시 와인은 정치적인 술이며 경제 현상이 그대로 반영되는 술이라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와인 한 가지 주제로도, 사회적인 현상들을 말 그대로 들여다보기 쉬운 상황이 된 것이지요. 요즘의 한국처럼 서민들에게 있는 것 없는 것 다 뜯어가는 사회에서(심지어는 담배값까지도!) 와인 문화 저변 확산 어쩌구 하는 말이 먹히겠는가, 이 질문을 던져 보면 되겠지요. 열 받아서 소주를, 혹은 그 밍밍한 소주가 싫으면, 그 밍밍한 맥주가 싫으면... 이걸 섞어 마시기라도 하겠지요. 더 빨리, 효과적으로 취할 테니. 

 

술에 담긴 문화를 찾아 보자던지 어쩌자던지 하는 고상한 핑계들, 어쩌면 그 술을 소비함으로서 그 술이 가진 계급적 환상에 나를 입히던 그런 몽상들이 깨지고 나서 남는 현실은 차갑습니다. 그 몽상에 기대어 소비되던 와인은 환상의 파괴와 함께 그냥 내가 가장 먼저 버려야 할 허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와인병을 잡을까요. 그저 소맥으로 이 쓰린 속을 달랠 뿐이지요. 와인 가격의 현실화라는 면에서는 저같은 와인중독자들에겐 얼마간 즐거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이것은 와인 문화의 저간을 모두 피폐화시킬 겁니다. 그리고 비정규직을 늘려가고, 제대로 된 임금과 복지를 제공하지 않고, 계속 국가와 결탁한 거대 독점자본들만이 사회의 혜택까지도 빨아가는 사회는 내수 부족의 수렁 속에서 스스로를 침몰시켜가는 과정으로 가게 될 겁니다. 우리가 왜 복지를 이야기하고 제대로 된 직장을 이야기하는가. 이 모든 과정과 이야기들이 제가 미국에서 와인 몇 병을 산 영수증 안에 그 이유가 녹아있다는 것을 다시 발견하고서는 섬찟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합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시애틀에서... 권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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