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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다시 야투가 필요하다'

‘사쿠라’, 중도노선, 우클릭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4/08/12 [16:07]

한홍구, '다시 야투가 필요하다'

‘사쿠라’, 중도노선, 우클릭 

서울의소리 | 입력 : 2014/08/12 [16:07]

응징당한 야당

 

일찍이 유례를 찾기 힘든 야당의 위기이다. 아니, 비슷한 상황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딱 10년 전인 2004년, 지금은 여당인 새누리당의 전신 한나라당이 집권당의 분열을 틈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감행했다가 거센 역풍을 맞은 적이 있었다.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기득권 세력이 자기들 마음대로 끌어내리려는 것에 분노한 시민들은 민주정권에 처음으로 단독과반수 의회를 선물했고, 진보진영도 민주당과 자민련을 제치고 단숨에 원내 제3당으로 약진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4대강 사업으로 국토만 파헤쳐진 것이 아니었다. 정치지형도 너무나 변했다. 탄핵 불장난에 고대광실 태워먹고 길바닥에 나앉은 한나라당을 천막당사에 추스른 박근혜는 지금 청와대를 차지하고 있고, 룰루랄라 탄핵안을 들고 헌법재판소를 찾았다가 인생 끝날 뻔 했던 김기춘은 지금 150년 만에 대원군이란 호칭을 되살려내 역대 최강 2인자의 권세를 누리고 있다. 반면 입법, 사법, 행정부 중 대통령과 의회 단독 과반수 등 선출되는 권력 전부를 위임받았던 민주진영은 개혁의 변죽만 울리다가 정권을 내줬고, 5년 만의 정권 탈환에도 실패했다.

 

그리고 세월호 사건과 잇단 인사 참사 등의 와중에 치러 11대 4로 이겨도 시원찮을 선거를 4대 11로 말아먹어버렸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박근혜 정권을 심판하겠다고 달려들었지만, 정작 표를 가진 시민들이 먼저 심판해버린 것은 이름뿐인 새정치였다.

 

한 표 차의 패배도 패배일 수밖에 없는 냉정한 선거에서 간판스타 노회찬을 내세우고도 패배한 진보진영의 처지는 더욱 한심하다. 10년 전만해도 수십 년만의 의회진출에 고무되어 2012년에 집권한다느니, 그건 좀 빠르고 2017년은 되어야 집권할 것이다 하며 마음껏 꿈에 부풀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의석수는 그 때와 큰 차 없지만, 진보정당이 산산이 쪼개져 3개가 되어 버린 오늘, 10명의 진보정당 소속 의원 중 차기 총선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자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역설적으로 위기는 민주개혁진영이 야당으로서 최대의석을 점하고 있을 때 발생했다. 2004년 탄핵 직후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얻은 의석수는 121석,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했다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은 여전히 129석을 가진 거대야당이다. 3선개헌을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아무도 야당은 뭐하고 있냐는 비판을 제기하지는 못했던 1960년대 말의 신민당 의석수는 불과 45석(1967~1971 제7대 국회)이었다.

 

3당합당이라는 보수대연합을 통해 초유의 거대 여당 민자당이 출현했을 때 평민당 의석수는 97석으로 전체의 32퍼센트에 불과했지만, 7년만에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은 한국야당사에서 유례없는 의석수를 자랑하고 있지만, 덩치만 커졌을 뿐 존재감은 가장 미미하다. 돌이켜보면 야당의 존재감이 땅에 떨어진 것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2008년 촛불 때도 그랬다. 그해 4월의 18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17대의 절반 수준으로 축소되었지만, 여전히 81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촛불의 열기 속에서 민주당은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제1당은 이명박 당이고, 제2당이 박근혜 당, 제3당이 강기갑 당, 그다음에 민주당을 비롯한 군소정당들이 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떠돌았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130석 가까이 의석을 늘려주었다. 의석수가 부족해서 무엇을 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여지를 없애 준 것이다.

 

시민들도 의석수 하나둘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시민들은 박근혜 정권을 심판하기에 앞서 말로만 박근혜 정권을 심판하겠다고 할 뿐, 박근혜 정권을 심판하기 위한 능력도 준비도 하지 않고 그런 결기도 보이지 않은 새정치민주연합을 먼저 응징해버렸다. 안철수는 자신이 대표가 되어 "발목 잡는 정당의 이미지를 없앴다"고 자화자찬했지만, 시민들은 박근혜의 독주에 발목조차 잡지 못하는 야당을 심판한 것이다. 견제기능을 상실한 야당은 야당이 아니다. 시민들은 무능한 야당으로는 절대로 무능한 정부를 개혁할 수 없다는 판단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

 

‘사쿠라’, 중도노선, 우클릭

 

옛 민주당 시절부터 민주당을 배회하는 하나의 유령이 있다. 그것은 중도노선이다. 진보 표만 갖고는 이길 수 없으니 중도 표심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일리 있게 들리는 말이지만, 역사적 경험도 현실도 그렇지 않다고 가르쳐준다. 이번 재보선의 성적표가 적나라하게 깨우쳐주고 있지 않은가?

 

18대 총선의 응징투표도 대통령 뽑아줘, 김대중 정권 시절 한나라당이 지배하는 의회독재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기에 17대 총선에 열린우리당 단독 과반수 만들어줘, 거기에 덤으로 민주노동당 10석까지 보태주는 등 일반 시민들은 한번 제대로 바꿔보라고 선거로 만들어줄 수 있는 모든 권력을 다 만들어주었다. 제국주의 침략과 분단과 전쟁과 학살과 독재로 이어져 온 한국현대사에서 이런 정치지형은 어쩌면 수십 년 안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그런 17대 국회가 이른바 개혁입법이라고 한 것은 사학법 고친 것 딱 하나, 그나마 박근혜가 거리투쟁 하며 버텨 다시 물러준 게 유일한 것이었다.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에는 17대에 처음 등원했다가 18대에 낙선하고 19대에 다시 당선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탄핵 반대 열기 덕에 당선되었다고 해서 ‘탄돌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분들은 자신들이 18대 총선에서 왜 떨어졌는지를 도대체 모르는 것 같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개표 막바지까지 수도권에서 한나라당과 경합했던 후보들은 거짓말처럼 1천~2천표 차이로 다 떨어졌다. 17대 때 열린우리당 의석수를 세 배 가까이 뻥튀기해주며 한번 잘 해보라고 밀어주었던 유권자들의 마음이 그만큼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투표를 안 함으로써 시민들은 이들을 응징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다가 역시나 하며 마음을 접었다.

 

중도노선, 중도노선 하지만, 분단한국의 이념지형을 냉정히 짚어보자. 한국의 진보정당이 내 건 강령은 유럽을 기준으로 하면 중도우파에도 한참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해방 공간에서 우파들만 모여 만든 제헌헌법보다도 한참이나 후퇴해 있다. 그런 진보세력을 상대로 종북몰이나 해 대는, 세월호 유족을 상대로 막말이나 해대는 새누리당 강경파가 보수정치인이고 <조선일보>가 보수언론인가? 그들이야말로 극우수구꼴통이라 할 수 있다.

 

중도를 표방하려면 그들의 극우프레임에 갇히지 말고 중심을 잡고 제대로 중도의 길을 가라. 중도노선 문제와 관련하여 꼭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지금은 극우파의 원로 행세를 하고 있는 이철승이 유신시대 신민당 당수로 있으며 내세운 중도통합론이다. 말이 번드르 해져서 그렇지 이철승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용어가 1960년대에는 따로 있었다. ‘사꾸라’, 좀 큰 놈은 ‘왕사꾸라’! 사꾸라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일본어 없애자는 노력으로 말만 없어졌지 사꾸라는 중도로 ‘진화’했다.

 

이철승은 어떻게 신민당 당수가 되었을까? 이철승에게 당수 자리를 헌상한 것은 김영삼이었다. 김영삼은 1974년 선명야당을 표방하며 지금 486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야당 총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인혁당 인사들에 대한 사형집행이라는 유신 정권의 발악과 베트남 통일(당시 용어로는 ‘월남패망’)이라는 국제정세의 격변 속에서 투쟁의 깃발을 내려놓았다. 잘 싸우겠다고 해서 뽑아준 자가 싸움을 포기했는데 다시 그를 밀어줄 사람은 없었다.

 

이듬해 이철승이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이 되고나서 내놓은 것이 중도통합론이었다. 이철승은 대놓고 신민당은 정권담당 능력이 없다고 떠들고 다녔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사이의 중도가 아니었다. 서로 경합하는 상대적 가치들 속에서의 중도가 아니었다.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민주, 인권,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와 그것을 파괴하려는 시도 사이의 중도는 야합일 뿐이다.

 

다시 야투가 필요하다

 

야당의 탈을 쓰고 유신정권 같은 독재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니 야당 내에 새로운 움직임이 태동했다. 줄여서 야투, 정식 명칭으로는 야당성회복투쟁동지회였다. 오죽 했으면 야당 내에서 야당성을 회복하자는 얘기가 나왔을까? 어쩌면 이때 야투에 모였던 일반 당원들은 지금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님들처럼 많이 배우고 많이 세련된 사람들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들은 한때 민주당 내에서 회자되었던 ‘난닝구’족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했다. 야당이 야당다워야 야당이지, 야합하는 것은 야당이 아니다!

 

박정희가 총에 맞은 것은 1979년 10월 26일이지만, 그 열 달 반 전인 1978년 12월 12월 10대 총선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이변이 일어났다. 야당인 신민당의 득표율이 집권당인 공화당보다 1.1퍼센트 앞선 것이다. 시민들은 야당성 회복 소리가 나오는 것에 기대를 걸고 야당 노릇 좀 제대로 하라고 신민당을 밀어준 것이다. 대중들의 지지에 고무된 신민당 대의원들은 “야투의 주장은 북괴통일혁명당의 소리 방송과 같은 것”이라고 야투를 격렬히 비난해온 이철승 대신 선명야당의 깃발을 분명히 든 김영삼을 선택했다.

 

만약 신민당 당수가 여전히 중도통합론이나 읊고 있는 이철승이었다면, 고은 시인이 “배고프고 예쁜 쪼깐이들”이라 부른 YH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찾아가 농성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박정희의 죽음도 우리가 아는 형태로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맛이 갔지만, 김영삼은 한때 유신정권이 버거워했던 야당총재였다. 유신정권의 호위병들은 그의 야당 총재직을 박탈한데 만족하지 않고 김영삼을 의회에서 제명하기까지 했다. 과연 안철수나 김한길이 박근혜 정권에 조금이라도 부담스러운 존재였을까?

 

안철수나 김한길이 ‘중도’ 노선이 아니라 차라리 제대로 된 ‘보수’ 노선을 폈다면 진보와 보수를 모두 아울러 지지세를 넓혔을 것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그런 사례가 딱 한 번 있었다. 집권 초기의 김영삼이었다. 금융실명제 실시나 육군참모총장과 보안사령관의 전격 경질과 같은 하나회 척결 조치로 김영삼의 지지도는 90퍼센트를 넘었다. 아니, 서태지와 아이들을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어설프게 부자들에게 아부하는 정책 쓴다고 그들이 새정치민주연합을 지지하기나 할까? 내가 부자라면 새누리당과 어설프게 입장 바꾼 새정치민주연합 중 어디를 지지할까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안철수는 중도노선의 의미와 필요성을 잘못 이해하여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정치적 기회와 자산을 다 날려버렸다. 모든 문제를 진영 논리로만 보는 새누리당에 불편해 하는 양심적인 보수세력, 한국민주주의가 지역구도를 극복하지 못한 것에 불편해 하는 영남의 양심세력에게 안철수는 상당한 호소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한국의 수구세력은 안철수가 보수적인 입장만 제대로 취해도 진보와 양심적인 보수 모두로부터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했다.

 

대통령선거에 국정원이나 사이버사령부 등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개입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는 것이 진보세력만의 과제였을까? 증거를 조작하여 억울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드는 정보기관을 개혁하는 일이 과연 진보세력만의 과제였을까? 대통령을 거북하게 했다는 이유로 검찰총장을 찍어내는 일을 중단하라고 촉구하는 일이 과연 진보세력만의 과제였을까? 세월호 참사를 보며 국가기관의 참담한 무능을 바로잡고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진상규명을 철저히 하는 일이 과연 진보세력만의 과제였을까? 이런 문제를 책임 있게 제기하고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고 안철수가 진보나 좌파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런 중대한 문제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은 결국 악의 편에 서는 것이다. 안철수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 있었다. 싸우지 않는 것이 중도가 아니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비겁함과 무책임일 뿐이다. 안철수는 일찍이 없었던 ‘안철수 현상’ 속에서 화려하게 정치에 입문했다. ‘안철수 현상’은 안철수 개인에 대한 지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촛불항쟁과 두 분 대통령의 서거 등을 거치면서 진저리날 정도의 무능을 보인 야당에 대한 거부였다. 안철수는 ‘새 정치’를 입에 달고 다녔지만, 무엇을 위한 ‘새 정치’란 말인가? 정치에서 새로움 그 자체가 가치일 수는 없다. 안철수의 위기는 민주진영 전체의 위기가 되어 버렸다. 양자 잘못 들여 종갓집 사당이 무너진 꼴이다.

 

야당이 위기에 처했다하면 나오는 처방이 ‘우클릭’이다. 그런데 한국야당사에서 우클릭해서 야당이 회생한 적이 있었던가? 우클릭을 주장하는 이른바 전략통들에게 묻고 싶다. 박근혜 정권을 지지하는 세력, 뭉뚱그려 보수세력이라 칭해지는 사람들이 정녕 어떤 사람들이냐고. 이 땅에 강부자 고소영이라고 해 보았자 넉넉잡아 주어도 300만이다. 박근혜가 지난 대선에서 얻은 1,600만표에서 이들 300만표 제하면 그 사람들이 과연 누구냐고. 이 구조를 외면한다면 바람 부는대로 왔다 갔다 하는 부동표만 중요하고 이 부동표를 겨냥한다면 우클릭 전략이 최소한도의 유효성을 지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박근혜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비정규직이고, 저소득층이다. 물론 지역구도에 분단이데올로기로 이중, 삼중으로 묶여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정면 돌파하지 못한다면 민주개혁진영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야당이 제 역할을 다 하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 싸움에는 힘도 필요하고, 기술도 필요하고, 숫자도 필요하지만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은 이겨야겠다는 절박함이다. 과연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을 보며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기 위해, 비정규직이나 청년 실업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아니면 세월호 사건으로 원통하게 죽어간 아이들과 유가족들의 한을 풀기 위한 진상규명에 당 차원에서 얼마나 절실하게 매달리고 있다고 느낄 것인가? 배째라 하고 버티는 새누리당에 맞서 내가 이토록 간절히 밖에서 원하는 것을 의회정치라는 장 내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해결하기 위해 몸을 내던지는가? 불행하게도 새정치민주연합이든 구 민주당이든 이런 간절함에 답하지 못했다.

 

1969년 9월 신민당이 스스로 해산을 한 적이 있다. 다른 정치세력과 합당을 하는 과정에서 해산한 것이 아니다. 중앙정보부에 포섭되어 3선개헌 지지로 넘어간 전국구의원들의 의원직을 박탈하기 위해 이들 3인을 제외한 의원들을 제명하고 당을 해산한 뒤 다시 당을 재조직했다. 당시 정당법에 따르면 정당이 해산되면 소속 전국구의원의 의원직은 자동 상실되나 그 의원이 당으로부터 제명을 당하면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당 해산은 편법이라면 편법일 수 있지만, 대중들은 신민당의 편법을 탓하기보다는 신민당이 정말 절절하게 3선개헌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인정해주었다. 겨우 40석 남짓한 의석을 가졌던 신민당은 물론 3선개헌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러자 대중들은 1971년 8대 의원선거에서 신민당 의석수를 89석으로 두 배로 늘려주었다.

 

우당 노릇 할 것인가, 야당이 될 것인가

 

1985년의 2ㆍ12 총선도 야당의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대 사건이었다. 광주학살을 거치며 정권을 잡은 전두환 일당은 박정희가 5ㆍ16군사반란 직후에 했던 짓 그대로 정치정화법이란 것을 만들어 유력한 야당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이들은 안기부를 시켜 말랑말랑한 사람들만 모아 민주한국당을 만들었다. 이북의 조선로동당에 맞서려면 여당과 야당이 갈라져 싸우면 안 되고 여당과 야당은 벗으로 지내야 한다며 ‘우당’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 역할 못하는 관제야당을 2중대라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이번 7ㆍ30 승리가 김한길과 안철수의 퇴진을 가져와 새누리당에 부담이 될 것이라는 분석기사를 나는 처음에는 풍자와 야유로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출범 이후 시중에 이런 얘기까지 돌았었다. “근혜는 좋겠다. 한길이 하고 철수 같은 친구가 있어서!” 안기부가 야당을 만들어 주고 야당이 2중대 소리를 듣던 민한당 시절에도 “두환이는 좋겠다, (유)치송이가 있어서” 따위의 처절한 농담은 들어본 적이 없다. 새정치민주연합은 한국 야당 사상 가장 빼어난 우당이 되었던 것이다. 야당이 참패했는데 통쾌하긴 처음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1985년의 2ㆍ12총선은 전두환의 우당을 뒤집어엎은 일대 사건이었다. 1중대 민정당, 2중대 민한당의 기대도, 숱한 정치평론가들의 예상도 대중들의 선택 앞에 무참히 깨져버렸다. 민심의 거대한 폭발 앞에 민한당 간판으로 당선된 사람들 거의 전원이 선명야당 깃발을 든 신민당(한 번 쓴 정당명은 다시 써서는 안 된다는 희한한 법 때문에 신한민주당으로 등록하고 약칭을 전통적인 야당인 신민당으로 사용)으로 옮겨갔다.

 

11대 국회에서 82 석을 자랑했던 민한당은 손쓸 사이 없이 사라져 버렸다. 2ㆍ12총선의 돌풍은 김대중, 김영삼 양 김씨들만의 힘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일반 시민들과 재야민주세력의 힘과 염원이 신민당을 살려낸 것이다. 아마도 그때로부터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야당사에서 “전통보수야당 한민당의 적통을 이어받은” 운운하는 말이 사라지기 시작한 때를. 한국의 야당이 태생의 한계, 출생의 비밀을 벗어나기 시작한 때를.

 

한국야당사에서 또 하나 기억해야 할 대사건은 1990년 보수대연합의 3당합당과 1991년 분신투쟁을 거친 뒤 1992년에 맞은 14대 총선이었다. 3당합당으로 출현한 민자당은 국회 의석 299석 중 무려 221석, 비율로 치면 74퍼센트를 민자당이 독식했다. 그러나 다음 번 총선에서 시민들은 민자당에 149석, 민주당 (평민당과 이른바 꼬마민주당이 총선 후 합당)에 97석을 주어 상당한 균형을 회복시켜 주었고, 다음 번 대통령 선거인 1997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진영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8대, 10대, 12대, 13대, 14대, 17대 총선에서 민주진영이 제대로 싸워보겠다고 하면 대중이 지지해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중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딱 하나 할 수 없는 게 있다. 7ㆍ30재보선 이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한 이야기지만 이길 의지가 없는 당을 이기게 하는 재주는 없다. 화타 편작이 살아와도, 허준이 환생을 해도 이미 숨넘어간 사람 살려낼 수 없는 것처럼 집권의지 없는 자들에게 권력을 넘겨줄 재주는 없다.

 

실패로부터 배워라

 

야당은 실패로부터 배워야 한다. 이제 30년 군사독재가 만들어낸 김대중이나 김영삼 같은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 또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도 안 되는 시기이다. 하늘에서 또 새로운 인물이 뚝 떨어져도 안철수보다 잘 한다는 보장이 없다. 결국 무너진 집을 있는 자재로 재건하여 1년 반 남은 총선과 3년 조금 넘게 남은 대통령선거에 대비해야 한다. 남아 있는 분들은 다들 실패했었고, 다들 상처를 입었었다. 흠집이 좀 났다고 들보로 기둥으로 쓸 재목을 도끼로 패서 군불이나 쬘 땔감으로 써서는 안 된다.

 

열린우리당 시절 당내에서 이른바 민생파를 대표했던 정동영은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바닥을 기며 거기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현재 당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대선후보급 정치인으로서는 유례없는 변신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백범 김구나 장준하 외에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을 반성하고 새롭게 태어난 일은 별로 선례가 없다. 그러나 2009년 재보선에서 무리하게 전주에 출마한 것, 그 부담으로 다음 선거에서 승산이 희박한 강남에 출마했다가 낙선함으로써 입지가 극히 좁아졌다.

 

새누리당이 그의 동작을 출마를 가장 경계했다지만, 그는 당 지도부의 집중적 견제로 명함도 내지 못했다. 광주을에서 깃발을 들었다가 모욕을 당한 천정배 역시 서울시장 출마가 결과적으로 오판이었고,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결함이 있지만, 내용으로 볼 때 민주진영의 현역정치인 중 그만한 잠재력을 가진 인물을 찾기 어렵다. 문재인 역시 지난 대선에서 실패했고, 또 남북대회 회의록 정국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하긴 했지만, 참 좋은 사람이다. 문제는 지난 대선에서 부족했던 2퍼센트를 어떻게 평가분석하고 보완해 내느냐 하는 점이다.

 

노무현의 정치적 상속자일 수밖에 없는 그는 노무현이 남긴 부채에 대해서는 노무현 자신이 반성한 것만큼 처절한 반성을 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은 태평성대의 민주주의 지도자로 아주 훌륭하겠다 싶지만, 지금 같은 난세에 박근혜 정권과 같은 지독한 집단에 맞서 민주주의를 회복할 지도자로서 적합한 인물인가 하는 점에서 여전히 회의적이다. 문재인은 개인의 인격적 고매함으로 많은 부분을 메울 수 있지만, 이른바 친노 그룹의 다른 정치인들은 그런 자산을 갖고 있지 않다. 지금 그들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당시 “우리는 폐족이다”라는 절절함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사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스스로 정치적 존엄사를 택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지금 친노 정치인 중 금뱃지 달고 있을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이제 50줄에 접어들어 더 이상 486이라 불리기도 민망해진 이른바 486 정치인들의 실패는 더욱 참담하다. 그들의 전성시대는 20대였다. 컴퓨터에서 286 -> 386 -> 486 -> 586은 업그레이드를 상징하지만, 전성시대가 286이었던 정치인들에게 286 -> 386 -> 486 -> 586은 노쇠만을 의미할 뿐이다.

 

그들은 거의 30년 째 학생회장하고 있을 뿐,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내의 진정한 올드 보이는 이들보다 10년 쯤 위인 정동영, 천정배가 아니라 바로 이들이다. 당의 세대교체가 절실하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뼈를 깍는 반성을 하겠다고 하자, 뼈를 깎겠다고 했을 때마다 진짜로 뼈를 깎았다면 뼈가 이쑤시게만해졌을 것이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온다. 뼈를 깎겠다고 하면서 다들 남의 뼈 깎을 궁리만 했다. 그것도 뼈도 없는 연체동물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실패로부터 처절하게 배워야 한다. 그것만이 당도, 개인도 살 길이다.

 

야당성과 호남정치의 복원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당은 야당성을 회복해야 한다. 의석이 130석이나 되는 새정치민주연합에 없는 딱 한가지가 야당성이었고, 넘쳐났던 것이 우원식 의원이 지적한대로 귀족주의였다. 실력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IMF 외환위기 등이 겹치며 너무 빨리 여당이 되다보니 일은 못하고 야당성만 잃어버렸다. 민주정권 10년에 대중들의 지형은 아주 넓어졌지만, 정작 정치판에 남은 사람들은 투쟁의 근육을 잃어버렸다.

 

어쩌면 여당으로 정치를 시작한 사람들, 호남의 지역구도 속에서 전국으로는 야당이지만 지역에서는 여당 노릇한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을 만들며 정강정책에서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6·15 남북공동선언과 10·4 남북정상선언 등을 삭제하겠다는 평지풍파는 당 지도부가 가진 역사의식에 대해 당 안팎의 민주진보진영으로 하여금 근본적인 회의를 하게 만들었다. 이런 자세로 어떻게 수구세력과의 역사전쟁을 치를 수 있겠는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투쟁성의 회복이 절실하다. 말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그리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한국에서 대의정치는 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거리정치, 운동정치가 계속되는 이유는 바로 대의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의정치는 대중들의 현실 생활 속의 문제를 국회로 가져와 국회에서 대신 싸우고, 대신 논의하고, 대신 해결방안을 마련하는 일이다. 당사자인 대중들은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자신의 문제를 갖고 싸워주는가를 볼 것이다. 물론 국회의원들이 당사자의 절절함을 보여준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절절함을 보이지 않는다면 시민들이 야당을 지지할 이유가 없다. 세월호 특별법에서조차 절실함을 보이는 의원이 많지 않은데 말이다. 야당은 중도니 우클릭이니 하는 망령에서 벗어나야 한다.

 

역사에서 보라,

 

야당이 언제 표를 얻었는가를. 중도니 우클릭이니 내세웠던 유진산, 이철승, 이택돈, 이택희 등등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어떤 것인가를. 야당성 회복은 민주주의 계승의 역사성, 민주주의를 위해 절실하게 싸우는 실천성,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의 꿈을 담아내는 진보성의 강화에서 찾아야 한다.

 

당 앞에 놓인 시급한 과제는 호남정치의 복원이다. 천정배가 광주를 택한 것은 국회의원 한 번 더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천정배는 호남정치의 복원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고, 그 때문에 공천에서 배제되었다. 한국야당사에서, 아니 한국현대사에서 호남은 특히 광주 이후의 호남은 단순히 하나의 지역이 아니다. 광주의 정신, 아무 것도 안하면 반드시 진다는 DJ의 정신을 복원하는 것이 호남정치의 복원이다. 호남은 분명히 새정치민주연합을 거부했다. 지금 호남 정치인 중 역사적으로 광주 정신, DJ 정신을 계승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또 하나의 과제는 민주진보진영의 단결이다. 동작을에서 노회찬이 패배했다고 단일화 무용론이 나오는데 그것은 착각이다. 단일화는 승리를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정치공학에 따른 단일화가 아닌, 가치의 공유와 상호신뢰에 기반을 둔 단일화가 필요하다. 진보진영 역시 짧게는 지난 10년의 역사 속에서, 길게는 분단 70년의 역사 속에서 한국의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분열 사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왜 조봉암은 독자적으로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 이전에 민주당 입당을 시도했던가?

 

이제 우리는 좀 더 장기적, 좀 더 전략적, 좀 더 현실적인 안목을 갖고 민주진보진영의 재구성을 고민해야 한다. 7ㆍ30 재보선 성적표가 나오기 이전에는 몇몇 사람들이 정동영, 천정배 등 새정치민주연합 내의 진보적 정파가 떨어져 나와 심상정, 노회찬 등과 합치는 방안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변화가능성을 높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실험을 권유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새정치민주연합이 해체 수준의 개혁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몰린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해서도 민주진보진영 전체가 자기 문제로 끌어안아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먼 친척인 유표에게 얹혀 지낼 때의 일이다. 융숭한 대접 받으며 놀고먹던 유비가 어느 날 뒷간에 가서 보니 허벅지에 몰라보게 살이 쪘다. 늘 전쟁터에서 말을 타고 다니느라 허벅지에 살이 찔 겨를이 없었는데, 편안하게 세월만 죽이다보니 허벅지에 살이 오른 것이다. 유비의 탄식을 비육지탄(髀肉之嘆)이라 한다. 싸움의 근육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탄식이다. 이 뼈아픈 자각을 하고 나니 유비의 눈이 비로소 천리마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유비가 천리마를 얻은 곳의 땅이름이 하필이면 신야(新野)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새로운 야당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민주주의 시대에 정치인들에게 천리마는 시민이다. 지금 자기 등에 말안장 얹어주길 바라는 시민, 제대로 된 정치인에게 기꺼이 자기 등을 허락할 시민은 한국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많다. 10년 전을 돌아보라. 역사의 기회는 생각보다 자주 온다. 싸움의 의지를 다지고 싸움의 근육을 회복할지어다. 신야를 달리는 천리마의 울음소리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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