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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보는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 빛의 혁명 이끌다

이득신 작가 | 기사입력 2025/10/16 [17:14]

다시 돌아보는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 빛의 혁명 이끌다

이득신 작가 | 입력 : 2025/10/16 [17:14]

 

삼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1972년 10월 친위 쿠데타로 유신헌법을 만들어 영구 집권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후 재야와 신민당을 위시하여 수많은 민주 세력이 유신철페운동을 가열차게 진행했으며 박정희는 이에 맞서 긴급조치를 연달아 발동했다. 반헌법적이고 반인권적인 폭압정치가 도를 넘어선 상황이 되었다. 이후 장준하 선생이 포천의 약사봉에서 박정희 유신정권에 피살되었으며 김대중을 도쿄의 한복판에서 납치하여 태평양 한가운데 빠트려 죽일 계획을 세웠으나 미국에 의해 발각되어 무산되기도 했다.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에게는 염산테러가 자행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력정치인에 대한 테러와 살해위협은 물론이고 일반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천인공노할 사건을 벌이기도 한다. 

 

1979년 8월 9일, 가발 업체였던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90여 명이 회사 운영 정상화와 노동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서울특별시 마포구 도화동 신민당사에서 점거 농성 사건이 벌어진다. YH무역은 1966년 10여 명의 사원으로 출발한 가발 회사로, 가발 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에 힘입어 창립 4년 만인 1970년에 종업원 3,000명의 대한민국 최대 가발 업체, 수출 순위 15위의 대기업으로 급성장하였다. 그러나 YH무역은 창립자 장용호 회장이 경영하면서 미국으로 외화를 반출시키기도 하였고,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고용하는 것은 물론 노골적인 불법 해고, 감봉은 물론 임금미지급 등의 행위를 자행했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파업을 진행하자 사측은 직장폐쇄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노동자들을 옥죄게 된다. 이에 노동자 187명이 신민당사를 찾아가 사측의 부당한 처사를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를 박정희 정권이 강제 진압하기에 이르렀고, 이 과정에서 수십명이 부상당하고 심지어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이를 규탄하는 성명을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발표하면서 압도적 다수당인 공화당 국회가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을 제명하게 된다. 당시 김영삼 총재가 했던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말은 오늘날까지 김영삼의 어록에 남아 회자되고 있다.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은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부산 지역 민심을 건드렸고, 이 민심은 부마민주항쟁을 촉발하였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계엄군을 동원해 강제진압하게 되면서 항쟁은 종료된다. 이 사건이 터지자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을 죽였는데, 100만 명쯤 탱크로 밀어  죽여 버리는 것은 문제없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 부마민주항쟁은 김재규 장군의 10.26 사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유신 체제 종식의 민주항쟁으로 평가된다.

 

한편, 부마민주항쟁 46주년인 16일 김민석 국무총리는 ‘부마민주항쟁의 용기가 2025년 빛의 혁명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김 총리는 경남 창원 3·15 아트센터에서 열린 제46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부마민주항쟁은 유신독재의 어둠을 뚫고 민주주의의 새벽을 연 위대한 시민 항쟁이었다’고 평가했다. 

 

김 총리는 ‘부마민주항쟁은 우리에게 불의한 정권, 불법적인 권력은 국민의 항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분명한 교훈을 남겼다’며, 지난 12·3 계엄 이후 열린 시민의 집회를 두고 ‘1979년 부마의 외침이 2025년 빛의 혁명으로 되살아났던 순간’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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