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웹자서전'.."법대생이 된 소년공, 약자에게 힘이 돼 보겠다"

"약자에게 힘이 되어 보겠다는 결심은 막연했지만 마음에 들었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21/12/22 [16:32]

 

소년공, 법대생 되다

 

독서실에서 여름엔 모기와 싸우고 가을에는 오들오들 떨면서 공부했다. 담요가 있으면 나도 모르게 덮고 잠들어서 담요도 도로 집에 가져다 놓았다. 

 

책상에 볼펜을 곧추세워 놓고 공부하다 졸면 이마가 찔리게 했다. 나중에는 가슴 닿는 부분에 압정도 붙여놓았다. 그때 많이 찔렸다. 처음 찔릴 때는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나중엔 찔린 채로 자고 있기도 했다. 덕분에 참고서 곳곳에 핏자국이 남았다. 말 그대로 혈투였다. 

 

나와 함께 공부했던 친구 심정운이는 이렇게 말한다. 

“재명이는 한 번 한다고 하면 그렇게 지독하게 하는 친구였어요. 하여튼 집중력과 끈기는 천하무적이었죠.”

 

학원에서 점심과 저녁에 양은도시락의 식은 밥을 먹었는데 나중엔 도시락도 한 개로 줄였다. 배가 부르면 졸렸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애처로웠던 엄마는 밥을 꽉꽉 눌러 도시락을 싸주곤 했다. 그 시절 엄마가 준 차비로 학원에 가고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먹으며 공부했다. 행복했다. 그렇게 여한 없이 공부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마침내 대입 학력고사 일인 1981년 11월 24일이 밝았다. 대입준비를 시작할 때 내 모의고사 성적은 전국 30만 등 밖이었다. 그렇게 시작해 8개월 공부 끝에 마지막으로 본 모의고사에서는 2천 등 안에 드는 성적을 올렸다. 장학금을 받으려면 최상위권에 들어야 했다.  

 

결과가 나왔다. 불수능이었는데 최상위권인 285점이었다. 장학금 대상 안에 들었다. 성공! 

그 성적이면 우리나라에서 가지 못할 대학은 없었다. 

어디를 지원할 것인가? 

 

절대적인 기준은 장학금으로 학비를 충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앙대 선호장학생 A급은 3학년까지 등록금 면제에 매월 20만 원씩의 특대장학금을 받을 수가 있었다. 커트라인이 가장 높은 과가 의대와 법대였는데 의대는 추가비용을 내야 해서 애초에 제외했다.  

 

그렇게 중앙대 법대생이 됐다. 특대장학금 20만 원은 내가 공장에서 받았던 월급의 세 배에 달했다. 

내 입장에선 꿈 같은 일이었다. 어깨가 으쓱했다. 

 

입학식이 보름 넘게 남았을 때 미리 교복도 맞추고 모자도 샀다. 대학교복을 입는 게 촌스러운 행동이라는 건 몰랐다. 뭐가 어떻든 평생에 교복 한 번 입어보는 것이 꿈이었으니까. 성남시장 시절 무상교복 정책은 그런 경험에 뿌리가 닿아있다. 

 

대학 입학식 날, 엄마와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연한 살구빛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엄마와 대학교복 차림의 내가 중앙대 교정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서 미소 짓고 있다. 엄마는 그날 이렇게 말했다. 

 

“재맹아, 내는 인자 죽어도 한이 없데이. 니는 크게 될끼라고 내가 그켔제?”

우리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환한 봄날 아래 서 있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약자들에게 힘이 되어 보겠다

 

아버지가 하루는 내가 받게 될 특대장학금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재선이 형 대입 학원비를 자신이 댈 터이니 월 20만원의 특대장학금을 맡기라는 것이었다. 

 

이전에 재선 형은 나와 같이 대입 검정고시를 봤다. 중장비 정비자격증을 따고 부산 근처의 원자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중에 시험을 본 것이다. 

공부하기에 나보다 더 열악한 상황이었다.

 

형은 시험 보기 이틀 전 집에 와서 밥을 먹으면서도 공부를 했고, 그렇게 시험을 통과했다. 이항정리와 포물선을 가르쳐준 것도 나였다. 이제 재선 형은 앞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학원에 다니며 대입을 준비할 참이었다. 

 

특대장학금을 맡기라는 아버지의 말에 나는 펄쩍 뛰었다. 

“싫어요. 집에서 어떻게 공부를 하고 학교를 다녀요? 장학금으로 서울에 방 얻어서 재선 형이랑 공부할 거예요. 재선 형 학원비도 제가 낼 거구요!”

 

나는 형이 8개월 간 돈 걱정 없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밀어줄 참이었다. 하지만 집 한 채 마련하는 일에 몰두하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재선 형에게 학원비를 충분히 줄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오리엔트 공장을 다니며 3개월 월급을 모아 학원비를 댔던 것처럼, 장학금으로 형의 미래에 투자할 생각이었다. 재선 형도 공부하면 잘될 거라는 확신이 내겐 있었다.  

 

그렇게 버티자 아버지도 특대장학금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특대장학생으로 법대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은 친척과 이웃들은 내가 마치 판검사가 된 것처럼 받아들였다. 졸지에 사법고시 보는 것이 당연해지고 있었다. 법대 가면 사법고시를 보는 게 일반적이라는 것은 대학에 붙고 나서 알았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매 맞는 노동자로 살기 싫어 시작한 공부였다.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문득 아직도 공장에 남아있을 아이들이 떠올랐다. 내게 최초로 유행가를 가르쳐주었던 나보다 어렸던 소년공도... 

 

함께 새벽까지 일하고 공장바닥에서 유행가를 흥얼거릴 때 우리는 친구였다. 문득 그런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하는 사람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리하여 입학식을 앞둔 82년 2월의 어느 밤,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 어차피 시작한 것,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개업하겠다. 그래서 약한 자를 돕겠다. 검은 그림자 속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 보겠다. 

 

약자에게 힘이 되어 보겠다는 결심은 막연했지만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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