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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 신부] 육화, 그 약함에 대하여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6/12/28 [15:20]

[조현철 신부] 육화, 그 약함에 대하여

서울의소리 | 입력 : 2016/12/28 [15:20]

성탄, 그리고 연말이다. 지난 한 해, 우리나라 현실을 돌아본다. 한국은 빈곤사회다. ‘짤짤이 순례길’이라고 한단다. 노인들이 500원씩 나눠 주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을 자조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순례길에 나선 노인들의 일과는 바쁘고 고달프다. 새벽 5시부터 줄을 선다. 돈을 받으면 급히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하루 종일 밖에서 지내며 열 군데를 돌아다니면 5000원 정도를 번다. 이 노인들의 주요 수입원이다. 이게 우리나라 노인들의 현실이다. 노인 인구의 절반이 빈곤층이다. 우리나라도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으니, 노인의 현실은 곧 우리나라 전체의 현실이 될 것이다.

 

'짤짤이 순례길'은 노인들이 500원씩 나눠 주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을 자조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교회나, 절 복지시설을 순례하면서, 500원을 받아 모아서 생활하는 70,80대 노인들이 많다. (MBC 동영상 갈무리)

 

우리나라는 불평등 사회다. 2014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배당금이 222억 2200만 원이었다고 한다. 대략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2000년치 월급이다. 물론 그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무려 2000년을 살아야 만져 볼 수 있는, 꿈속의 금액이다. 다음은 지난 12월 22일자 <경향신문>의 한 칼럼이 인용한 조사 결과들이다.

 

2015년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 “부의 대물림, 가난의 대물림이 어떤 수준이라고 생각하는가?” 전체 응답자의 90.7퍼센트가 심각하다고 대답했다. “노력하면 계층상승이 가능한가?” “그럴 가능성이 낮다.” 80.9퍼센트였다. 다음은, 2015년 신임5급 사무관들에 대한 중앙공무원교육원 의식 조사.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 부의 분배는 공정하게 이뤄지는가? 응답자의 91.5퍼센트가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 70.1퍼센트의 응답, 계층 간의 이동이 가능하지 않다. 66.8퍼센트의 응답, 우리 사회는 기회가 균등히 보장되지 않는다.

 

광장의 외침에 ‘박근혜 퇴진’과 함께 ‘재벌 척결’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짧게 잡아도 일제 때부터, 우리사회는 정경유착으로 부패할 대로 부패했다. 이번에도 재벌들이 박근혜, 최순실에게 돈을 뜯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숙원을 해결해 준 대가로 수고비를 준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걸 뇌물이라고도 한다.

 

성탄의 기쁜 시기에 우리의 어두운 현실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육화와 강생으로 하느님이신 말씀이 가상현실이 아니라 당시의 진짜 현실로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이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엄혹했다. 헤롯 대왕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아기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인근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여 버릴 정도로 현실은 거칠고 험악했다.(마태 2,16-18) 현실에선 어둠과 절망이 빛과 희망을 짓누르고 있었다.

 

둘째, 우리가 성탄의 기쁨을 선포하고 살아 내야 할 곳은 교회가 아니라 어둠과 절망이 짓누르고 있는 세상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이 불러 모은 제자들과 형성한 공동체 안에 머물지 않았다. 예수 자신이 밖으로 나갔고, 제자들도 밖으로 파견했다. 교회는 기쁜 소식을 듣고 세상 밖으로 나가 전하고 실현하기 위한 공동체이지,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자기 안에 머무르는 공동체가 아니다.

 

육화의 원리는 우리에게 관심을 자기 밖으로 돌릴 것을 요청한다. 육화는 자기 비움(κένωσις)이기 때문이다.(필리 2,6-7) 하느님이 먼저, 자기를 주장하는 대신 자기를 비우고, 낮추었다. 하느님이 하느님 밖으로 나와 사람이 되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 밖으로, 특히 아래로 시선과 관심을 돌려야 한다. 바로 그곳에 우리 자신을 놓아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과 문제를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다. 관심을 밖으로 돌릴 때, 놀랍게도 자신의 문제도 함께 해결되는 수가 많다. ‘봉헌의 해’에 수도자들에게 하신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를 떠올려 보자. “여러분 자신의 문제에 갇힌 포로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밖으로 나아가 다른 이들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고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면 그러한 문제들은 자연히 해결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을 주면서 생명을 찾고, 희망을 주면서 희망을 찾으며, 사랑을 하면서 사랑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수도자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아니 모든 사람들을 향한 권고다.

 

이 권고의 근거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이고 하느님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이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의 독립된 세 위격이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고 상대를 향해 자신을 열고, 자신을 상대로 채움으로써 하나가 된다.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 상호침투)로 삼위는 하나를 이룬다. 삼위일체란 바로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감성적 고백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언명이다. 삼위일체의 모상인 우리도 사랑을 따라 살게 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인간 실존이다.

육화의 원리는 우리에게 ‘약함’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도록 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세상 모든 존재와 생명의 근원, 참 빛, 하느님이신 말씀이 우리를 사랑한 나머지 우리와 똑같이 사람이 되셨다. 참으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아기로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아기는 약하다.

 

당시는 로마 제국, 힘과 강함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힘에 의한 평화,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부르짖던 시대였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기로 세상에 오셨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지배하는 힘의 원리을 거부하셨다. 아니 깨버리셨다. 힘으로 해서는 평화도 구원도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 역사상 수많은 권력, 강함이 있었지만, 진정한 평화는 없었다. 갈등과 대립, 폭력과 전쟁의 악순환만 이어졌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가.

 

진정한 평화가 도래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되는 것은, 우리가 약함을 존중할 때,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 아기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결코 생존할 수 없다. 아기는 누구보다 약한 존재다. 우리가 약한 상대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평화가 온다. 약한 아기를 그 자체로 존중하는 사람과 사회라야 다른 사회적 약자들도 존중하고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그럴 때, 평화가 이루어진다. 오늘 우리의 변화도 힘이 아니라 촛불로, 광장의 아이들의 외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 지난 11월 16일 고병원성 조류 독감이 발생한 이후, 닭과 오리를 비롯한 가금류 2500만 마리가 살처분됐다. (TV조선 동영상 갈무리)

 

오늘날 밖으로, 아래로 눈을 돌리면, 존중해야 할 약자는 사람만이 아니라는 비명이 전국을 뒤덮고 있다. 지난 11월 16일 고병원성 조류 독감(AI)이 발생한 이후, 닭과 오리를 비롯한 가금류 2500만 마리가 살처분되었다. 규정상은 살처분 뒤 매몰이지만, 대부분 매몰로 살처분한다. 생매장하는 거다.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생매장이 더 쉽지도 않다. 여기서 동물에 대한 우리의 의식 수준이 어떤지 잘 드러나고 있다. 한 해에 버려지는 반려동물이 10만 마리에 이른다는 사실도 동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보여 준다.

 

조류 독감으로 인한 피해의 근원은 공장식 축산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축을 사육하는 방식이 문제인 거다. 극도로 밀집되고 밀폐된 사육 공장은 조류 독감 바이러스의 온실 역할을 한다. 게다가 살아 있는 닭을 고깃덩어리, 알 낳는 기계로 만들어 버린다. 닭은 A4 종이 2/3정도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내고 폐기된다. 지옥에서, 알을 낳고 치킨이 되어 간다. 고기의 대량 생산은 육식의 폭발적 증가를 일으켰고, 급증한 육식 수요를 채우기 위해 공장식 축산이 불가피해졌다. 악순환이다.

 

이렇게라도 육식을 하겠다는 우리는 누구인가? 여기 어디에, 약함에 대한 존중과 수용이 있는가? 강함이 지배할 뿐이다. 하지만 강함으로 쾌락은 누리겠지만, 평화를 누리지는 못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우리는 과연 다른 사람들, 특히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까?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면 답이 나온다.

 

조류 독감의 피해를 근원적으로 줄이려면, 공장식 축산 대신 방사 사육을 해야 한다. 하지만 방사 사육으로 지금과 같은 양의 고기와 계란을 생산할 수 없다. 결론은 육식을 대폭 줄이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대규모의 육식은 생명을 경시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육식의 자제는 생명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한가하게 가축이나 이야기할 때냐고 말하지 말자. 자연을 거칠게 대하는 사회는 결코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다. 2015년에 산재로 죽은 노동자의 95퍼센트가 하청노동자였다. “우리는 환경위기와 사회위기라는 별도의 두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에 당면한 것입니다.”("찬미받으소서", 139항) 자연에 대한 관심과 존중,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존중은 동전의 양면이다. 

아직도 세상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하지만 이미 빛이 비치고 있다. 우리가 이 빛과 육화의 원리에 따라 밖으로 나갈 때, 타자를 대할 때, 우리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로 사는 것이다.(이사 52,7) 그럴 때, 우리 모두, 마구간의 구유에서 약자로 삶을 시작해, 약한 이들과 하나가 되어 살고, 십자가에서 약자로 삶을 마친, 아름다운 사람, 예수를 따르는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 특히 약자들에게 오신 하느님! 성탄을 축하합니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신부, 서강대 교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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