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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앞에 다시 던지는 질문, ‘교회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서울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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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앞에 다시 던지는 질문, ‘교회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124위 시복식까지 세월호 가족 농성이 계속된다면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4/07/29 [18:02]

세월호 참사 앞에 다시 던지는 질문, ‘교회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124위 시복식까지 세월호 가족 농성이 계속된다면

서울의소리 | 입력 : 2014/07/29 [18:02]

예은이 아빠는 오늘도 혹시 꿈속에서 예은이를 만날까 간절히 기대하며 단식과 회의로 지친 몸을 누인다고 합니다. 예쁜 아가, 미치도록 만지고 싶었던 예은이가 꿈길에 아빠를 마중 나왔다 수척해진 모습을 보며 많이 놀랄지 모르겠습니다.

 

성호의 누나는 하루에 6시간씩 세월호 피해자들과 가족들을 비방하는 댓글들을 모니터링 한다고 합니다. “생각 없이” 쏟아 내었다는, 차마 떠올리기도 싫은 익명 혹은 실명의 폭언들이 하나하나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누나의 야윈 가슴에 박힙니다. 폭언은 잦아들지 않고 있답니다. 오히려 심해지고 있답니다.

 

광화문에서 국회에서 곡기를 끊은 지 열엿새 째, 엄마들과 아빠들은 기어이 맥박을 잃고 피를 토하고 쓰러지며 병원에 실려 가고 계십니다. ‘105번째 4월 16일’을 맞고 있는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의 모습입니다.

▲ 25일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유가족 대표가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고 있다. ⓒ정현진 기자  

 

304개의 심장, 608개의 눈동자

 

배가 왜 침몰했는지, 왜 아무도 구조되지 못했는지,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검경은 유병언 일가를 내세워 저질 사기극을 벌이며 온 국민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을 이용한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언론 플레이는 결정적인 듯 보입니다. 가족들은 특별법을 통해 오로지 진상규명만을 원할 뿐, 돈과 특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더러운 무리들은 ‘유족들이 의사자로 대우해 주고 연금도 달라 하고 남은 자녀의 특례 입학을 요구한다’는 천박한 루머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세월호가 앗아간 생명들을 돈으로 환산하고 있습니다. 저들에게 단지 숫자일 뿐인 304는 백여 일 전까지만 해도 힘차게 뛰며 따뜻한 피를 길어 내던 304개의 심장입니다.* 호기심 가득 세상을 둘러보며 삶의 의미를 찾던 608개의 맑은 눈입니다. 그리고 그 맑은 눈들을 바라보던 가족들의 가슴에, 가족들과 함께 울고 있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남게 될 무한대의 상처입니다. 저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인간이 아니라 썩은 고깃덩어리들이기 때문입니다. (* 304는 세월호 참사 사망자 294명과 실종자 10명을 합한 숫자입니다. ―편집자)

 

이 와중에 8월로 예정된 교종의 방한을 앞두고 저는 기대보다 우려가 큽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교종의 방한이 정권의 이익을 위해 이용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청와대와 음성 꽃동네를 포함하는 실망스런 방한 일정 때문만이 아닙니다. 최근 발표된 수행 기자단 명단을 보니 조중동을 비롯한 어용 언론들을 통해 교종의 메시지를 듣게 될 모양입니다. 암담하고 비참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걱정스러운 것은 혹시라도 교종의 시복 행사 전까지 특별법 제정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피해자 가족들의 광화문 농성 천막이 철거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발 기우이기를 바랍니다만, 그러고도 남을 만한 정권을 보건대, 선택을 해야 할 것은 교회입니다. 어떤 행동을 하실 겁니까? 누구 편에 서실 겁니까? 강도 만난 이웃을 보듬어 안고 보살피는 사마리아인이 될 겁니까, 아니면 강도들과 손을 잡고 그를 팔아넘기는 협잡꾼이 될 겁니까? 가족들이 원하는 한, 광화문은 가족들을 위해 지켜드려야 합니다. 교종 방문이 돌이킬 수 없는 수치와 굴욕의 시간으로 기억될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  지난 8일 십자가를 지고 안산 단원고등학교에서 도보 순례를 시작한 세월호 참사 희생자 아버지 김학일 · 이호진 씨 ⓒ정현진 기자  

 

세월호 참사 앞에 다시 던지는 질문, ‘교회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안타깝게도 교종 방문을 교회 양적 성장의 호기로 생각하는 지도자들이 많이 있는 듯합니다. 몇 주 전 만나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던 한 개신교 신학자가 제게 이런 직언을 하더군요. 양적 · 질적 성장 저하와 사회적 고립이라는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 주류 개신교의 전철을 밟으려 기를 쓰고 있는 천주교를 보자니 안타깝다고. 만약 교회 지도자들이 현명하다면, 신자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더 낮고 외로운 곳으로, 이 땅 고통 받는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요.

 

제 자신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그의 직언은 옳습니다. 저는 나이 들어 제 선택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웃 종교에 대해 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지만, 또 때때로 교회의 못난 얼굴을 보며 부끄러워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지만, 제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이유는 제도교회의 “성장” 때문이 아니라 이 땅 고난의 현장에 늘 함께하는 천주교 평신도들, 수도자들, 그리고 사제들 때문입니다.

 

처음 저를 사로잡았던 주의 성체 또한, 높고 눈부시고 화려한 성전 제대 위에 모신 몸이 아니라 추운 겨울 명동성당 앞, 더 이상 물러날 곳 없었던 지친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위해 잘게 부서져 그들과 하나 되던, 길거리 미사 때 만난 몸이었지요. 그리고 저는 지금도 여전히, 강정과 밀양과 팽목항과 대한문과 국회 앞, 상한 영혼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하며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는 그와 한 몸 되기 원합니다. 그럴 수 있다고 믿기에 저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교회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예수께서 바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교회가 그의 존재와 권위와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입증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숭배받기보다 깨어지고 부서져 우리와 하나 되길 원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우리와 함께 살기를,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와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애타게 원했습니다(루카 22,15).

 

그러다 죽음이 당도했을 때에는 죽음으로써 기꺼이 우리를 살리시고, 또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유일무이의 권위를 우리에게 넘기셨습니다. 되살아 난 그를 황급히 붙잡고 증거하고 싶어 했던 빈 무덤가 막달레나의 손을 뿌리치며 그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라고, 자신을 대신해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라고 부탁했지요. 그가 가리킨 손끝, 그가 머물던 자리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안락한 성전이 아니라, 완벽한 법전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지난 4월 30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봉헌된 ‘세월호 참사로 인한 희생자들과 모든 이웃을 위한 참회의 미사’ ⓒ정현진 기자  

 

예수를 기억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품는 교회, 그런 교회에 필요한 부드럽고 느슨한 영성

 

예수는 오로지 그를 기억하는 우리들의 몸과 말과 행동을 통해서만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교회가 예수에 관한 기억을 품고, 그를 따라 살며, 그의 기억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을 하나로 품는 바구니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이 성글고 품이 넉넉한 바구니라, 그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간직하고 있는 조금씩 다른 기억과 의견들을 너그럽게 감싸 안을 만큼 여유로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 교회에 필요한 영성은 “우리가 진리를 갖고 있다”고 천명하고 강요하는 규범적 영성이라기보다, 그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작은 이야기들과 기도와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공동체적, 관계적 영성입니다. 바로 길거리 미사에서 경험하듯 말입니다.

 

이 부드럽고 느슨한 영성은 질서와 위계와 명령을 준행하기보다 흩어지고, 깨어지고, 감싸 안고 싶어 합니다. 원칙과 절차와 방식을 제시하기보다 탄식 속에서 분노 속에서 아직 웅얼대고 있을 뿐인 기도들을 듣습니다. 고공에 높이 떠서 지침을 제시하기보다 상처 입은 사람들 속으로 낮게 숨어들어 그들이 차마 발견하지 못하는 희망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흩어졌던 천 개의 바람이 얽혀 일치를 지향하는 하나의 긴 숨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펼쳐 넉넉한 공간을 드리웁니다.

 

예수를 닮아 살고자 하는 영성은 그런 영성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인간의 거리를 사랑하는 “거리의 사제”라고, “배고픔과 목마름에 주린 사람들 몸에서 예수의 상처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강조하는 영성 또한 그런 영성입니다.

 

내일 우리는 ‘106번째 4월 16일’을 맞습니다. 단원고에서 팽목항까지 1900리 길을 걸은 웅기 아빠와 승현이 아빠, 승현이의 누나는 노란 리본이 개나리처럼 피어난 십자가를 메고 이제 또 교종이 온다는 대전으로 향하는 순례 길에 오를 것입니다. 4월에 피어 7월의 땡볕에도 지지 않는 저 개나리가, 너무 긴 시간을 끌지 말고 제철인 봄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기를 바랍니다.

 

이 힘든 싸움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304명의 영혼을 카이사르와 맘몬의 손에 맡길 수 없기에,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멀리서나마 아빠들과 누나를 뒤따르며 저는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느님, “죽음의 잠 자지 않도록 이 눈에 빛을 주소서”(시편 13,3ㄴ).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교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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