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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쫓기는 신세 전두환... 23년 만의 응징 피고인으로 다시 심판대에 서다

전두환, 23년만에 '명예 훼손 혐의' 다시 재판대에 피고인으로 선다.. 11일 광주지법 출석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9/03/11 [08:05]

31년 쫓기는 신세 전두환... 23년 만의 응징 피고인으로 다시 심판대에 서다

전두환, 23년만에 '명예 훼손 혐의' 다시 재판대에 피고인으로 선다.. 11일 광주지법 출석

서울의소리 | 입력 : 2019/03/11 [08:05]

대통령 권세 누렸지만 전직 원수 최초 사형수가 돼, 단죄 또 단죄 뿐

 

▲전두환 회고록에는 5·18  당시 광주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로 서술했다.  

 

23년만에 다시 법정에 서는 전두환, 경찰경호· 통역(?)은 부인 이순자 씨 

 

11일 광주에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재판을 받는 전두환 씨는 군인으로서 박정희의 5·16 지지 이후 27년간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그러나 오늘 5·18 당시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해 '전두환 회고록'을 통해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며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피고인으로 다시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 이후 27년은 그야말로 잘나갔지만 1988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31년간은 쫓기는 신세와 다름없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사망 이후 군부를 장악한 실세 보안사령관으로 1980년 5·18 광주사태를 일으켜 무고한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장본인으로 아직도 전두환에 대한 시대의 응징이 식지 않고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전 씨의 집앞은 일부 태극기 모독단들과 취재진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들 중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북한군에서 내려온 특수군 소행’이라고 주장해오던 극우파 지만원 씨와 자유연대·자유대한호국단 등 극우 단체 50여 명이 '5·18은 폭동·내란'이라는 피켓을 들고 "40년 전 일을 가지고 광주에서 재판하는 것은 인권 유린"이라며 확성기로 "5·18 유공자 명단과 공적 조서를 공개하라"고 구호를 외쳤다.

 

전 씨는 그동안 알츠하이머 증세와 독감 증상 등을 이유로 갖은 핑계를 대며 계속 출석을 미뤄오다가, 법원이 구인영장까지 발부하자 결국 오늘 본의 아닌 본의로 출석하게 됐다. 경찰은 전씨의 자택 주변에 폴리스라인을 치고 6개 중대 350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전 씨가 광주에 가는 건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1988년 이후 처음이자 1980년 5·18 이후 39년 만이다. 

 

전 씨는 오후 2시 반 재판 출석을 위해 오전 8시 반경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차량으로 광주로 출발했다. 변호인과 재판 동석이 허락된 부인 이순자 씨도 함께 이동했다. 전 씨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거짓말쟁이로 비난해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번 전두환 씨 재판은 지난 2017년 4월에 낸 자신의 회고록에서 시작됐다. 1권 '혼돈의 시대'에서 5·18 당시 시민지도자였던 고 조비오 신부를 "성직자란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깎아내렸다. 조 신부 명예를 훼손했다는 거다. 5·18 당시 헬리콥터 기관총 사격이 있었다고 조비오 신부가 주장해왔는데, 이게 왜곡되고 악의적인 주장이라고 본 거다.

 

이 때문에 헬리콥터 사격이 실제로 있었는지가 쟁점이다. 전 씨 측은 1995년 검찰 수사결과를 바탕으로 사격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방부 특조위 조사 결과와 여러 목격자 진술을 보면 헬기 사격 입증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전 씨가 법정에 서는 건, 지난 1996년 내란 목적 살인으로 사형이 선고된 지 23년 만이다.

 

광주지법이 오늘 재판 촬영을 불허해 법정에 선 전 씨의 모습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부인 이순자씨는 재판정에 나란히 앉을 예정이다. 전 씨가 치매를 앓고 있어 자신이 아니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고 호소, 남편옆에 앉게 됐다. 

 

광주행에는 경호담당 경찰 5명과 함께 불상사를 막기 위해 서대문경찰서 형사팀 2개조 10여명이 동행한다. 부인 이순자 씨는 지난 1월 "내 남편은 민주주의의 아버지다"라는 황당한 주장을 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이 씨의 주장은 극우 세력과 일부 정치인들의 입을 통해 확대 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순자 씨는 올 1월 극우매체 '뉴스타운'과의 인터뷰에서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남편이 광주 재판에 나서는 것은 일종의 코미디"라고 했다. 그러면서 횡설수설하거나 앞뒤도 안 맞는 말을 하게 되면 그것을 보는 국민들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주냐며 전 씨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주장했다.

 

이는 전두환 씨가 과거 본인 스스로를 평가한 것과도 거의 같다. 전두환 씨는 2012년측근과의 모임에서 "나는 군인 출신이니까 민주주의도 군인식으로 할 위험성이 있는데…장관 같은 분이 옆에 있어서…거의 미국식과 같은 민주주의를 했다는 말이야."라고 자평했다.

 

올 1월 이순자 씨의 인터뷰는 태극기 세력의 5·18 가짜뉴스와 함께 유튜브를 통해 확산됐다. 지만원 씨는 지난 1월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가지고 계엄군에게 총질을 하고 민간인을 사살하고 그것은 한마디로 북한군입니다." 이런 주장은 제도권 정치권에서도 이어졌다. 김순례 자한당 의원은 지난 2월 전당대회에서 "종북 좌파들이 지금 판을 치고 5·18 유공자라는 이상한 괴물집단을 만들어내면서 우리의 세금을 축내고 있다."고 목청을 돋웠다.

 

5·18 망언 3인방 자한당 김진태·김순례·이종명 의원

 

총칼로 한 국가의 통치를 맡게 된 전 씨의 88년 인생이 우리에게 준 교훈 중 하나는 권력이 잘못 쓰이게 되면 국민에게 끼치는 해악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오래 간다는 사실이다. 경찰 경호, 부인과 동석 하는 등 얼핏 전직 대통령에 걸맞는 대접을 받는 듯같지만 이는 허울뿐인 겉치레다.

 

환호하는 인파정리를 위한 경호가 아니라 혹시나 욕설 등과 함께 돌아올지 모를 격렬한 항의 등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한 차원의 수비 경호라고 볼 수 있다. 또 이순자 씨 말대로 치매가 맞다면 통역이 필요할 만큼 인지기능을 거의 상실한 고령의 처량한 노인일 뿐이다.

 

1961년 5·16 지지 이후 27년 잘 나갔지만 이후 지금까지 31년은 쫓기는 신세 

 

세계일보에 따르면 육사 11기 전두환은 육사 졸업후 미국 유학(특전교육)까지 다녀와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난 이틀 뒤인 5월18일 육사생도들을 이끌고 박정희의 5·16 쿠데타 지지 행진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박정희의 눈에 들어 1988년 2월 대통령에서 물러날 때까지 27년여 승승장구했다. 1969년 동기 중 선두로 대령, 1973년 1월1일 1공수 여단장을 맡는 등 거침없이 질주했다.  

 

전두환은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 1사단장을 거쳐 1979년 보안사령관에 올라 군부 실력자 중 실력자가 됐다. 10·26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군정보수사망을 장악한 전두환은 1979년 12·12쿠데타로 군을 완전장악했다. 이듬해 5·18민주화 운동을 핑계삼아 쿠데타 집행기구인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 3권을 손에 넣은 뒤 1980년 9월 11대 대통령자리까지 꿰찼다.  
  
1981년 장충체육관에서 간선제 형식의 대통령 선거를 실시, 12대 대통령에 올라 5공화국 문을 열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약속한 이후 전두환은 몰락의 길에 들어서 1988년 2월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상상조차 못했던 말년을 맞이하게 됐다. 
1988년 11월 23일 강원도 백담사로 유배를 간 뒤 1990년 12월 30일에야 연회동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뒤를 봐 줄 것으로 기대했던 노태우는 '시대'를 이유로 외면했고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 일부 측근만 그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1995년 12월 12· 12 군사반란과 5· 18 광주민주화운동 학살 혐의 피의자로 전락한 전두환은 12월 2일 연희동 집 앞에서 '골목성명'을 내고 자신을 처벌하려는 김영삼 정권에 저항했지만 다음날 합천에서 안양교도소로 압송, 구속수감됐다.  

  
1996년 8월26일 1심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해 12월 16일 2심이 무기징역(추징금 2205억원)으로 감형한 것을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이 받아들여 전두환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다. 1997년 12월22일에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사면돼 석방됐다.  

 

 

사면 뒤 전두환은 "내 재산은 29만원 뿐"이라며 추징금을 납부하고 싶어도 납부할 돈이 없다고 해 국민적 분노를 자아냈다. 전두환이 '돈이 없다'며 버티기에 들어가자 2013년 6월 국회는 추징 환수시효(2013년 10월)을 앞두고 시효를 2020년까지 연장하는 '전두환 추징법'을 통과시켰다.  

  
관계당국이 총력전을 펼쳐 전두환 일가 재산 추징에 나섰으나 지금까지 1155억만 걷어 미납 추징금이 1050억원(47.6%)이나 된다. 추징금 환수시효(2020년 10월)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당국은 최근 연희동 저택 등을 공매(감정가 102억3286만원)에 내 놓았지만 유찰됐다.  
  
이에 맞서 전두환 측은 '공매 물건이 이순자 씨와 며느리 이모 씨, 전 비서관 이모 씨 등의 이름으로 된 점· 자택 외 머물 곳 없는 전 씨 부부가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며 공매 집행정지 취소소송을 냈다.

 

오늘 광주 시민들이 전두환에게 바라는 건, 광주 망월동 5·18 민주화운동 묘역에서 자신의 지난 과거를 반성하며 진심으로 참회하고 '사죄한다'는 한 마디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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