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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선배' 세지마 류조 그리고 한국

세지마를 따르던 이들의 조국은 어디인가?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6/05/27 [23:39]

전두환의 '선배' 세지마 류조 그리고 한국

세지마를 따르던 이들의 조국은 어디인가?

서울의소리 | 입력 : 2016/05/27 [23:39]

1980년 3월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절친'인 세지마 류조 일본 이토추 상사 회장에게 연락을 한 통 넣는다. 

"한번 은밀히 한국에 와서 '군의 선배'로서 전두환·노태우 두 장군을 격려하고 조언을 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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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선배' 세지마 류조

 

1.

1980년 5월 17일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을 피로 진압하고 사실상 국가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12·12쿠데타를 1차 쿠데타, 5·17 계엄 선포와 광주학살을 2차 쿠데타라고 한다.

 

1980년 5월 말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렇게 국가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당시 전두환의 고민은 2가지였다. 하나는 비민주적으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눈치가 보였다는 점. 참모인 허화평은 수 차례 "3김을 제거하고 직선제를 통해 정당하게 권력을 잡아야 정권이 안정된다"고 주장했었다. 비민주적인 정권탈취를 만회할 만한 뭔가가 필요했다. 다음으로는 경제 위기였다. 사실 1979년 제2차 오일쇼크와 불황으로 경제문제가 심각했다. 무역량과 수출액은 지속적으로 늘었지만 수입액은 더 빨리 늘어났다. 외채와 무역적자가 쌓인 상태에서 오일 쇼크는 치명타였다. 당시 민심이반은 박정희의 오랜 독재에 국민이 지친 점도 있지만 경제위기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2차 쿠데타'를 성공시킨 직후인 1980년 6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세지마 류조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세지마 류조는 전두환에게 '선배'로써 전두환에게 점잖게 조언을 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잘 아는 3S 정책이다. 올림픽과 같은 대형 스포츠 이벤트에 국민들이 얼마나 열광하는지 세지마 류조는 상세히 설명해줬다. 전두환의 첫 번째 고민은 이렇게 해법을 찾았다.

 

이후 1980년대 초 컬러텔레비전 방송 시작과 더불어 프로축구, 프로야구, 국풍운동 등 온갖 문화행사가 국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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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고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직 산업기반이 건실하지 못한 한국이 1979년 일어난 경제위기를 자력으로 풀어나갈 힘은 없었다. 결국 방법은 어디서 돈을 마련하는 것 뿐이다.

 

이때 외무장관인 노신영이 나섰다. 노신영은 일본에게서 100억 달러를 받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노신영의 논리는 이랬다. 대한민국은 사회주의 세력을 막는 일종의 완충지대다. 대한민국 덕분에 일본은 안보비용을 크게 부담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국가발전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안보비용'을 명분으로 돈을 받아내면 된다는 것이다.

 

논리는 그럴 듯 하다. 그러나 일본과 어떤 식으로 누구와 접촉해 돈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인가?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이라는 나라가 허투루 돈을 퍼주는 나라는 아니다.

 

결국 전두환은 다시 세지마 류조를 찾았다. 일본에서도 세지마를 특사로 지명했다. 노신영은 줄기차게 60억 달러를 요구했지만 세지마 류조는 일본 정부안인 40억 달러를 관철시켰다. 세지마 류조는 엔화 차관으로 18억 5000만 달러, 수출입은행 융자로 21억 5000만 달러 대출(7년 거치 금리 6%)을 하는 조건으로 전두환을 납득시켰다. 결국 돈을 받은 게 아니라 빌린 셈이 됐다. 어쨌든 이 돈 덕분에 전두환 정권은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전두환의 고민을 해결한 세지마 류조. 과연 그는 누구인가? 또 어떻게 해서 그는 전두환·노태우의 '선배'가 된 것인가?

 

2.

세지마 류조. 1911년 일본 출생이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제가 패망할 때 이미 중좌로 복무 중이었다. 일각에서는 박정희의 직속상관이라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일본 육사 '선배'로서 박정희와 한국군 주요 인사들을 만나왔다. 따라서 박정희의 '후배'인 전두환과 노태우도 연장선에서 세지마를 '선배'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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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토추 상사에 근무하며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말단에서 회장까지 올랐다. 그를 모티브로 삼은 소설 <불모지대>는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소설이기 때문에 과장된 내용이 많다.

 

그가 주목받은 계기는 1973년 10월 제1차 오일쇼크다. 세지마 류조는 중동과 관련된 사소한 기사들도 다 모아 분석한 결과 '곧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기름값이 폭등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영민한 세지마 류조는 자신의 인맥을 굉장히 잘 활용했다. 이미 1960년대부터 한국에 자주 들락거렸다. 그때 세지마 류조는 1차적으로는 일본 육사 '선배'인 점을 활용해 김종필 총리, 김정열 총리, 유재흥 국방장관, 박원석 참모총장 등 한국군 인맥을 확보했다. 이들을 통해 2차적으로 정·재계 인사로 인맥을 확대해 나갔다.

 

세지마 류조와 한국 재계가 가장 먼저 노린 것은 1960년대 대일청구권 보상으로 한국에 보상된 8억 달러였다. 당시 한일경협을 관리했던 박제욱 전 영진흥산 사장은 2015년 한겨레 신문과 인터뷰를 통해 "(대일 청구권 보상 자금을 노리는) 한일 유착세력은 한국 쪽에서는 장기영 부총리, 이후락, 김동조 주일대사, 이동원 외무장관이고 일본 쪽에서는 기시 노부스케, 야쿠자 출신인 고다마 요시오, 세지마 류조 등이었다"고 증언했다. 

 

박제욱이 청구권보상금에 손을 못 대게 하자 세미자 류조는 박태준과 함께 일본 내 정치깡패인 고다마를 움직여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 증언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미 1960년대 후반, 세지마 류조는 한국 내 군부 및 경제계에 상당한 인맥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막강한 한국인맥을 확보한 세지마 류조는 1980년 드디어 전두환·노태우 등 최고 권부에게도 '선배'로 군림하게 됐다. 이후 1980년대 세지마 류조의 활약은 눈부셨다. 전두환 정권은 취약한 정권 정당성을 항상 고민했고, 세지마 류조는 전두환에게 대외적 활동으로 상쇄하라고 조언했다. 결국 미국과 일본의 지지를 획득하라는 것이다. 이 때 세지마 류조는 한일 밀사역을 자처했다. 지금까지 확인되는 청와대 방문만 해도 무려 15차례다. 일본 나카소네 총리 방한, 전두환 답방 등이 그의 손에서 처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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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수상이었던 나카소네와 전두환 

 

하지만 잘 나가던 한일관계가 1986년 일본 역사 고교 교과서 왜곡 문제에서 걸렸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교과서 역사 왜곡에다 일본 내 인사들의 극우 망언이 이어졌다. 1980년대 중반 아직 많은 국민들이 일제강점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반일 감정은 훨씬 강했다. 전두환조차 난감할 정도였다. 

 

표면적으로는 전두환 정권이 일본 측에 항의를 하는 모양새를 내고, 일본 정부가 교과서 수정을 수락하면서 문제를 해결된 듯 보인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은 세지마 류조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고 한다. 

 

"원래 타국의 교과서에 대해 의견 같은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양국관계의 과거 특수사정 때문에 국내에서 항의가 확산되고 더욱이 그것이 자칫하면 양국관계를 손상하겠기에 이번 귀 정부에 대한 항의조처를 취한 것이다. 이에 대한 나카소네 총리의 조치에 신뢰를 보낸다."

 

결국 겉으로만 쇼를 했을 뿐 전두환의 속내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1990년 아키히토 일왕이 표현한 '통석의 염'이라는 키워드도 세지마 류조가 찾아낸 말이다. 세지마 류조는 가이후 일본 총리에게 일본왕 사죄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과거사 사죄문제는 1984년 전두환 대통령 방일 때 이미 소화천황이 유감의 뜻을 표한 이상, 이번에 또다시 새 천황이 되풀이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만약 여러 관계상 새 천황이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1984년 수준 이상으로 갈 필요는 없으며 표현상의 문제만 잘 궁리하면 되지 않겠는가. 일본통치하의 여러 시책으로 피해를 준데 대해서는 국정상 책임자인 총리가 명확하게 사과하면 되지 않는가. 다만 그 경우에도 명치43년(1910년) 한일합방을 '침략' 또는 '식민지화'로 정의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비춰보아 부적당하다."

 

이에 대해 가이후 총리는 일단 일왕이 직접 발언을 하되, 적절한 용어를 찾아보라고 했다. 그리하여 세지마 류조는 '통석의 염'이라는 절묘한 단어를 찾아낸다. 사죄의 의미는 없지만, 뭔가 안타까워 하는 듯한 묘한 단어를 찾아낸 것이다.

 

3.

지금까지 알려진 유명한 그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종합상사 설립을 통해 수출 주도 전략을 펴라. 

-1973년 초 김종필에게

 

한국에는 일본 육사 출신 우수한 인재가 많았고 대다수가 내 후배였다.

-회고록 중에서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은 온후하고 관대하고 시야가 넓었다.

-1980년 6월 전두환·노태우를 만난 후 소감

 

올림픽 앞으로 00일 이런 식으로 전광판을 설치해봐라... 기회를 봐서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직접선거 대신 내각책임제를 확립하라. 

-1988년 1월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를 만난 자리

 

이처럼 세지마 류조는 한국의 정재계 지도자들에게 적지 않은 조언을 해주었다. 심지어 전경련 국제자문단에도 그의 이름을 올렸다. 문제는 과연 그것이 '한국을 위한 것인가?'이다. 이에 대한 판단은 손쉽게 나온다. 세지마는 말년에 일본 극우세력의 후원자로 변신한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왜곡 교과서로 유명한 '후쇼샤 교과서'를 적극 지원했다. 일본 왕의 사죄를 가로막고 묘한 단어로 문제를 넘길 때부터 이미 세지마 류조의 본심은 드러났던 셈이다.

 

그가 원한 것은 한국이 친일성향이 강한 세력이 계속 지배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일본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함께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세지마 류조의 손아귀에서 그를 선배로 모시고 휘둘려왔던 한국의 정재계 인사들이 많았다. 앞서 얘기했던 정치인 뿐 아니라 박태준,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최종현(SK그룹 회장)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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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 7월 6일 청와대에 '선배' 세지마 류조를 불렀다. 그 앞에서 일본 국민가수였던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를 일본어로 몇 곡 불러 세지마를 놀라게 했다. 이 자리에 박태준 회장, 김재순 국회의장이 함께 있었다. 전두환이 백담사에 유배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세지마 류조는 지원품을 보내 전두환을 위로했다. 전두환은 감사의 인사를 표했으며 유배가 풀린 후 일본을 방문했다.

 

그리고 1990년, 한국현대사를 크게 후퇴시킨 3당 합당 아이디어도 그의 머리에서 처음 나왔다고 한다. 세지마 류조의 자료를 볼 때마다 생기는 의문이 있다. 

 

과연 세지마를 따르던 이들의 조국은 어디인가? 이 나라는 누구의 나라인가? 

 

딴지일보 임종금 - http://www.ddanzi.com/index.php?mid=ddanziNews&category=977703&document_srl=979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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