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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55주기...민주와 인권은 어디에?

지랄탄과 사과탄 대신 물대포(살수차)와 최루액(캡사이신)이라니...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5/04/19 [22:41]

4.19혁명 55주기...민주와 인권은 어디에?

지랄탄과 사과탄 대신 물대포(살수차)와 최루액(캡사이신)이라니...

서울의소리 | 입력 : 2015/04/19 [22:41]

 박종표를 아십니까? 박종표는 일제 강점기 때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 구금하고 악랄하게 고문하던 악질 헌병보였습니다. 그래서 해방 후 반민특위의 특경대에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로 풀려났습니다.

▲  김주열 사건을 다룬 당시 신문   © 편집부

 

그가 반민특위에 붙잡혔다가 풀려난 사연은 지금 팩트티비 편집국장으로 있는 정운현씨가 자신의 오마이 블로그에 쓴 '친일헌병 박종표가 반민특위서 '무죄'받은 까닭'이란 글에 잘 나옵니다. 아래에 정운현 블로그 글을 일부 인용합니다.

    

“박종표가 최종 선고를 받은 날은 단기 4282년, 즉 1949년 8월 19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1949년 6월 6일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여(이른바 '6.6사건) 특위가 제대로 활동을 못하도록 쑥대밭으로 만든 이후 반민특위는 변질됩니다. 즉, 김상덕 초대 반민특위 위원장(전 임시정부 문화부장, 제헌국회의원)이 교체되고, 나아가 공소시효도 단축되는 법이 통과되면서 반민특위는 파장 국면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다시 말해 '6.6사건' 이후 반민특위가 약화되면서 이후 재판은 건성건성으로 진행됐으며, 그러다보니 거의 대다수의 친일파들이 '무혐의'나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이렇게 풀려난 박종표는 대한민국 경찰이 되어 자유와 민주를 말하는 시민들을 잡아다 고문하는 악행을 계속하게 됩니다. 그랬으므로 결국 그는 김주열에게 최루탄을 발사하여 죽게 만들고 시신을 유기했습니다. 즉 열여섯 살 고등학교 입학생 김주열에게 직격으로 최루탄을 발사해 눈을 관통하게 함으로써 살해했으며,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숨진 김주열 군의 시신에 돌을 매달아 마산 앞바다에 수장시킨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이었습니다.

    

4.19 후 만들어진 혁명재판소에서 박종표는 최루탄을 발사하고 김주열의 시신을 유기한 사실을 자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시신 유기만 인정하고 최루탄 발사는 부인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당시 재판 기록을 보면 박종표는 김주열 열사의 시신 유기 과정에 대해 이렇게 자백합니다.

    

“3월 15일 밤 10시쯤 교통주임으로부터 최루탄이 눈에 박힌 괴이한 형상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고 손석래 마산경찰서장에게 보고하자, 서장이 '적당히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여 지프차를 타고 현장에 도착, 시체를 담아 싣고 일단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에서 시체를 유기하기로 마음먹은 후 다시 월남동 마산세관 앞 해변가로 시체를 가져가 순경 한대진과 지프차 운전수의 조력으로 시체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졌다”

    

하지만 김주열의 시체는 그로부터 27일 후인 4월 11일 오전 10시 중앙부두 앞바다에 처참한 모습으로 주먹을 꽉 진 채 떠올랐으며 이 시신을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촬영, AP통신을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됩니다. 그리고 이로써 다시 마산시민들이 총궐기하게 되고, 시위는 서울로 확산돼 마침내 4월 19일 이승만이 물러나기에 이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권력에 추종하던 악질 일본 헌병보였다가 해방되자 대한민국 경찰이 되어 시민 봉기를 제압하고, 어린 학생의 시신까지 유기한 박종표의 모습...그 모습과 오늘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족들을 강제로 경찰차에 태워 연행한 모습이 오버랩된다면 과민반응일까요? 역사에서 정의를 바로세우지 못한 되돌림의 현장이라면 과한 표현일까요?

▲ 2015년 4월 18일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의 힘에 의해 고립된 경찰차    © 특별취재부

    

역사는 10대가 바꿉니다. 55년 전인 1960년의 봄에 고등학생 김주열을 보낸 것은 최루탄이었는데, 그 최루탄은 박종표를 무기징역에 처하게도 하고 이기붕과 최인규와 곽영주와 그 외 수많은 권력 추종자들은 저승으로,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려 화와이로 보내버렸습니다.

    

김주열 시신이 없었는데 4월 18일 안암동 고려대학교 교문을 빠져나온 학생들이 신설동 종로를 지나 광화문에 이르러 점거하는 봉기를 했을까요? 4.18을 기점으로 전국으로 번진 끝에 4·19 혁명으로 이어졌을까요? 역사에 가정은 없습니다. 그러나 김주열의 시신이 봉기의 불을 댕긴 도화선이었다는 것, 박종철의 시신을 보지 못한 시민들의 시위가 이한열의 최루탄 사망 시신을 보고 6월 항쟁이 걷잡을 수 없는 시민봉기로 이어졌다는 것.....현실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4.19는 55년이 지났으며, 87년 6월 항쟁은 28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2015년 이 봄에 다시 10대들이 봉기하고 있습니다. 10대만이 아니라 여성들이 봉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찰은 10대와 여성을 체포하며 연행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에 대한 시민저항을 경찰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광화문에 저지선으로 쳐 둔 차벽이 무너졌습니다.

▲ 시위대에 뜷려 고립된 경찰들이 당황하며 본대를 찾아 허둥지둥하고 있습니다.     © 특별취재부

 

시위대에 10대와 여성, 그리고 화이트칼라가 앞장서면 권력은 견딜 수 없습니다. 이를 아는 경찰은 어제 살수차를 동원했으나 싣고 온 물을 다 사용하고도 시민들을 해산시키지 못해 도로의 소화전 물을 쓰는 불법까지 자행했어도 결국 시민들에게 방어선이 뚫렸습니다.

▲ 자식을 잃고 삭발한 어머니를 연행하는 경찰을 시민들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 특별취재부

 

그래서 경찰이 이처럼 물대포로 진입하려 했으나 시민들이 되려 경찰을 제압했습니다.

▲ 살수차를 이용, 물대포를 발사하는 경찰...그래도 시위대에게 저지선이 뚫렸습니다.    © 특별취재부

 

시위대에게 경찰의 방어선이 뚫린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경찰 방어선이 뜷렸다는 것은 경찰이 시위의 진압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4.19에 그랬으며 1987년 6월 항쟁이 그렇게 시민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2014년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가 이제 이 정권을 끝으로 몰아가고 있음이 보입니다. 2015년 4월18일 서울 광화문은 경찰의 방어선이 뚫렸습니다.

▲   ©임두만

 

따라서 4.19 55주 년인 오늘, 경찰은 더욱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어제 세월호 유족들은 오늘 집회의 선언을 하지않았습니다. 그래도 시위대는 시내로 나올 것이며 경찰은 이들을 강제 진압할 것입니다.

 

더 다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다시는 이기붕과 최인규와 곽영주가 나와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로고 임두만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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