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로고

미국이 우리 민족을 세 번 배신한 역사적 사실(2)

친일반민족신문 동아,조선의 남북분단을 영구화한 '왜곡 보도'

이건흥 칼럼 | 기사입력 2017/05/21 [01:50]

미국이 우리 민족을 세 번 배신한 역사적 사실(2)

친일반민족신문 동아,조선의 남북분단을 영구화한 '왜곡 보도'

이건흥 칼럼 | 입력 : 2017/05/21 [01:50]

미국에 의해 두 가지 이유로 한반도가 분단되었다. 

 

첫 번째: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을 끌어드린 대가로 한반도가 분단되었다.

 

이건흥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사무총장

미국은 태평양전쟁당시 일본을 상대로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매우 힘든 전쟁을 하였다. 싸이 판 섬과 남양군도의 수많은 섬들을 하나하나 점령해 가는 과정에 미군들이 수천 명씩 죽었고 일본군들은 최후의 1인까지 끝까지 싸우겠다는 '옥처럼 아름답게 죽는다.'는 玉碎(옥쇄)작전을 펼치면서 결사항전으로 낭떠러지 절벽에서 떨어져 죽으면서도 절대 항복하지 않는 일본군의 지독한 장면을 바라본 미군들은 심리적으로 질릴 수밖에 없었고 생명을 중요시하는 미군들에게는 상상이 안 갔다.

 

따라서 미군들은 오키나와 같은 큰 섬을 어떻게 점령할 것이며 일본본토를 정상적인 군사작전으로 점령한다는 것은 엄두를 못 냈다. 일본본토를 점령했다고 해도 최강의 군대라고 알려진 만주에 주둔해있는 1백만 관동군을 상대로 싸울 생각을 하니 미국이 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위기의식을 느낀 루즈벨트대통령이 스탈린에게 소련이 만주에 주둔해있는 일본관동군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스탈린은 독일과 동부전선의 일본을 상대로 두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용한다는 것은 군사전략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미국이 핵폭탄이 완성되기 전인 1943.11.28.테헤란회담에서 루즈벨트는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의 희생이 점차 커지자 스탈린에게 재차 대일 참전을 요청하자 스탈린은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본전에 참전은 하되 그 시기는 독일이 패망한 90일 이후로 한다고 약속했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소련이 참전한 대가로 러일전쟁 이전의 제정러시아가 갖고 있었던 동북아의 기득권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훗날 한반도분단에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다급했던 미국으로서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소련은 “조르게”라는 스파이가 일본에서 활동 하고 있었다. 일본과 독일은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독일 프랑크푸르트 신문사 특파원이었던 “조르게”라는 국제스파이가 일본에서 자유롭게 정보활동을 하면서 일본이 곧 망한다는 정보 분석을 스탈린에게 계속 보고한 반면. 미국은 일본에 관한 정보가 없이 앞으로 1년 이상 더 전쟁을 끌면 미군이 백만 명이상 희생될 것이란 오판을 했다. 소련은 미국과 테헤란회담에서 약속했던 대로 1945.5.9. 독일이 패망한지 90일째 되는 날 1945년8월9일 대일본선전포고를 단행했다.

 

이날이 바로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투하로 일본이 패망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소련군이 참전하자 만주에 주둔해 있던 1백만 명의 일본관동군이 곧바로 해체되었다. 일본관동군이 너무 쉽게 무너지자 소련군은 만주의 허허벌판을 무방비상태에서 전속력으로 진군하여 대일 선전포고를 한지 3일 만에 1945년8월11일 북한에 진주하였고 남한의 일본군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소련의 탱크부대가 부산까지 여유롭게 진출할 수 있었다. 소련이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일본이 아직 항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이 한반도에 들어가려면 한 달 이상 시간이 필요한 상황에서 다급해진 미국이 소련이 한반도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1945.8.10. 워싱톤 시간 자정 무렵 국무성, 전쟁성, 해군성(SWNCC)조정위원회를 소집하여 미국 국무부의 딘 러스크대령과 국방부 작전국의 본 스틸대령에게 서울과 인천이 남한에 포함되는 분계선을 그으라고 지시했다. 딘 러스크대령과 본 스틸은 서가를 뒤져 한반도지도를 찾았으나 마땅한 지도가 없어 고민하다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만든 벽걸이 지도를 보고 30분 동안 궁리 끝에 38°선을 그어보고했다. 어떤 한국전문가와의 상의도 없이 이렇게 졸속으로 그어진 분단선임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총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와 같이 미국이 소련에게 38°선에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것을 긴급하게 제안하자 스탈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쉽게 받아 드리자 미국도 깜짝 놀랐다. 소련이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체를 얼마든지 점령할 수 있었는데 스탈린은 또 다른 욕심을 갖고 있었다. 스탈린은 38°선 이남을 미국에게 양보하는 조건으로 소련이 일본영토인 북해도를 점령하겠다는 일본분할 점령 안을 미국에게 역제안을 했다.

 

그러자 트루먼대통령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유럽에 주둔해 있던 독일승전군인 패튼장군의 탱크부대가 소련침공을 주장하자 스탈린은 원자폭탄이 없는 군사적 열세를 시인하고 미국의 한반도분할 점령 안을 그대로 받아드려 미국에 의해 한반도분단이 확정되었다. 미국은 일본과의 태평양전쟁에서 미군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소련을 끌어드린 대가로 우리민족을 희생시키면서 한반도분단을 가져왔다.

 

두 번째 분단이유, 미국과 남한친일파의 공동작품으로 한반도분단이 영구화되었다

 

친일반민족신문 동아,조선의 역사를 뒤바꾼 왜곡 보도! 동아일보의 이 '역사적인' 3상회의 정 반대 왜곡보도로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반탁운동을 '세탁'의 계기로 삼아 '애국자'로 물타기식 둔갑하는등 자칭 '반공투사'맹활약 하게 된다 ©인터넷

 

해방직후 한국의 독립 문제를 논의하기위해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외무장관모임인 이른바 모스크바3상회의가 소련에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 미국은 한국을 최대10년에서 최소5년의 신탁통치 안을 주장했고 소련은 한국을 즉각 독립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1945년12월27일자로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미국은 즉시독립주장” 이라고 1면에 대문짝만하게 거짓으로 보도했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 안을 제시한 쪽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그런데 친일언론인<동아일보>와<조선일보>가 정반대로 보도하면서 한반도 분단이 영구화되었다. 그 당시 백성들은 일본으로부터 해방과 동시에 즉각 자주독립 국가건설을 원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는데, 소련은 우리를 또다시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다.”는 정반대로 <동아일보>가 왜곡보도하면서 “좌익세력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아 반공여론을 유도하면서 친일파들이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한반도분단을 악용했다. 해방직후 우리나라백성들이 신탁통치에 강한거부감을 보였던 이유가 36년간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우리민족이 스스로 자주독립 국가건설에 대한 희망이 불타오르고 있었는데 또다시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승만과 김구 그리고 좌익세력인 조선인민당에서도 한목소리로 신탁통치반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거부!”를 천명했고, 온 국민전체가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 생각하며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동아일보>와<조선일보>의 惡意(악의)적인 왜곡보도와 거짓선동에 크게 자극받은 일반백성들은 무조건 좌익을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사람으로 매도하면서 유혈충돌까지 빚어지면서 남한사회전체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친일파들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왜곡보도를 통해 조국의 분단을 서슴지 않고 선택한 것이 친일 민족반역자들의 본색이었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기 전부터 한반도를 신탁통치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3년 영국처칠수상과 워싱턴회담에서 한반도 신탁통치를 최초로 거론했다. 그리고 1945년2월 미국, 영국,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한국은 20~30년간의 신탁통치를 해야 된다고 미국이 주장했다. 루스벨트대통령이 한국의 신탁통치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이유가 한국은 조선왕조시대에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당했기 때문에 민주주의경험도 없고 나라를 통치할만한 능력이 없다. 따라서 한국을 20~30년간 미국과 소련이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소련의 스탈린은 20~30년은 너무 길다. “신탁통치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는데 합의를 하였다. 따라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영국·소련·중국의 4개연합국이 한반도를 5년간 신탁통치를 하기로” 1945년12월16일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 측 주장은 한국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한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 4개연합국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역할만 하기로 돼 있었다. 따라서 말이 신탁통치이지 실질적으로 한국을 통치하는 기본주체가 한국의 임시정부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주권은 침해당하지 않는다고 소련이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주장은 정반대로 최대10년에서 최소5년의 신탁통치 안을 내세우면서 4개연합국이 한국을 직접통치하자고 주장했으나, 소련의 강력한반대로 신탁통치기간은 5년으로 하고 한국임시정부가 한국을 직접통치하는 것으로 결정해서 발표했다. 모스크바3상회의결과가 소련 측 주장대로 합의된 것이 알려지면서 가장 크게 당황한 것은 친일파들이었다.

 

좌우합작으로 한국임시정부가 세워져서 친일파청산이 이뤄졌을 경우 자신들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친일파들은 해방과동시에 북한의 좌익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제일먼저 친일파청산이 이루진 것을 보고 크게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좌익세력과는 물과 기름같이 원수지간이었다. (3회에 계속)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PHOTO
1/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